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법주사 복천암 복천선원 > 성철스님의 자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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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의 자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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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법주사 복천암 복천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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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3-08 11:11 조회3,0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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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복천암 전경. 조선의 세조가 사흘간 기도하여 난치병이 완치됐다는 이야기도 전하는 유서 깊은 도량이다. 근현대에도 경허 만공 혜월 고봉(高峰) 운봉 효봉 동산 금오 청담스님 등이 다녀간 수행처로 이름이 높다.
김형주 기자
 
‘성철스님이 공양주를 했다.’ 1943년 충북 보은 법주사 복천암 복천선원에서 하안거를 할 때다. 공양주라 하면 절에서는 행자나 신참 납자가 맡는 일로 흔히들 알고 있다. 그런데 오도(悟道)를 한 도인이 공양주를 했다니 언뜻 듣기에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다. 더군다나 지금의 절 사정에 비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성철스님의 공양주 소임은 사실이다. 필자도 스님의 행적을 좇다 처음 안 일이다. 이 사실은 도우(道雨, 1922~ 2005, 법호는 보봉, 菩峯)스님이 남긴 당신의 책 <도란 무엇인가 如何是道>(2003년 도서출판 화남 刊)에서 밝혀 놓았다.
입승 월현, 경봉, 금포, 현칙, 영천스님 등 모두 8명…
평생 지속한 ‘무염식’ 기록상으로는 이곳이 처음
“…성철스님이 복천암으로 오시어 처음 상봉하였다. 성철스님은 오시자마자 생식을 하셨는데 염분 있는 것은 일체 안 드시기로 하여 부식은 없고 쌀 2홉에 들깨 약간 넣고 맷돌에 갈아서 그것을 물 한 대접에 나눠 잡수셨다. 무나 감자가 생기면 한쪽씩 들깨에 찍어서 먹으니 맛이라고는 없었다. 그해 큰 절 재무 벽산스님이 복천암 선방을 청담스님께 맡기신다고 올라와서 전하니 청담스님께서는 청암 수도암에 계시는 법춘스님을 청해다가 원주를 맡겨야 선방이 잘 될 거라면서 수도암을 갔다 오셨다.
…복천암에 올라와 결제를 하고보니 원주도 공양주도 없는 집안 꼴이 되었다. 당시 대중으로는 입승 월현 노장스님, 경봉 노장스님, 조금포스님, 현칙스님, 영천스님, 성철스님, 나 그리고 부목, 모두 8명이었다.
성철스님께서 자신은 입산하고 나서는 공양주 한번 안 해 보셨다며 생식을 하면서도 15일간을 깔끔하게 공양주 일을 잘 해 마치셨다. 그 다음에는 금포스님께서 나도 스님 되고 나서 조실(祖室) 노릇은 하여도 공양주는 해보지 못하였다 하시면서 자원하시기도 했다. 금포스님은 백용성스님의 법제자이시다. 성철스님이 공양주는 하고나서는 현칙스님이 나머지 결제기간에 공양주를 했다.…”
성철스님의 무염식에 관한 기록은 이때 처음 보인다. 기록상으로는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복천암 시절 무염식 이야기가 나오니 이때부터라고 볼 수 있으나 그 이전에 생식 기록으로 보아 무염식도 복천암 앞서의 일로 볼 수도 있다.
무염식(無鹽食)이란 글자 그대로 염분(소금기)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식사다. 스님은 식물(食物) 자체가 갖고 있는 염분 성분의 섭취만으로 식생활을 한 것이다. 스님의 무염식은 이후 평생 지속되었다. 생식을 언제 그쳤는지 알 수 없다.
도우스님은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1934년 경북 상주 남장사에서 임제응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40년 문경 김룡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하고 1942년 직지사 천불선원에서의 안거를 시작으로 서울 선학원, 문경 대승사 쌍련선원, 문경 봉암사, 창원 성주사, 합천 해인사 등 여러 선원에서 안거했다.
이 무렵 성철스님과 여러 선원에서 함께 지냈다. 특히 1947년 봉암사 결사 때는 선학원에서 열린 전국비구승대표자회의에 참석했고 1954년 봉암사 주지 때는 불교정화운동에 동참했다. 1962년 경북 선산 도리사 주지를 역임하고 청담스님을 법사로 건당했다. 부석사.고운사 주지, 조계종 감찰원장을 역임하고 1980년 이후 서울 삼각산 도선사에 주석했다. 2005년 세수 84세 법랍 71세로 입적했다.
도우스님은 “성철 큰스님은 법에 있어서는 고불고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태고(太古)스님이나 나옹(懶翁)스님 이후 성철스님만한 도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법문 하나를 보아도 완전히 불조(佛祖)에 계합한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법에 대해서는 누가 뭐라 하던 근래의 명안종사(明眼宗師, 눈 밝은 큰스님)로서는 성철스님만한 도인이 없다고 믿습니다. 제 자신 개인적으로 은혜를 입은 큰스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마음 가운데 일성종자를 심어준 성철스님께 매일 꽃 공양을 올리고 있습니다.”(<古鏡> 여름호)
법주사 복천암은 큰절 입구 수정교를 건너기 전 오른쪽으로 문장대 가는 길로 접어들어 3.24km 떨어진 곳에 있다. 신라 성덕왕19(서기 720)년에 창건했다. 본당인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중건한 건물이고 나한전은 1909년 중수했다.
   
 
복천암에 있는 ‘속리산 복천선원 복원기념비’(2004년 건립)에는 단기 4309(서기 1976)년 소옹(消翁) 선사가 극락전과 나한전을 시작으로 복원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일타스님이 쓴 ‘속리산 복천선원 사적비’에 의하면 당대 고승 경허 만공 혜월 고봉(高峰) 운봉 효봉 동산 금오 청담 성철 보문 월산 현재(玄財) 영천 서옹 관응스님 등이 다녀갔다고 한다.
‘福泉禪院(복천선원)’이란 현판은 일제 때 주지를 역임한 임환경(林幻鏡)스님의 글씨다.
복천암은 조선 세조가 기도를 올린 유서 깊은 도량이다. 경내에는 큰 바위가 있어 그 속에서 석간수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래서 이곳을 복천암이라고 한단다. 전설에 의하면 세조가 이곳에서 난치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흘간 기도드리고 병을 완치했다고 한다. 그가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목욕했다는 목욕소(沐浴沼)가 바로 복천암에 이르는 길목에 있다.
다리 한 쪽에는 ‘이 뭣고’
반대편엔 ‘시심마교’…
선승들의 수도처로 유명
복천암 입구 다리는 그 이름이 ‘이 뭣고 다리’다. 다리 한 쪽에는 ‘이 뭣고 다리’, 그 반대편에는 한자로 ‘是甚橋(시심마교)’라 새겨놓았다. ‘이 뭣고’라는 화두를 다리 이름으로 한 것으로도 복천암 선원이 예부터 선승들의 수도처로 유명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복천암 입구 ‘이 뭣고 다리’. 반대편에는 한자로 ‘是甚橋(시심마교)’라 새겨놓았다. 김형주 기자
 
복천암에서 얻은 큰 수확은 현재 이곳에 주석하고 있는 월성스님을 뵙고 그 어른의 말씀을 들은 일이다. 스님은 세수나 법랍을 묻는 데는 답을 않으셨다. “그저 여태까지 살고 있다”는 말씀이 그 대답이었다. 스님이 지금 하고 있는 큰 일이 하나 있다.
그 일은 조선시대 이곳에 머물던 신미(信眉)스님이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간여하여 큰일을 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일이었다. 월성스님의 이 대작불사를 스님 뵙기 전에 우리신문(불교신문)의 기사를 통해 알게 된 필자는 스님께 물었다.
신미스님이 훈민정음 창제에 한 역할을 알고 싶다고 하니 스님은 “시간이 얼마나 있소? 이 이야기 다 들으려면 몇 날 며칠을 해도 모자라요” 했다. 필자는 아차 싶었다. 그래서 “스님, 그 이야기는 다음에 제가 시간을 많이 내어 다시 스님을 뵙고 듣겠습니다”하고 얼른 꽁무니를 뺐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월성스님은 신미스님이 한글창제에 큰 역할을 했으며 그에 관한 온갖 자료를 준비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월성스님은 올 추석 안에 <복천사지(福泉寺誌)>를 엮어낼 계획을 일러주었다. 그 속에 모든 것을 담아내겠다고 했다. “30년 동안 이 일을 했는데도 듣는 사람은 들을 때뿐이었어. 돌아서면 그만 이었어” 스님의 그 말이 복천선원을 떠나는 필자의 뒤통수에 깊이 박혔다.  
   
 
“… 제 생각으로는 태고(太古)스님이나 나옹(懶翁)스님 이후 성철스님만한 도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법문 하나를 보아도 완전히 불조(佛祖)에 계합한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법에 대해서는 누가 뭐라 하던 근래의 명안종사(明眼宗師)로서는 성철스님만한 도인이 없다고 믿습니다.”  
- 도우스님(1922~2005)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부처님을 팔아 자꾸 죄만 짓는가
“어떤 도적놈이/나의 가사 장삼을 빌어 입고/부처님을 팔아/자꾸 죄만 짓는가”(云何賊人 假我衣服 販如來 造種種業)
누구든지 머리를 깎고 부처님 의복인 가사 장삼을 빌어 입고 승려탈을 쓰고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을 부처님께서는 모두 도적놈이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승려가 되어 가사 장삼 입고 도를 닦아 깨우쳐 중생을 제도하지는 않고 부처님을 팔아 자기의 생활도구로 먹고 사는 사람은 부처님 제자도 아니요, 승려도 아니요, 전체가 다 도적놈이라고 <능엄경>에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승려가 되어 절에서 살면서 부처님 말씀 그대로를 실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가까이는 가봐야 하고 근처에는 가봐야 할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는 못한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의 정반대 방향으로는 안 가야 할 것입니다.
나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다(人身難得 佛法難逢).”
다행히 사람 몸 받고 승려 되었으나 여기서 불법을 성취하여 중생제도는 못할지언정 도적놈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 사는 그 사람을 도적이라 한다면 그런 사람이 사는 처소는 무엇이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그 곳은 절이 아니고 ‘도적의 소굴(賊窟)’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무엇이 됩니까? 도적놈의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도적에게 팔려 있으니 도적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 절도 많고 승려도 많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도적의 딱지를 면할 수 있는 승려는 얼마나 되며 또 도적의 소굴을 면할 수 있는 절은 몇이나 되며 도적의 앞잡이를 면할 수 있는 부처님은 몇 분이나 되는지 참으로 곤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승려노릇 잘못하고 공부를 잘못해서 생함지옥(生陷地獄, 산채로 지옥에 떨어지다)할지언정 천추만고의 개벽 이래 가장 거룩하신 부처님을 도적 앞잡이를 만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도적놈 되는 것은 나의 업이라 어쩌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지옥으로 간다 할지라도 달게 받겠지만 부처님까지 도적놈 앞잡이로 만들어서는 어떻게 살겠느냐 이 말입니다.
어떻게든 우리가 노력해서 이 거룩하신 부처님을 도적의 앞잡이가 안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바른 법을 전하여 세상 사람이 모두 바로 살게 하라는 말입니다.
 - 1981년 3월1일 <주간한국> 849호 게재 글 발췌.
[불교신문 2741호/ 8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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