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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회통이제會通二諦, 대립과 갈등을 넘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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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9 년 6 월 [통권 제74호]  /     /  작성일20-05-29 11:30  /   조회4,90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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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성균관대 초빙교수 

 

불교경전은 방대하고, 교리도 복잡해 초심자들에게는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수많은 경전들이 한결같거나 앞뒤 아귀가 딱딱 맞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부처님은 수기설법隨機說法을 하셨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듣는 사람의 그릇과 상황에 따라 그에 맞는 비유와 내용을 말씀 하시고, 최적의 교리를 일러주셨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설법방식을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에게 미리 제조된 동일한 약을 처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병과 증상에 따라 최적의 약을 처방하는 것이 응병여약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수많은 경전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교리 역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모든 교설을 포괄하는 중관사상 

 

하지만 어떤 것이 불법의 정수精髓이고, 무엇이 불법의 핵심인지 알고 싶은 것이 배우는 사람의 마음이다. 이런 지적 욕구에서 ‘교판敎判’이라는 분석체계가 등장하고, 돈교頓敎니 원교圓敎니 하는 교법에 대한 등급이 등장하게 되었다. 굳이 수당隋唐 대에 등장한 이런 교판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개별 경전에서도 무엇이 불법의 핵심인지에 대한 내용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한 예로 『중아함경』 7권에 수록된 「상적유경象跡喩經」을 들 수 있다. 

 

이 경의 내용은 제목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코끼리 발자국의 비유’가 핵심이다. 땅 위를 걸어 다니는 동물 중에서 발이 가장 큰 동물은 코끼리다. 제아무리 사나워도 사자의 발자국은 코끼리의 발자국 속에 들어간다. 이렇게 모든 동물의 발자국은 코끼리의 발자국 속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코끼리의 발자국으로 상징되는 것은 다름 아닌 사성제四聖諦의 진리를 말한다. 「상적유경」에서는 “뭇 교설은 사성제로 집약된다.”고 결론짓고 있다. 사성제는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포괄하는 것이며, 모든 불교교설은 사성제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사성제는 부처님께서 깨달은 연기緣起의 이치를 담고 있는 교설이며, 팔정도로 제시된 중도中道의 이치를 담고 있는 교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초기불교에서는 사성제가 모든 교설을 포괄하는 가르침이라고 했다. 반면 삼론종을 체계화한 가상길장은 『중론中論』이야말로 코끼리의 발자국과 같이 불교의 모든 이치를 포괄하는 교설이라고 보았다. 길장은 『중론』 또는 『중관론』이라는 용수의 저작에 등장하는 제목에 대한 설명, 즉 해제解題를 통해 이와 같은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길장은 『중관론소』에서 ‘중론中論’에서 ‘중中이란 소전의 이치[소전지리所詮之理]’로써 불교의 근본원리를 표방하는 것이며, ‘논論이란 능전의 가르침[능전지교能詮之敎]’으로써 중이라는 근본원리에 대해 설명이라고 했다. 길장은 중이란 불교사상의 근본원리이므로 ‘중에 섭수되지 않은 이치는 없다[무리불섭無理不攝]’고 보았다. 「상적유경」이 불교교리는 사성제에 모두 포함된다고 한 것처럼 길장은 불교의 모든 이치는 중의 이치에 포함된다고 보았다. 

 

성철 스님은 길장의 이런 견해에 대해 “불교의 모든 종파가 이 『중론』에 기본을 두고 『중론』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전제하며 “중을 내려놓고 불교가 설 수 없으며, 중은 불교의 근본원리”라며 길장의 견해를 지지했다. 이처럼 『중론』에서 중이란 불교사상의 근원이자 원천이기 때문에 길장은 ‘중’이라는 이치로 ‘거두어지지 않는 가르침이란 없다[무교불수無敎不收]’고 보았다. 

 

도대체 중이 무엇이기에 광대한 불교사상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것일까? 길장은 ‘중中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행하는 도[소행지도所行之道]’라고 했다. 중으로 표현되는 중도는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이 행한 도라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행한 도가 중이라면 중은 불법의 근간이 분명하다. 불자는 부처님의 삶을 사표로 삼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불자들은 부처님이 행한 중의 도를 행위의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 불보살들이 행한 도를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 불자의 삶이며, 중을 실천하는 것이 불법의 모든 이치를 받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상이 ‘중론’이라는 제목에 대한 풀이였다면 ‘중관中觀’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길장은 중관에서 “관觀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관하는 마음[능관지심能觀之心]”이라고 했다. 중이 불법의 근본 이치이자 모든 불보살님들이 행한 도라면, 관이란 불보살이 세상과 존재를 보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성철 스님은 여기서 말하는 ‘관觀’이란 단순히 어떤 대상에 대한 ‘봄’이 아니라 ‘관법觀法’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중관中觀이란 ‘중의 이치에 의해 성취된 봄[관觀]’이라는 것이다. ‘중관’은 중의 이치에 입각한 봄이며,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은 바로 이 중에 대한 명확한 봄, 중의 이치에 대한 관조를 통해서 깨달은 마음이다. 

 

그렇다면 논論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길장은 “모든 부처님이 관 觀하여 마음에서 깨치고 입으로 설명한 것을 경經이라 하며, 보살이 관觀하여 마음에서 깨치고 입으로 설명한 것을 논論이라 한다.”고 했다. 모든 부처님은 중에 대한 바른 관조, 즉 중관을 성취하여 마음을 깨치고, 그 심오한 도리를 전하기 위해 말이라는 매개를 통해 설명했다. 따라서 경經이란 중관의 진리가 언어화 된 것이며, 논論은 보살이 중의 이치를 보고 마음을 깨닫고, 그 이치를 설명한 것이다. 

 

결국 『중론』이란 보살이 중의 이치를 깊이 관조하여 깨달음의 마음을 성취하고, 그 이치를 언어로 드러낸 문헌이라는 뜻이다. 물론 논에 선행하는 경이 있다. 부처님이 중의 이치를 설명한 것이 경전이라면 그 경전의 핵심을 풀이한 설명이 논이다. 이처럼 삼론종에서는 ‘중中’이란 제불보살의 근본원리이자 불교의 근본원리여서 불교의 모든 이치는 중에 모두 들어 있고, 불법의 모든 이론은 중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변견과 대립을 넘어서는 진리 

 

길장은 『삼론현의』에서 중의 “도道를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불보살의 정관이 발생한다[제불보살정관諸佛菩薩正觀].”고 했다. 모든 불보살은 중의 이치에 의해서 비로소 변견邊見을 극복하고 치우치지 않는 안목인 정관正觀을 성취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성철 스님은 중도를 깨치고, 중도에 입각하지 않으면 변견에 떨어지게 되고, 변견으로는 정관正觀, 정지正智, 정견正見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바른 지혜는 반드시 중에 입각하여 치우친 견해를 치유해야 하며, 변견을 치유한 상태가 곧 정관이고 정견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의 핵심이란 무엇일까? 해제에 나타난 설명은 중이 불법의 근본이라고 했지만 다소 추상이다. 제불보살님이 행한 것이 중이라고 했고, 중의 이치에 입각한 봄이 중관이라고 했는데, 그 핵심이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성이 결려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답이 바로 『중론』의 첫 장인 「관인연품觀因緣品」에 대한 해석이다. 여기서 길장은 『중론』의 근본사상이란 ‘이제설二諦說’에 있다고 보았다. 

 

길장은 “『중론』이 비록 궁구하지 않은 법이 없으며[무법불궁無法不窮], 다하지 않은 말이 없으나[무언부진無言不盡], 그 요체를 총괄하면 이제를 회통하는 것[회통이제會通二諦]”이라고 했다. 『중론』은 불법의 근본이므로 궁구하지 않은 법이 없으며, 불법 전체를 모두 성취한 논서라는 것이다. 나아가 어떤 부처님의 말씀이나 보살의 말씀일지라도 『중론』에서 설명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했다. 『중론』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그 의미를 바로 보면 불교의 모든 교설을 다 이해하는 만큼 중론에는 미진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대단한 의미를 갖는 『중론』의 근본골자에 대해 길장은 ‘이제를 회통하는 것[회통이제會通二諦]’이라고 요약했다. 이제란 상대적이고 대립하는 이항대립적 사유나 진영논리를 의미한다. 있음과 없음, 진제와 속제, 남성과 여성, 보수와 진보 같이 세상은 온통 이분법적 사유에 의해 서로 편을 갈라 대립하고, 진영논리 속에 갇혀 대립하고 갈등하며 번뇌를 양산하고 있다. 그런 번뇌에 의해 분노와 적개심이 증폭되고,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면 마침내 폭력적 양상을 띠고, 최후에는 전쟁으로 치닫는 불행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따라서 상대적이고, 대립적인 두 법을 회통하는 것은 대립하고 갈등하는 번뇌를 말끔히 제거하는 것이다. 중생의 근원적인 고통은 그와 같은 번뇌에서 유발됨으로 이제를 회통하는 것은 곧 중생의 근원적 고통을 제멸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제의 회통은 난해한 철학에서 이고득락 離苦得樂이라는 자비심으로 전환된다. 이제회통의 근간은 중생의 번뇌와 고통을 제멸하고 영원한 평화와 안락을 위한 자비심이 근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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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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