[보림별어]
매장이냐 화장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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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 2016 년 8 월 [통권 제40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387회 / 댓글0건본문
영조대왕의 친필을 찾다
서오릉을 가기 전에 들른 곳은 구파발 흥국사였다. 십여 년 만에 다시 찾았다. 큰법당 역할을 하는 중심건물은 약사전(藥師殿)이다. 영조 대왕의 친필로 전하는 ‘약사전’ 편액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원비(元妃, 첫째 부인)인 정성(貞聖) 왕후의 극락왕생과 왕실의 평안 그리고 국운융성을 기원하며 사찰을 중건했고 절 이름도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조선시대에 서오릉을 공식적으로 관리한 사찰은 은평구 수국사(守國寺)다. 그럼에도 부인을 위해 지아비는 따로 흥국사를 원찰삼아 오고갈 만큼 두 사람 사이는 애틋했던 모양이다.
흥국사 약사전
서오릉에는 많은 왕릉이 있다. 구역도 엄청 넓다. 잠시 짬을 낸 나들이라 영조 왕비가 누워 있는 홍릉(弘陵)만 찾았다.
안내판을 보니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평지를 천천히 걷다가 느릿느릿 언덕길로 천천히 올랐다. 다시 내리막길이다. 잘 다듬어진 넓은 잔디동산 위에 봉분은 한 개였다.
옆자리는 당신자리만큼 지아비를 위해 비워 놓았다. 영조는 아직도 오지 않았는데 그녀는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이는 계비(繼妃, 둘째 부인)인 정순왕후와 함께 반대방향인 구리시 동구릉에 나란히 누워 있다.
공간배치로 미루어 보건대 영조는 첫 부인 곁으로 갈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살다 보니 마음이 변한 모양이다. ‘곰보다는 여우’를 찾아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알고 보면 그게 아니었다. 영조의 마음은 변함없었을 것이다. 직접적인 이유는 둘째 부인이 신랑보다 30년을 더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영조보다 먼저 죽은 원비에게는 지아비의 장지 선택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둘째 부인은 정조와 나이 차가 많았다. 영조 사후에도 ‘대비마마’로 정치적 위세가 대단했다. 그 영향력이 묏자리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어쨌거나 역사는 끝까지 살아 남은 자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 착한 조강지처를 연민하게 만든 산책길이다. 차라리 (화장하여) 왕릉이 없었다면 왕가의 사생활이 드러나지 않았을 텐데.
매장법과 화장법을 동시에 만족시키다
한반도에서 왕의 장례식으로 화장법을 선택한 것은 신라 문무왕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감포 앞바다 바위에 산골했고 그 바위는 해중릉이 되었다. 화장을 해도 왕릉은 남는다. 사실 왕릉이라기보다는 자연산 바위가 왕릉대접을 받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대왕암이다. 해안가를 따라 멀지 않은 울산의 울기등대 앞바다에는 문무왕비가 묻혀 있다는 바위가 구전으로 전해온다. 왕비암이 아니라 그냥 이것도 이름은 대왕암이다. 이렇게 떨어져 있어도 아무도 금슬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저 한 쌍의 호국룡으로 숭앙될 뿐이다.
인도는 화장이 대세다. 중국은 매장이 관례다. 두 장례법은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충돌한다. 저항이 만만찮았다. 법왕(法王) 대접을 받는 인도의 28조는 대부분 정형화된 열반 모습을 보여준다. 몸을 공중에 날려 스스로 불을 붙였고, 화장이 끝난 다음 하늘에서 사리가 쏟아져 땅에 떨어지면 이것을 제자들이 수습하여 사리탑을 만들었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기록자는 중국인이지만 대상자가 ‘인디언(인도사람)’이니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중국인에게는 기존 정서상 그럴 수가 없었다.
중국선종의 1조인 달마 대사는 두 문화권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했다고 기록했다. 3년 후 관 뚜껑을 열어 보니 짚신 한 짝만 남았더라고 하면서 매장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화장법을 도입하려는 노력이 뒤따랐다. 『보림전』 권8 기록에 의하면 3조 승찬 대사는 매장법과 화장법을 동시에 수용한 절묘한 장례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봉분을 개장하고 관을 열었다. 장작을 쌓고 화장을 했다.(於是開墳開棺 積薪發火)”
매장한 뒤 3년 후에 다시 화장을 통해 사리탑을 세우는 방식으로 두 문화권의 장례법 충돌을 중도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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