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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거사와 배우는 유식]
현재 있는 곳에 구속시키는 마음, 말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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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2019 년 6 월 [통권 제74호]  /     /  작성일20-05-29 11:32  /   조회5,49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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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불교학자 ‧ 유식

 

『고경』 제72호와 제73호에서 말나식의 작용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호에도 계속해 말나식은 어떤 작용을 하는 마음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더불어 말나식은 여러 명칭으로 불리는 마음인데,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1. 말나식은 자신이 생존하는 장소에 구속되게 하는 마음이다. 

 

먼저 『유식삼십송』의 관련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수소생소계隨所生所繫(<말나식은 자신이> 태어난 곳에 속박되게 한다).” 

 

즉 말나식은 ‘언제나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에 구속되게 하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유식삼십송』의 주석서인 『성유식론』에서 말나식은“스스로 언제나 자타自他의 아뢰야식[자기가 태어난 곳]을 대상으로 삼아 자아라고 한다.”라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말나식은 스스로 언제나 자신이 태어난 곳인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삼아 ‘자아’라고 착각하여 아뢰야식에 애착을 가지고 계속하여 집착하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말나식은 아뢰야식에 구속되는 마음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이 태어나 곳, 예를 들면 욕계에 태어나면 욕계에 구속되고, 색계에 태어나면 색계에 구속되고, 지옥에 태어나면 지옥에 구속되고, 한국에 태어나면 한국이라는 나라에 구속됩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자신이 태어난 곳에 구속됩니다. 

 

말나식의 작용을 잘 표현한 속담이 있습니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는 속담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보통 사람은 주임이나 대리였을 때는 주임이나 대리의 아집을 가지고 업무를 보고 직장생활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과장이나 부장이 되었을 때는 과장이나 부장의 아집을 가지고 업무를 보고 직장생활을 합니다. 이사로 승진하면 이사의 아집으로 직장생활을 합니다. 다시 말해 대리, 과장, 부장, 이사라는 자신이 맡은 직책[사는 장소나 위치]에 구속되어 생활한다는 것입니다. 과장이 되면 대리 시절을 잊고 오로지 과장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일을 처리합니다. 부장되면 과장시절이 었을 때를 잊어버리고 부장의 마음으로 근무합니다. 이사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필자도 ‘현재 내가 위치한 장소에 구속되는 존재’라는 것을 자주 경험하곤 합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사실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0년 전의 일입니다. 제가 근무하는 대학 입구는 도로가 좁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게들이 많아 늘 혼잡합니다. 지금은 일방통행으로 지정되어 비교적 혼잡이 덜합니다만, 당시에는 양방 통행이 가능하여 도로 양쪽에 자동차들이 주차되어 있어 출퇴근 시간에는 매우 복잡했습니다. 그런데 아침 강의 시간에 쫓겨 어쩌다 차를 몰고 가면 보행하는 학생들[보행자]과 필자[운전자] 사이에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제가 뒤에서 아무리 경적을 울려도 학생들은 길을 비켜주지 않습니다. 이런 일을 반복하다 보면 아침부터 기분을 상하게 되어 길을 비켜주지 않은 학생에게 큰 소리로 화를 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유가 있어 출근 시간에 대학까지 걸어가는 보행자가 되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대학 입구의 좁은 도로 양쪽에는 주차한 차가 있어, 필자뿐만 아니라 보행자들은 도로 중앙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운전자는 경적을 울리면서 길을 비켜달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양쪽에 주차된 자동차 때문에 제 자신을 포함해 보행자는 비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행자는 경적을 무시하고 계속 도로 중앙을 걷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운전자는 운전자대로 화가 나고, 보행자는 보행자대로 화가 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필자는 어제의 운전자 입장은 까맣게 잊고 보행자의 입장에서 “아침부터 왜 지랄이야!” 하며 운전자뿐만 아니라 내 자신이 듣기에도 민망한 아주 심한 욕설을 운전자에게 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처한 장소나 입장에 따라 상황을 파악하고 해석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들은 말나식의 입장, 즉 철저하게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판단하고 잣대질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마음인 말나식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한번 살펴보세요. 얼마만큼 말나식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는지를…. 

 

2. 말나식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오염된 마음이지만, 의식과 아뢰야식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말나식의 다양한 작용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말나식의 또 다른 명칭을 통해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말나식과 또 다른 이름인 ‘염오식染汚識’은 지난 호에서 설명했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지난 호에서 사량식은 설명했지만, 새롭게 추가할 내용이 있어, 다시 한 번 더 설명하겠습니다. 더불어 말나식의 또 다른 명칭인 ‘사량식思量識’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18년간의 인도 유학을 마치고 중국에 돌아 온 현장 스님이 유식학 즉 법상종의 소의 논서인 『성유식론』을 한역했습니다만, 현장 스님의 제자인 규기 스님(주1)이 『성유식론』 10권의 문장이 광대하고 의미가 깊은 것을 보고서, 다시 현장 스님에게 『성유식론』의 핵심을 간추려 줄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현장 스님은 7언 절구의 12구로 된 매우 짧은 게송으로 『팔식규구』를 작성하였습니다. 그 게송 중에 말나식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항심사량아상수恒審思量我相隨 유정일야진혼미有情日夜鎮昏迷(<말나식은> 언제나[恒] 세심하고 집요하게[審] 사량하여[思量] 아상에 따른다[집착한다]. <그리하여> 유정[중생]은 언제나[鎮] 밤낮으로 혼미하다).”

 

라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명나라 시대 감산 스님(주2)이 『팔식규구』에 대한 『팔식규구통설』이라는 주석서를 남겼는데, 위의 구절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습니다.

 

“아뢰야식은 항(恒, 언제나, 항상)이지만 심(審, 매사에 집요하다)은 아니다[항이비심恒而非審]. <왜냐하면 아뢰야식은> 자아에 <집요하게> 집착하지 않지만, <언제나 작용하여> 끊어짐[간단間斷] 없기 때문이다. 의식은 심이지만 항은 아니다[심이비항審而非恒]. <왜냐하면 의식은> 자아에 <집요하게> 집착하지만, <기절하거나 깊은 수면에 빠지면> 끊어지기 때문이다. 전오식은 항도 아니고 심도 아니다[비항비심非恒非審]. <왜냐하면 전오식은 단절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집요하게> 자아를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말나식만이 항도 있고 심도 있다[역항역심亦恒亦審]. <왜냐하면 말나식은 언제나 집요하게> 자아를 집착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유정[중생]의 생사는 길고 어둡다.”

 

라고 했습니다. 즉 오직 말나식만이 자기 자신을 언제나[항恒] 집요하고 세심하게[심審] 사량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중생은 밤낮으로 생사를 헤맨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나식을 오직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마음, 즉 사량식思量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구절은 감산 스님이 말나식에 대한 특징을 잘 설명한 주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철 스님께서도 ‘감산 스님은 선종과 교종에 해통한 명나라 말기의 거장巨丈이다.’고 하시면서 “감산 스님 같은 분들은 만고의 표본이 될 선지식이다. 이런 분들의 간절한 경책의 말씀을 귀감으로 삼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구의 말을 따르겠다는 것인가?”(『백일법문(중)』, p.234)라고 하여 감산 스님을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처럼 성철 스님도 자신의 깨달으신 경계를 감산 스님을 의지처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은 말나식의 또 다른 명칭인 전송식轉送識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중간에서 두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 즉 매개하는 사람은 중요합니다. 경제학적인 용어로 설명하자면 모든 일에는 물건을 생산하는 생산자와 물건을 소비하는 소비자 사이에 중개자[상인 등]가 있습니다. 그래서 생산자와 소비자도 중요하지만, 중개자인 상인의 역할이 시장경제 체제 아래에서는 아주 중요합니다. 바로 말나식이 8가지 마음[전오식, 의식, 말나식, 아뢰야식] 중에서 이런 역할을 합니다. 마음[8가지 식]사이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말나식을 유식에서는 전송식이라고 부릅니다. 

 

전송이란 이쪽에서 저쪽으로 물건을 전해주거나 사람을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말나식은 전송하는 역할을 하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말나식은 아뢰야식과 의식의 중간에 위치하여 심층으로는 아뢰야식, 표층으로는 의식에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즉 말나식은 심층[아뢰야식]과 표층[의식]으로 전송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두 마음을 연결하는 매개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중국 화엄종의 실제적인 개창자라고 할 수 있는 현수 스님은 “말나식은 위로는 제8 아뢰야식과 합하고, 아래로는 제6 의식과 합한다[상합제팔上合第八, 하합제칠下合第七].”고 하여 말나식은 두 식[아뢰야식과 의식] 사이에서 전송자의 역할을 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나식을 전송식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나식이 중간의 전송자 역할만하기 때문에, 다른 식[마음]과 달리 정확한 자기 역할이 없는 마음이라고 규정하여 필요 없는 마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앞에서 언급한 현수 스님입니다.(주3) 

 

독자 여러분!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정말 말나식은 존재하지 않는 마음일까요? 말나식은 심층의 마음[잠재심潛在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 차원에서는 잘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나식은 언제나 아주 집요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교묘하게 남을 위한 척하지만 내심에서는 은밀하게 자신을 위하거나 자신의 기쁨을 위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기절하든 깊은 수면에 빠져있어도 정말 집요하게 끊임없이 작동합니다. 그래서 감산 스님이 말나식은 ‘간단間斷’, 즉 끊어짐이 없다고 주석한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나[아我]’를 제거하고 ‘무아’의 경지에 갈 수 있을까요? 이 무아에 경지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는 최대 방해꾼이 바로 ‘나’입니다. 즉 말나식이 심층에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나식이 없다고 쉽게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나 집요하게 작동하는 말나식은 언제 어떻게 작동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다음호에서는 언제나 집요하게 자신에게 집착하는 마음인 말나식이 사라지는 ‘수행단계’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으로, 말나식에 대한 해설은 마치겠습니다. 말나식에 대한 설명이 끝나면 바로 ‘아뢰야식’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끝으로 아주 긴 미주를 달았습니다. 참고하시라고 제시한 것이니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namaste! 

 

주)

(주1) 규기(窺基, 632~682)는 유식학파, 즉 중국 법상종의 개창자이다. 그는 줄여서 기基 또는 자은사에 거주 하였기에 자은대사慈恩大師라고 불린다. 당나라 장안(長安, 지금의 서안) 출신으로 속성은 위지尉遲이고 자는 홍도洪道이다. 그의 조상은 한족이 아니라 위구르족 출신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고승전』 제4권 「당경조대자은사규기전唐京兆大慈恩寺窺基傳」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632년에 태어나 17세에 출가하여 현장의 제자가 되었다. 23세에 자은사慈恩寺로 이주하여 현장에게 범어와 불교 경론을 배웠고, 25세 이후로는 역경에 참여했다. 659년 현장이 유식 논서를 번역할 때 규기는 신방神昉, 가상 嘉尙, 보광普光 세 사람과 함께 검문檢文, 찬의纂義 등을 담당했지만, 『성유식론』의 완성에 있어서는 단지 규기만이 참여했다. 그리고 661년 현장이 유식의 중요한 논서인 『변중변론辯中邊論』, 『변중변론송 辯中邊論頌』, 『이십유식론二十唯識論』 등을 번역할 때도 대부분 규기가 받아쓰는 일을 했고, 또 그에 대한 소[술기]를 직접 지었다. 이후에도 규기는 현장 유식설의 바른 뜻을 전수하다가, 682년 11월13일 자은사에서 입적하여, 그의 스승 현장 곁에 묻혀있다. 그는 후대에 ‘백본의 소주[百本疏主]’라고 불리듯 새로 유입된 수많은 불교 경론을 번역하고 주석하는 일에 자신의 온 지성을 쏟아 부었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은 스승인 현장과 함께 인도의 여러 유식학설을 한데 모아 집대성한 『성유식론成唯識論』과 그가 직접 쓴 주석서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이다. 이 논서와 그 주석서들에서부터 중국의 새로운 유식학 즉 법상종法相宗이 시작되었기에 그를 법상종의 개창자라고 한다.”(백진순, 불교신문) 또한 논리학 주석서 『인명입정리론소因明入正理論疏』와 『성유식론』 주석서인 『성유식론장중추요成唯識論掌中樞要』 등이 있다. 특히 그는 『해심밀경』에 근거하여 삼륜전법설三輪傳法說로써 부처님의 설법을 3단계로 나누었다. 최초 법륜은 초기불교와 부파불교, 제2 법륜은 반야경전과 중관파, 제3 법륜은 유식의 가르침으로 구분하여, 유식을 부처님의 최고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은 종파불교가 꽃을 피운 중국인들의 독특한 사고방식이다. 이것을 보통은 ‘삼시교판’이라고 한다.  

 

(주2) 감산 덕청(憨山德清, 1546~1622)은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금릉金陵출신이며, 속성은 채蔡이고 이름은 덕청이며 자는 징인澄印이다. 일반적으로는 감산대사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1세에 출가하여 무극無極에게서 화엄종을 배운 화엄학자이나 오대산과 감산에서 선법을 닦아 화엄과 선의 융합을 주장하였다. 그는 주굉(袾宏, 1536~1615)·진가(眞可, 1543~1603)·지욱(智旭, 1596~1655)과 더불어 명나라시대의 사대고승四大高僧 중의 한 명이다. 특히 지욱은 그의 손 상좌이다. 지욱 대사도 『팔식규구』에 대한 주서서인 『팔식규구직해』를 남겼다. 또한 그의 나이 50세에 혜능 스님이 활동한 조계산에 유배되어, 혜능 스님의 유적지를 복원하였으며,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대부의 존경을 받았다. 한때는 여산에도 주석하였지만, 다시 조계산에 돌아와 76세로 입적한다. 감산대사는 많은 주석서를 남겼는데, 그의 대표적인 주석서로는 『화엄경』, 『법화경』, 『능엄경』, 『금강경』, 『능가경』, 『원각경』, 『대승기신론』 등이 그것이다. 또한 유교·불교·도교의 3교의 조화를 추구한 저서들도 있는데, 『중용직지中庸直指』·『노자해老子解』·『장자내편주莊子內篇註』 등이 그것이다. 특히 현장의 저작인 『팔식규구』에 대한 주석서인 『팔식규구통설』, 유식의 심소법을 설명한 세친 보살의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名門論』의 주석서인 『백법명문론논의百法名門論論議』를 지었으며, 또한 승조의 『조론』에 대한 주석서인 『조론약주』을 지어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이 중국불교의 토대임을 밝혔다. 

 

(주3) 또한 『능가경』에서도 칠식[제7 말나식]은 세우지 않고 진식[여래장식, 암말라식, 제9식], 현식[아뢰야식], 분별사식[의식, 여러 가지 일을 분별하는 식]만을 말한다.(謂真識, 現識, 分別事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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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불교학자. 유식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유식삼십송과 유식불교』·『마음공부 첫걸음』·『왕초보 반야심경 박사되다』·『범어로 반야심경을 해설하다』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마음의 비밀』·『유식불교, 유식이십론을 읽다』·『유식으로 읽는 반야심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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