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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별어]
낙양달마와 광동달마는 누가 짝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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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  2014 년 2 월 [통권 제10호]  /     /  작성일20-05-29 14:18  /   조회6,43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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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퉁가수

 

유명 대중가수 나훈아의 모창으로 20여 년 간 활동한 ‘너훈아’씨가 세상과의 인연을 정리했다는 신문기사에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렀다. 나훈아, 너훈아 두 분 모두 실물을 본 적은 없다. 모두 영상 내지는 지면으로 대했지만, 게재된 사진으로 보건대 닮기는 많이 닮았다. 모창가수들의 모임인 ‘이미테이션 가수협회’회원이 많았던 시절에는 50여 명이었으며 현재도 2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지상파와 종편방송의 ‘나는 가수다’나 ‘히든싱어’같은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의 인기와 공감을 사면서 모창가수의 긍정적인 면이 부각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그의 부고(訃告) 사실을 더욱 안타깝게 한다는 분석을 덧붙였다.

 

하지만 가수에게 있어서 짝퉁과 원조는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다. 짝퉁은 짝퉁이고 원조는 원조다. 모두 그런 줄 알고서 그 모습을 보고 또 그 노래를 듣는다. 그래서 이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하지만 ‘아바타(分身, 化身)’처럼 짝퉁과 원조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면 무엇이 원조인지 무엇이 짝퉁인지, 또 그 근거를 구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짝퉁달마

 

선종집안의 대표적 짝퉁논란 대상은 달마 대사일 것이다. 생긴 모습이 독특하여 구조적으로 짝퉁이 많을 수밖에 없는 얼굴이기도 하다. 게다가 남아 있는 기록자체가 들쭉날쭉하여 짝퉁 출현을 더욱 부채질한다. 사실과 신화의 혼재, 역사와 종교의 인위적 버무림, 스승에 대한 맹목적 존경과 사랑, 이름만 빌린 가탁(假託)된 다량의 저술들이 그 혼란을 더욱 부추겼다. 생몰연대는 선학사전에 4종류로 열거되어 있으며, 출신지역 역시 서역과 인도로 달리 기록되어 있다. 인도 내의 출신지마저도 문헌마다 차이를 보인다. 달마라는 이름자체가 다르마(범어dharma, 法)의 음역이다. 인도나 동남아 불교권에서 ‘담마(팔리어dhamma,法)’라는 법명은 우리의 김, 이, 박만큼이나 많은 이름자이다. 동명이인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리달마’라고 차별화를 시도하기는 했지만 ‘보리(bodhi, 覺)’역시 법명으로 흔한 이름이긴 매한가지다.

 

‘달마A’가 낙양의 사막에 나타나다

 

보리달마에 대한 가장 오래된 역사적 자료가 실려 있는 책은『낙양가람기』이다. 양현지(楊衒之)가 북위(北魏)의 수도인 낙양을 무대로 쓴 책으로 간행 시기는 547년이다. 도읍지를 대동(大同, 산서성)에서 낙양으로 옮겼던 493년부터 다시 업도(鄴都, 하북성)로 천도한 534년 사이의 40여 년간 기록이다.

 


 

 

서역사문 보리달마는 페르시아의 호인(胡人)으로 중화(中華)에 와서 유행하던 중, 북위의 낙양 영녕사(永寧寺)의 장려한 9층탑의 금반(金盤: 상륜부 장식)이 태양에 비치어 그 빛이 구름 위까지 비쳐지는 것과 보탁(寶鐸: 금방울)이 바람에 흔들려 울리는 소리가 중천(中天)까지 미치는 모습을 보고 경탄하였다. 스스로 150세라고 말하며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녀보았지만 이처럼 훌륭한 절은 없었다고 찬탄하며 “나무(南無)!”라고 외치며 여러 날 동안 합장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낙양달마’는 북위시대에 낙양으로 온 여러 서역승들처럼 실크로드를 따라 파미르고원을 지나 중국 땅에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른 바 육로설(陸路說)의 주인공이다.

 

‘달마B’가 광저우(廣州, 광동성) 바닷가에 나타나다

 

『낙양가람기』가 출간된 뒤 100여 년 후인 645년에『속고승전』이 완성된다. 이 책은 그 이후에도 20여 년에 걸쳐 추가되고 보충되었다. 도선(道宣, 596~667)의『속고승전(續高僧傳)』에는 달마가 송경(宋境, 송나라 국경 지방)의 남월(南越, 광동성)에 도착했으며 그 후에 북쪽으로 건너가 위(魏)나라에서 교화했다고 기록했다. 또 달마가 낙빈(洛濱)에서 입적하였고, 혜가는 그 유해를 강변에 묻었다고 하여 열반의 사실까지『혜가전(慧可傳)』에 덧붙이고 있다. 이에 의하면 ‘광동달마’는 해로설(海路說)의 주인공이 된다. 100년 사이에 달마의 입국장소가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활동공간은 낙양으로 동일하다.

 

『보림전』은 ‘광동 달마’를 원조로 만들다

 

중국대륙 서북쪽 끝의 낙양과 동남쪽 끝의 광주(廣州, 광저우)는 신의주에서부터 부산까지 거리의 다섯 배 정도 멀리 떨어진 곳이다. 걷거나 말을 타고 다니던 시절에 같은 인물이 두 군데에서 동시에 나타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축지법을 사용한다면 가능한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훗날 해로설이 대세가 되면서 육로설의 주인공인 낙양달마는 해로설의 광동달마에게 밀리는 처지가 되었다.

 

『전법보기(傳法寶記)』는 “바다를 건너 숭산에 이르렀다(航海而至嵩山)”고 하였고,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는 “바닷길로 오월에 이르렀다(泛海吳越)”고 기록했다.

 

해로설의 종결자는『보림전』이다. 권8에서 “3년의 항해를 거쳐 광주(광저우)에 상륙했다(經于三載至于廣州)”라고 하여 항해기간은 물론 도착지점까지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해로설의 손을 완전히 들어준 것이다. 이 말을 전해들은 낙양달마는 ‘내가 원조이며 광동달마가 짝퉁’이라고 오늘까지 항변하고 있을 터이다.

 

광동달마는 광저우에 유적을 남기다

 

광저우 화림정가(華林正街) 안의 작은 골목길에는 ‘달마조사서래등안처(達摩祖師西來登岸處)’라는 기념비가 서 있다. 화림사(華林寺)의 처음 이름은 서래암(西來庵)이었으며 달마 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광저우 시내 광효사(光孝寺) 경내의 세발천(洗鉢泉)은 ‘달마정(達摩井)’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광동 달마의 정통성을 유물로 증명하려는 지방정부의 노력은 참으로 가상하다 하겠다. 낙양보다 문화적 콘텐츠가 밀리는 부분을 ‘원조달마의 고장’으로 상쇄하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읽힌다.

 


중국 광효사 전경 

 

광효사에는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의 머리카락을 보관한 예발탑이 남아있다. ‘광저우가 있기 전에 이미 광효사가 있었다’고 할 만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이다. 광동어(廣東語)를 구사하던 노 행자(盧行者:훗날 혜능)가 양자강 중류의 호북성에 근거지를 둔 오조홍인을 떠나 고향인 남쪽에서 다시 삭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언어소통의 장애도 한몫 했을 것이다. 이것이 ‘남종(南宗)’이란 명칭의 바탕이 되었다. 해로설에 의한다면 달마대사가 중국에서 처음 만난 언어도 광동어인 것이다.

 

사족

 

뒷날 하택신회(荷澤神會, 670~762)는 달마가 해로를 통해 중국에 왔으며, 당시에 양무제를 만났으나 서로 코드가 맞지 않아 헤어진 후 양자강을 건너 숭산 소림사로 갔다고 광동달마의 행적을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해로설이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은 양무제의 의도하지 않았던 공덕일 것이다. 더불어 무제는 불심천자(佛心天子)답게 광동달마를 푸대접한 반성문까지『보림전』권8에 남겼다.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고(見之不見)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었으니(逢之不逢)

지금이나 그 때나(今之古之)

회한뿐이로다.(悔之恨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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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
원철 스님은 해인사, 은해사, 실상사, 법주사, 동국대 등에서 경전과 선어록을 연구하고 강의했다. 그리고 일간지와 교계지 등 여러 매체에 전문성과 대중성을 갖춘 글로써 주변과 소통해왔다. 『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절집을 물고 물고기 떠있네』등 몇 권의 산문집을 출간했다. 번역서에는『선림승보전』상·하가 있으며, 초역을 마친『보림전』의 교열 및 윤문작업 중이다. 조계종 불학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해인사승가대학 학장(강주) 소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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