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암에서 성철스님(앞줄 가운데)을 모셨던 당시 스님들 모습. 뒷줄 왼쪽부터 원공.도선.천제(부산 해월정사 회주).도성(부산 태종사 회주).동진.법전(전 종정).원조스님. 사진제공=성철선사상연구원 |
해인총림의 설립은 스님이 한국불교의 중흥을 서원하고 ‘봉암사 결사’를 한지 20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임시종회를 해인사에서 열고 총림특별법을 제정했다. 그에 근거하여 해인총림이 설립되고 초대 방장에 스님이 추대됐다.
가야산 해인사에 총림이 설치될 무렵 문경 희양산 봉암사가 총림도량으로 손꼽혔지만 그보다 해인사가 최상의 조건을 갖춘 도량으로 판단되어 한국 제일의 종합수도원인 ‘해인총림’이 설립된 것이다.
해인총림을 설립하고 성철스님을 초대 방장으로 추대한 데는 청담스님.자운스님의 도움이 컸다고 천제스님은 회상한다. 청담.자운 두 스님은 성철스님과 함께 봉암사 결사를 주도한 분이다. 어느 스님보다 성철스님의 불교중흥 의지에 공감하고 그 실현을 원했던 만큼 해인사를 성철스님의 구상대로 종합수도원으로 만드는데 적극 동참, 지원한 것이다.
봉암사결사 20년만에 성사, 주지 지월스님과 삼직 비롯
율원-일타, 강원-지관스님 등 총림 발전에 큰 역할
총림은 종합수도원이다. 강원.율원.선원으로 계.정.혜 삼학을 두루 수행하는 도량이다.
성철스님은 중국 당나라 때 선종(禪宗)의 종지(宗旨)가 천하를 풍미할 당시 수행의 기치를 드높인 총림의 가풍(家風)을 이 땅에 재현코자 했다. 해인총림의 청규도 이를 본받았다. 직책 이름도 도사(都寺) 부사(副寺) 고두(庫頭) 등 중국 총림식이었다. 지금의 직책으로 보면 주지.총무.재무에 해당된다.
초대 주지에는 지월(指月)스님이 추대됐고 부사에는 도성(道成, 태종대 태종사 회주)스님, 고두에는 현경(玄鏡, 입적, 전 해인사 주지)스님이, 율원장으로는 일타(日陀)스님, 강주로는 지관(智冠)스님이 동참했다.
지금은 열반했지만 이 세 분 스님은 초기 해인총림의 터전을 다지는데 큰 기여를 했다. 현 조계총림 방장 보성(菩成)스님과 동진(東鎭)스님, 도견(道堅)스님도 총림 발전에 큰 힘을 썼다.
성철스님이 방장으로 있으면서 중국 총림을 본보기로 하자 당시 법정(法頂)스님은 비판적인 칼럼을 불교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그때 법정스님도 해인사에 머물고 있었다.
선방, 하루15시간 ‘가행정진’ 첫 동안거부터 수행열기 가득
“중도 알면 불교 바로 안다 구경각이 견성성불
그 첩경은 참선수행…” 법문마다 참선수행 강조
총림이 결성된 이후 첫 동안거. 전국에서 수좌들이 해인총림으로 몰려들었다. 강원은 물론 선방에도 수행 열기는 뜨거웠다. 선방 스님들 중에는 하루 15시간 정진하는 ‘가행정진’을 하는 스님들이, 퇴설당에서 겨울 한 철 치열하게 구도열을 불태웠다.
해제를 7일 앞둔 날부터는 전 대중이 용맹정진에 몰입했다. 성철스님의 가열찬 경책이 아니더라도 그해 동안거의 구도 정진력은 가히 위법망구(爲法忘軀, 구도를 위해 내 몸을 다 바친다) 그대로였다. 그 동안거 때 스님의 ‘백일법문’이 펼쳐졌다.
동안거 백일동안 아침 공양 후 2시간여에 걸쳐 스님의 사자후가 산중에 메아리쳤다. 스님은 이 법문에서 불교의 핵심이론과 선종의 역대 조사들의 어록을 ‘중도’라는 큰 바탕과 기둥으로 일목요연하게 꿰어서 사자후를 토했다.
불교의 본질, 중도사상.원시불교사상.중관사상, 유식사상, <열반경> 등의 여러 경전 사상, 천태종.화엄종.선종사상 등 자신이 수행하고 증득한 불교사상을 모두 펼쳐보였다. 돈오돈수(頓悟頓修)사상도 이때 토해내었다.
지월스님과 성철스님. |
성철스님은 법문시간마다 참선수행을 강조하고 대중을 경책했다. 해박하고 깊은 이론에 자신의 증득을 더하여 일러주는 한마디 한마디의 법문은 온 대중을 정진 열기로 가득 차게 했다. 당시 법문의 녹음은 원공스님이 했다. 그 녹음한 내용을 풀어서 원택스님이 펴낸 책이 <백일법문> 상.하 2권(장경각 간행)이다.
1967년 4월초, 스님이 백련암에 주석하면서 총림설립, 방장취임이 있기 전이다. 스님은 상좌 3인을 한날에 받아들였다. 그리고 불명도 원(圓)자를 부쳐주었다. 원조(圓照) 원공(圓空) 원기(圓機)가 그들이다. 스님 상좌는 이때부터 ‘원’자 돌림자 이름을 갖고 있다.
원조는 속명 박성배(朴性焙), 당시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였다. 원공 김금태(金金泰)는 경희대 법대 출신이었고 원기 이진두(李鎭斗)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스님이 한 번에 상좌 3인을 들이고 이름도 ‘원’ 자를 준데다 셋 모두가 대졸출신이라는 데서 나온 이야기가 있다.
불교핵심이론과 조사어록 ‘중도’라는 큰 줄기로 엮어
아침공양 후 2시간 사자후 ‘돈오돈수’도 이때 토해내
그 당시 녹음내용 풀어 원택스님 펴낸 책이 ‘백일법문’
광덕(光德, 1927~2002)스님이 사형인 성철스님에게 말했다. “스님, 스님도 이제 변하셨습니다. 10년도 더 넘게 상좌를 안들이시더니 한꺼번에 세 사람을 들이시다니요. 그것도 모두 대졸출신으로. 게다가 이름을 모두 원자로 주셨다면서요.”
성철스님의 대답이 명쾌하고 재밌었다고 한다. “그래, 와. 느그가(너희들이) 모두 나보고 모나고 별나다고 해서 둥글 원자를 주었다. 와?” 그러고서 두 분은 웃었다고 한다.
광덕스님은 동산스님의 상좌로 성철스님과는 사형사제간이다. 해인총림 설립 때나 성철스님이 덕산 거사와 대학설립 계획을 세울 때 치밀한 구상과 기획력으로 사형인 성철스님을 크게 도운 분이다.
그렇게 한날 출가한 원조.원공.원기는 몇 년 못가 스승 곁을 떠났다. 원조가 환속할 때 스승 성철스님은 전 대중 앞에서 환계식(還戒式)을 열었다. 환계식은 계를 잘 지키다 환속하는 스님에게 하는 의식이다.
원공.원기의 환계식은 없었다. 그러나 이들 원자 초기의 세 사람은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 부처님을 잊지 만 말고 살아라”는 스승의 말씀을 깊이 새겨 잊지 않고 있다.
현 백련암의 좌선실. 김형주 기자 |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중생을 위해 아비지옥으로 들어가네
쉬어버리고 쉬어버리리니
절름발이 자라요 눈 먼 거북이로다.
있느냐 있느냐 문수와 보현이로다.
허공이 무너져 떨어지고
대지가 묻혀버리네.
높고 높은 산봉우리에 앉으니
머리엔 재 쓰고 얼굴엔 진흙 발랐네.
시끄러운 거리에서 못을 끊고 쇠를 끊으니
날라리 리랄라여
들늙은이 취해 방초 속에서 춤추네.
방편으로 때 묻은 옷을 걸어 놓고 부처라 하나
도리어 보배로 단장하면 다시 누구라 할꼬.
여기서 금강정안을 잃어버리면
팔만대장경은 고름 닦은 휴지로다.
마명과 용수는 어느 곳을 향하여 입을 열리오.
(한참 침묵한 후)
갑.을.병.정.무로다.
억!
홀로 높고 높아 비교할 수 없는 사자왕이
스스로 쇠사슬에 묶여 깊은 함정에 들어가네.
한번 소리치니 천지가 진동하나
도리어 저 여우가 서로 침을 뱉고 웃는구나.
애닯고 애닯고 애달프다.
황금 궁궐과 칠보의 자리 버리고
중생을 위해 아비지옥으로 들어가네.
- 백일법문을 시작하면서 읊은 게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