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절’ 성주사 대웅전. 김형주 기자
“부처님께서는 오직 중생을 도와주는 것이 참으로 불공이요, 이를 행해야만 참으로 내 제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공은 반드시 돈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정신으로 또 물질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것이 모두 불공입니다.
우리가 몸.마음.물질 이 세 가지로 불공을 하려고 하면 불공할 것이 세상에 꽉 차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게을러서, 게으른 병 때문에 못 할 뿐입니다. 이렇게 불공해야만 마침내 성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공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은 착한 일이지만 자랑하는 그것은 나쁜 일입니다. 애써 불공해서 남을 도와주고 나서 자랑하면 모두 자신의 불공을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불공을 자랑과 자기선전을 하기 위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공이 아닙니다. 자기 자랑할 재료를 만드는 것입니다. 입으로 부수어 버리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러므로 ‘남모르게 도와주라’ 이것뿐입니다.”
성철스님은 1951년 경남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 드신 이후 1954년까지 거기 머물렀다. 이때 중간에 경남 창원 성주사에서 동안거 한 철(1952년)을 지냈다. 그때 스님이 불공에 대한 가르침을 전한 일화가 지금도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큰 경책이 되고 있다.
성주사의 유래를 담아 조성한 수곽의 곰 석상(石像). 김형주 기자
“6.25한국전쟁 이후 마산 근방 성주사라는 절에서 서너 달 머무를 때입니다. 처음 가서 보니 법당 위에 큰 간판이 붙었는데 ‘법당 중창 시주 윤OO’라고 굉장히 크게 쓰여 있었습니다. 누구냐고 물으니 마산에서 한약국을 경영하는 사람인데 신심이 있어 법당을 모두 중수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언제 여기 오느냐’고 물으니 ‘스님이 오신 줄 알면 내일이라도 달려 올 겁니다’ 했어요.
그 이튿날 과연 그분이 인사하러 왔다기에 만났지요. ‘소문 들으니 당신이 퍽 신심이 깊다고 모두 칭찬하던데…. 나도 처음 오자마자 법당 위를 보니 그 간판이 있어서 당신 신심 있는 것은 증명되었지.’ 처음에는 칭찬을 많이 하니 퍽 좋아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런데 간판 붙이는 위치가 잘못된 것 같아. 간판이란 남들이 많이 보기 위한 것인데 이 산중에 붙여 둬 봐야 몇 사람이나 와서 보겠어?
그러니 저걸 떼어서 마산역 광장에 갖다 세우자고. 내일이라도 당장 옮겨보자고’ 그랬지. 그러니까 그 사람이 ‘아이구 스님, 정말 부끄럽습니다’라고 했어. ‘부끄러운 줄 알겠소? 당신이 참으로 신심에서 돈 낸 것인가? 저 간판 얻으려 돈 낸 것이지’ ‘잘못되었습니다. 제가 몰라서 그랬습니다’ ‘몰라서 그랬다고? 몰라서 그런 것이야 허물이 있나. 고치면 되지. 그러면 이왕 잘못된 것을 어찌 하려는가?’ 그랬더니 제 손으로 그 간판을 떼어 내려서 탕 탕 부수어 부엌 아궁이에 넣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107쪽)
몸과 정신으로, 물질로
남을 돕는 것이 모두 불공
몸 마음 물질…이 세 가지로
불공을 하려고 하면
불공할 것이 세상에 꽉 차
불모산(佛母山) 성주사(聖住寺)는 경남 창원시 성주동에 있다. 창원시는 2010년 7월부터 마산ㆍ진해와 통합하여 거대한 행정구역을 이루었다. 서울시보다 넒은 면적으로 경남 서부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이곳에 자리 잡은 성주사는 지역사회의 중심사찰로써 그 위상에 걸맞은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이 일곱 아들을 입산, 출가시켰다는 전설이 담겨있는 불모산, 그 서북쪽 기슭 조용한 곳에 자리한 절이 성주사다. 일곱 아들이 성도하여 불법을 펼쳤으니 ‘부처님의 어머니 산’이라 하여 불모산이라 하고 성인이 머무는 절이라 하여 성주사(聖住寺)라고 한다.
성주사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가야시대 장유화상(長有和尙) 창건설이다.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함께 온 사촌오빠 장유화상이 머물도록 창건한 절이라는 설이다. 이는 우리 불교의 남방전래설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신라 흥덕왕 2년(서기827년) 무염(無染)스님이 창건했다는 설이다.
성주사는 1592년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탔는데 1604(선조37)년 진경대사(眞鏡大師)가 중건하고 1682(숙종8)년 중수를 거친 뒤 1871(순조17)년 범어사에 있던 등암(藤巖) 찬훈(璨勛, 1859~1942)스님이 주지를 맡으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성주사는 ‘곰절’이라고도 불린다. 사람들은 ‘성주사’보다는 곰절이라 부르는데 더 친근감을 갖는다.
인홍·묘엄스님 비롯하여
월정사 지장암, 윤필암서
정진하던 비구니스님들
6·25전란을 피해 ‘결사’
‘성주사 가자’하면 택시기사들도 ‘성주사역’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 성주사가 곰절이라 불리게 된 연유는 13세기를 전후해서 웅신사(熊神寺)라는 이름으로 불린데 있다. 성주사 사적문(史蹟文)에 “세간에서 말하기를 ‘진경대사의 교화가 광대하여 곰들이 그 법유(法乳)를 길러줌에 감동하여 절의 중창을 도왔다’고 했다.
중간에 절 이름을 고쳐 웅신(熊神)이라 하니 진실로 이런 까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에 따른 설화가 있다. 진경대사가 임진왜란 후 절을 중건할 때 본래 절터는 지금 위치에서 약 400여 미터 북쪽에 있었으나 하룻밤 사이에 곰들이 전 목재를 현재 자리로 옮겨놓았다. 진경대사는 이를 부처님의 뜻으로 알고 곰이 옮긴 자리에 절을 세웠다고 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불모산에 살던 곰이 배가 고파 절까지 내려왔다. 스님들이 좌선에 들어있음을 보고 배고픔도 잊고 그 흉내를 내곤 했다. 그 공덕으로 후생에 사람으로 태어나 성주사 부목(負木)이 되었다. 공양간에서 밥솥에 불을 때다가 자기도 모르게 삼매에 들어 밥이 타는 줄도 몰랐다. 주지 스님이 이를 보고 지팡이로 머리를 치며 깨우는 순간 깨닫는 바가 있었다. 전생에 자기는 곰이었다가 스님 흉내를 내다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알았다. 그 후 그는 용맹정진하여 큰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대한불교진흥원 刊 <한국의 명사찰 성주사>에서 인용)
성철스님이 천제굴에서 성주사로 와서 한 철을 지나게 된 연유를 추정해본다. 당시 성주사에는 ‘비구니 결사’가 진행 중이었다. 1951년 8월 인홍(仁弘)ㆍ묘엄(妙嚴)스님을 비롯하여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지장암, 경북 사불산 대승사 윤필암에서 수행정진하던 스님들이 6ㆍ25전란을 피해 여기 와서 결사했다.
돌에 새겨진 ‘불모산 성주사’ 이정표.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진짜 큰 도둑은 스스로
성인인 체하는 자들이다
나는 도둑놈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보통은 돈이나 물건을 뺏거나 훔치는 것을 도둑이라고 붙잡아다 가둡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남의 나라를 뺏으면 큰 도둑놈이라 할 수 있는데도 이런 사람을 보고는 영웅이라 하거든요. 알고 보면 영웅이 더 큰 도둑인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좀도둑은 도둑이라 하고 큰 도둑은 영웅이라 하니 이런 것부터 바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사실 진짜 큰 도둑은 스스로 성인(聖人)인 체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칭 성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들이 천하를 다 아는 것처럼 지껄이는데 사실 알고 보면 자신도 모르면서 남을 속이는 거지요.
사이비 교주, 깨치지 못했으면서 도인인 체하는 수도자들, 앞으로 도둑놈을 심판하려면 이런 자들부터 심판해야 됩니다. - 1983년 5월 동아일보 대담 중 일부
[불교신문 2782호/ 1월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