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불교문화재단
백일법문(百日法門) : 중도(中道)로 선(禪)과 교(敎)를 회통하다
백일법문은 1967년 성철스님이 해인총림의 초대 방장으로 취임한 후 그 해 동안거를 맞아 대중들에게 하신 법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2년 전인 1965년 김룡사에서 운달산법회를 여신 적이 있지만 해인총림 방장으로 취임하신 후 다시 정리해 한 번 더 대중들에게 사자후하신 것입니다. 팔만사천 법문으로 벌어지는 방대한 불교교설 내용을 다 말할 수 없고 최소한 알아야만 할 것만 골라 간략히 설명한다는 취지에서, 선(禪)과 교(敎)는 중도(中道)사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주제로 법문을 하셨습니다. 백일법문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중도로 선교 회통
학자들의 대체적인 의견은 한국불교의 전통은 통불교이고 선교일치라고 합니다. 선이나 교의 우월을 논하기 보다는 대체적으로 모든 불교를 아우르며 통합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원효 스님 이후 지눌 스님이나 서산 스님, 최근세 인물에까지 이런 전통은 이어진다고 봅니다. 원효 스님은 ‘화쟁’이라는 개념으로 모든 것을 회통하셨고, 지눌 스님은 교의 입장에서 선교를 회통하신 대표적인 스님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서산 스님 역시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고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라는 기본적인 생각 위에서 선교를 회통합니다. 이러한 전통은 흔히 한국불교를 말할 때 ‘사교입선’이라는 표현으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백일법문의 핵심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중도’에 있습니다. ‘중도’라는 개념으로 선과 교를 통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백일법문은 한국 불교 전통인 선교일치를 따르고 있습니다. 다만 백일법문은 선종 전통에 입각해서 교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백일법문 전체는 사실 이론과 언설로서 불교의 뜻을 밝히는 것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계신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선, 특히 간화선의 참선화두입니다.초기 경전의 강조
대체적으로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사유구조를 따르고 있습니다. 우선 천태의 5시 교판을 들 수 있습니다. 동양의 불교에서 불교의 전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전적으로 5시 교판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함에서 시작해서 천태 화엄으로 끝나고, 이에 따라 아함은 소승으로 폄하되고 천태 화엄만이 최고라는 사고방식은 지금까지도 유효합니다. 그래서 아함경을 강조하는 일부 그룹은 과격할 만큼 극단적으로 대승 이후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특히 선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위빠사나를 강조하는 쪽의 태도 역시 이런 바탕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남방불교만이 진실이라고까지 합니다. 그런데 백일법문은 아함을 소승으로 폄하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아함이 소승이 아니라 유와 무의 견해에 빠진 부파불교가 소승이라고 설명합니다. 불교의 핵심인 '중도사상'이 불교 사상 전체에 일관되게 담겨 있다는 것이 백일법문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는 백일법문의 퍽 많은 부분을 원시불교 경전을 논의하는 것으로 할애하는 데서도 나타납니다. 특히 한문 전적뿐만 아니라 팔리어 경전을 논의의 대상으로 하고 율장을 강조하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만이 중도를 설하셨다는 확실한 자신감에서 나오는 설명이라고 하겠습니다.대승비불설 논파
부처님만이 중도를 설하셨다는 점에서 중도사상을 강조하면서 아함을 중시하는 백일법문의 입장 때문에 자칫 대승불교는 불교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가 하는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백일법문은 이 점도 강력하게 부정합니다. ‘중도’를 강조하는 백일법문으로서는 당연한 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이자 독특한 진리인 ‘중도사상’을 잘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설이라고 주장합니다. 기본적으로 선의 가르침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백일법문의 입장은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데 있기 때문에 대승비불설은 사실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성철스님께서는 부처님의 근본 교설에 대승의 모든 가르침들이 녹아 있다고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다만 부파불교는 유무의 변견에 빠져 부처님의 근본 뜻을 알지 못했고 대승불교에서 이를 재발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잇고 있다고 강조합니다.방편
전체적으로 보아 백일법문은 선가의 대중법어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처음 등장하는 법회시중(法會示衆)이 법문의 핵심이고 그 나머지는 백일법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선문의 골수가 아니”며 스님께서는 “선가의 본분을 버리고 이론과 언설로서 불교의 본뜻을 말하”고 계십니다. 결국 백일법문은 방편으로 펼쳐진 법문입니다. 실질적인 백일법문의 의도는 모두 화두참구를 통해 견성하라는 데 있습니다. 이처럼 스님은 적절하게 방편을 사용하십니다. 백일법문의 방편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내용은 바로 과학을 이용하여 불교를 설명하는 점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 등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과학 이론을 이용하여 불교의 중도 사상을 설명합니다. 또 윤회를 실증하기 위하여 서양 심리학의 성과물들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백일법문의 이러한 설명 방식은 이후 많은 영향을 끼쳐 과학 지식으로 불교 이론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거의 정형화되다시피 하였습니다. .백일법문이 이루어진 때가 1967년입니다. 1940년대 봉암사결사 때 겨우 삼배의 예나 보살계 등이 시행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의 우리 불교계 현실은 말할 수 없는 형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백일법문을 하시게 된 취지가 “머리 깎은 스님이나 부처를 믿는 신도들이나 너무나 부처님 말씀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불교가 지향하는 지향점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고 있으니 불교 발전이 있을 수 있느냐”는 안타까움에서 나온 것임을 생각해보면 당시 불교계의 현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왜곡되고 소실된 불교의 전통을 부흥시키려는 의도가 백일법문에는 분명히 담겨 있습니다. 부처님 법을 바르게 알고 모두가 부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목적이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선문정로와 본지풍광
선문정로(禪門正路)와 본지풍광(本地風光) : 화두 참구와 돈오돈수(頓悟頓修)
선문정로와 본지풍광은 성철스님이 “부처님께 밥 값 했다”고까지 하신 대표 저술입니다.
이 두 책을 통해서 성철스님 사상의 핵심인 돈오돈수의 선 사상을 밝히고 계십니다. 성철스님은 철저하게 견성(見性)을 중시하여, 깨달음이란 바로 견성이며 구경각(究竟覺)임을 논증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강조된 것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면 수행도 돈오돈수였습니다.
익히 알려진 대로 큰스님의 사상의 요체는 돈오돈수입니다. 평소 스님께서는 예를 들어 남들이 서울이 어떻고 남대문이 어떻고 하는 것은 다 소용없고 자신이 직접 차를 운전하여 한강다리를 지나서 남대문을 거쳐 광화문을 직접 돌아보는 것이 돈오돈수사상으로 서울 얘기를 하는 사람이고, 괜히 서울도 와 보지 않고 비디오 테이프로 남대문 보고 국회의사당 본 것으로 서울을 봤다고 이러니 저러니 이야기하면 이것은 돈오점수라고 하셨습니다.
큰스님의 사상은 견성에 있어 점차(漸次)나 차제(次第)를 논하지 않는 것이며, 고불고조의 선종 전통 종지인 돈수사상을 육조단경에 의지하여 한결같이 일생동안 주장하시고 규봉스님과 그를 이은 보조스님의 점수론을 배격하고 선종의 종풍을 드날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님께서 초록해 둔 노트와 법문집들을 참조하여 큰스님께서 정리해 놓으신 참선의 대원칙을 한번 새겨 보겠습니다.
참선의 대원칙
참선의 대원칙(3분단)
-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공부가 아무리 잘 되는 것 같아도 꿈에 되지 않는 공부는 공부라고 말할 수 없다. 꿈에도 공부를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게 된 때 비로소 공부를 조금 하게 되는 것이다.
- 숙면일여
아무리 크게 깨쳐서 법을 다 알아도 잠들어 캄캄하면 죽어 몸을 바꾼 뒤에는 다시 캄캄하여 생사고를 도로 받게 된다. 아무리 잠이 깊이 들어도 밝음과 어둠을 뛰어 벗어난 절대적 광명이 항상 밝아있는 사람이라야 천만 번 몸을 바꾸어도 영원토록 부수어지지 않아 생사고를 받지 않고 큰 자유와 활동력이 있다. 이 절대적 광명은 천만 부처가 설명할래야 설명할 수 없으며 가르쳐 줄래야 가르쳐 줄 수 없다. 오직 공부를 하여 이곳을 깨친 사람만이 아는 것이다. 참으로 묘하고 깊은 이치이다.
- 사중득활
잠들어도 항상 밝아있는 절대적 광명을 얻기 전에는 화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전에 혹 아는 생각이 나더라도 그것은 바로 안 것이 아니니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한다.이것이 스님이 말씀하신 화두공부에서 삼분단(三分段)입니다.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 그것을 거쳐서 확철대오해야 견성이고 그것이 돈오돈수의 경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계위 | 3관 | 남아 있는 마음 | 남아 있는 번뇌 | 얻은 선정 | 얻은 지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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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지(佛地) | 무념무심 (無念無心) | 대원경지 (大圓鏡智) | ||||
사중득활(死中得活) | ||||||
묘각(妙覺) 등각(等覺) 제8지 |
숙면일여 (熟眠一如) | 오매일여 (寤寐一如) | 제8식 | 근본번뇌 3세(三細) | 멸진정 (滅盡定) | 평등성지 (平等性智) 묘관찰지 (妙觀察智) |
제7지 이하 | 몽중일여 (夢中一如) | (제7식) 제6식 | 지말번뇌 6추(六麤) | 무상정 (無想定) | 성소작지 (成所作智) | |
동정일여(動靜一如) | 제6식 전5식 |
한국불교의 법맥
한국불교의 법맥 : 조계종의 정체성
성철스님은 1947년의 봉암사결사는 물론 돈오돈수설의 주장과 한국불교의 법맥론을 통해 끊임없이 조계종의 정체성을 밝히려 하셨습니다. 지눌스님에 대한 비판 역시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계종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은 총림의 방장으로서나 종단의 종정으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구․대처 분규 끝에 1962년 3월 22일에 제정된 대한불교 조계종 종헌 제1조 “본 종은 신라 도의(道義)국사가 창수(創樹)한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보우국사의 제종포섭(諸宗包攝)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公稱)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부절(綿綿不絶)한 것이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 성철스님의 법맥론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의 주장은 “도의국사는 가지산문이고 보조국사는 사굴산문이니 법맥이 상전(相傳)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다른 법맥을 같은 법맥으로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임제종의 종풍을 이어받은 조계종의 종조는 보조국사가 아니라 태고보우국사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1]
자기를 바로 봅시다 : 대중 교화
성철스님이 대중법어와 법문을 통해서 재가불자에게 가르친 중요한 가르침은 흔히 ‘자기를 바로 봅시다’,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 ‘남 모르게 남을 도웁시다’라는 세 가지 표어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자리이타, 혹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불교 수행의 일반적인 구조로서 ‘자기 견성’, ‘공덕의 회향’, ‘이타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님은 재가자의 수행 역시 출가자와 차이 없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며 그러한 깨달음은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회향으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을 향한 신심
신도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마음은 부처님에 대한 철저한 신심입니다. 사실 스님께서 신도들에게 일러주시는 3,000배나 기도 방법은 모두 신심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25 시절의 한 일화를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전장에 나가 소식이 없던 아들 때문에 한 보살이 찾아왔습니다. 그 보살은 제발 스님께서 내 아들 좀 살려달라고 하면서 방바닥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합니다. 주머니에서 돈 이십만원을 꺼내 놓고는, ‘논밭을 전부 팔아 모은 돈입니다. 이 돈으로 기도를 해서 내 아들 좀 살려 주십시오’ 하고는 울며불며 사정을 하였습니다. 그래 당신 아들이 이십만원짜리냐고 묻고는, 그 보살이 너무 딱해 보이길래, 내가 시키는 대로 어떤 일이든지 하겠냐고 물으니 자기 아들만 살아온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합니다. 그럼 이 돈을 가지고 끼니가 없어 굶주리는 저 산밑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돈을 고루 나누어주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정성껏 쌀 몇 되를 사서 아홉 번 찧고 손질하여 절대로 땅바닥에 놓지 말고 가져와서 부처님께 올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보살에게 가져온 쌀을 탁자 위에 올려 놓고 법당과 절 마당을 깨끗이 청소한 후 목욕하고 그 쌀로 공양을 지어 부처님께 올리고 절을 삼천배 하라고 했습니다. 어찌어찌 삼천 배를 마친 보살이 집에 돌아가자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기도란 신도가 부처님 앞에 온 몸을 던질 수 있을 만큼 신심이 필요한 것이므로 스님께서는 스스로를 위한 축원을 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부처님을 향한 신심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백련암에서 축원을 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2]
남 모르게 남을 도웁시다
남을 10원어치 도와주고 선전은 100원어치 해서는 안 된다고 늘 당부하셨습니다. 백련암 신도들에게도 항상 자랑하지 말고 남모르게 남을 도와주라고 간곡하게 다음과 같이 법문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중생을 도와주는 것이 참으로 불공이라고 하셨습니다. 몸과 정신으로 또 물질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것이 모두 불공입니다. 우리들이 몸과 마음과 물질, 이 세 가지로 불공을 하려고 하면 불공할 것이 세상에 꽉 차 있습니다. 단지 우리의 마음이 열리지 못하고 게을러서, 게으른 병 때문에 못할 뿐입니다. 이렇게 불공하여야만 반드시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고 나서 자랑하면 자신의 불공을 모두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모르게 남을 도와주자는 이것뿐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동체대비의 사상 없이는 큰스님의 남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인간성 회복문제에 있어서도 남을 위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남을 위해 기도하는 불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스님의 법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교의 자비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불교는 자비가 근본임으로 남을 돕는 것이 근본입니다.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처님의 제자들은 모든 생활의 기준을 남을 돕는 데 두어야 합니다. 부처님 앞에 절을 할 때 아무 생각 없이 절하거나 나 잘되도록 절하지 말고 남을 위해 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이 더 깊은 사람이면 남을 위해 아침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백련암에 다니는 신도들에게는 의무적으로 절을 시킵니다. 108참회문을 읽으며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날마다 아침에 108배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발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하옴은 제 스스로 복 얻거나 천상에 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요, 모든 중생이 함께 진리를 깨닫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회법으로 일체중생을 위하여, 일체중생을 대신해서 모든 죄를 참회하고 일체중생을 위해 기도합시다. 이것이 참으로 불교를 믿는 사람의 근본자세이며 사명이며 본분입니다. 인과법칙은 불교뿐만 아니라 우주의 근본 원리입니다. 착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오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