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사 전경. 사성제 팔정도 등 숫자의 의미를 담아 조성한 계단이 이색적이다. 김형주기자
“인홍(仁弘)스님께서 절을 맡았다는 소문이 나자 모두 모였다. 그것은 스님의 덕을 나타내는 일이었다. 그때 혜춘(慧春)스님도 출가하러 왔다. 나는 채공을 맡았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개울가에 나가보면, 어느새 대중들이 나와 앉아 좌선을 하고 있었다. 도량 전체가 참선공부를 하는 분위기였다.” 1951년 창원 성주사에서 가진 비구니 스님들의 결사에 참여한 묘엄(妙嚴)스님의 회고다.
‘성주사 결사’는 인홍스님이 주도하고 한국전쟁 중 각처에 흩어져 있던 비구니스님들이 전란을 피해 전란 중에도 수도처로 비교적 안정된 사찰인 경남 창원의 성주사에 모여 이룬 결사다. 이들은 ‘봉암사 결사’ 정신과 공주규약을 실천하며 살았다.
성철스님 법문 듣고 출가한
혜춘스님 비롯한 비구니스님들
봉암사 ‘공주규약’ 그대로 실천
전쟁의 와중에도 뜨거운 구도열을 드러내 수행하는 스님들의 모습은 신도들에게 환희심을 갖게 했고 나아가 출가하기에 이른 신도도 늘어났다. 그들 가운데 나중 한국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긴 비구니 혜춘스님(1919~1998)도 있었다.
혜춘스님은 천제굴에 머물고 있는 성철스님을 찾아뵙고 법문을 듣고는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당시 그는 결혼하여 자녀를 두고 있는 몸이었다. 그런데도 출가의 결단을 내린 데는 성철스님의 영향이 컸다.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난 스님은 부친이 판사이고 시아버지가 도지사였다.
8.15광복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인생의 근본목적과 삶의 무상을 깊게 느낀 그가 불법에 귀의처를 찾게 되어 출가의 길에 들어서기를 작심하고 성철스님을 찾았으나 스님은 그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인홍스님은 어느 날 성철스님의 전갈을 받았다. ‘사람 하나 보내니 도량엔 받아들이되 선방엔 들이지 마시오’ 성주사에 있던 혜춘스님을 지도하는 성철스님의 말씀에 인홍스님은 그대로 따랐다. 혜춘스님은 삭발하지 못한 채 법당 추녀 밑에 거적을 깔고 앉아 화두를 들었다. 대중들이 법당에서 예불을 드릴 때도 들어갈 수 없었고 선방에서 입선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법당과 선방은 추녀 밑 볕이 들지 않는 음습한 거적 위였다. 그런데도 그녀의 출가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부엌에 앉아 꽁보리밥에 소금에 절인 김치조각 하나로 끼니를 때웠다. … 그렇게 혹독하게 두어 달을 보내고 나자 성철스님은 혜춘스님의 출가를 허락했고 비로소 해인사 약수암에서 창호(彰浩)스님을 은사로 삭발했던 것이다.”(박원자 지음 ‘길 찾아 길 떠나다’에서 인용)
혜춘스님
천제굴에서 성철스님을 처음 만나 스님의 지도아래 출가한 혜춘스님은 스님을 평생 스승으로 삼고 수행했다.
“성철스님의 말씀을 곧 법으로 알고 참으로 법답게 스승을 존경하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수행을 보였다.”(혜춘스님 상좌 선주스님의 글 ‘심신의 피로를 모르는 사자분신’에서 인용)
혜춘스님은 전국비구니회 회장(1985~10년간) 사회복지법인 목동청소년회관 관장(1988~1989)을 역임하고 국민훈장 모란장(1988)을 받았다. 1991년에는 세계여성불교도국제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혜춘스님 제자들은 그를 기리는 책을 곧 펴낸다고 한다. 그 책에서 우리는 다시금 혜춘스님의 일생과 한국불교계에 그가 남긴 큰 업적을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중앙승가대 교수 본각(本覺)스님은 성주사 결사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봉암사 결사 정신을 그대로 비구니 승단으로 옮겨와서 부처님 당시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비구니 승가의 출가정신을 회복시킨 분이 바로 인홍 선사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비구니들은 어떠한 삶이 참다운 비구니 승가의 모습이며 나아갈 방향인가를 정확히 알고 있지 못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일 사찰에 부과된 노동을 하면서 일용의 잡사를 처리하는 고달픈 삶을 살고 있었다. 몇몇 비구니 선지식이 있었으나 비구니 전체를 추슬러서 출가정신을 고취시키고 수행만이 승가의 참모습이라는 것을 펼쳐 보일 겨를이 없었다.
철스님이 주석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 축대만 남아있다.
인홍선사는 성철 대종사로부터 모든 것을 배우고 또한 스스로 깨달아서 비구니의 위상을 세우는 것으로 일생의 과업을 세우신 분이다. 성주사 결사는 비구니가 출가승단의 한 축으로서 출가자임을 천명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비구니 스스로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했던 시기에 실시되었던 중요한 대중결사였다.”(‘길 찾아 길 떠나다’에서 인용)
성주사 결사에 참여한 대중들은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 있는 성철스님에게 가서 법문을 들었다. 당시 스님은 해제 때면 스님과 신도의 천제굴 출입을 허락하고 있었다.
해제전날이면 성주사 대중만이 아니라 신도들도 천제굴에 갔다. 천제굴에 가면 밤새 정진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 법문을 듣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었다. 어쩌다 먼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피곤해서 잠이라도 들 때엔 쫓겨나는 것이 상례였다고 하다.
‘성주사 결사는 비구니가
출가승단의 한축임을 천명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인식전환이 필요했던 시기에
진행된 중요한 대중결사
성철스님은 대중에게 ‘일러라’하고 주장자로 법상을 치며 사자후(獅子吼)를 했고 묵묵부답(不答)으로 있는 대중들에게는 주장자로 세게 내리치기도 했다. 당시 스님을 시봉하고 있던 법전스님(현 조계종 종정)은 스승이 내리치는 매를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맞았다고 한다.
어깨며 등에 사정없이 내려치는 매를 그대로 맞고 있는 법전스님의 모습에서 성주사 대중과 신도들은 성철스님의 후학지도와 ‘스승과 제자’는 어떠해야 하나를 깊이 일깨우게 되었다고 한다.
‘성주사 결사’는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며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결사도 겨우 1년 남짓 지나고는 멈추었다. 당시 각 절마다 대처승과의 갈등이 잦은 때였고 성주사도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성주사 결사의 정신적 지주인 성철스님은 1952년 동안거를 성주사에서 보냈다. 이때는 성주사 주지로 문일조스님이 있었고 성주사 결사를 이끌었던 인홍스님은 그해 양산 천성산 조계암으로 거처를 옮겨 하안거를 하고 있었다.
나란히 앉아 사람들을 반기는 돼지 석상.
성철스님은 천제굴을 잠시 떠나 성주사에서 동안거 한 철을 지내고는 다시 천제굴로 돌아왔다. 이 동안거 한 철을 지나게 된 데는 법전스님의 회고담이 주목을 끈다.
“철석같이 믿고 중요한 시절을 함께 한 스승의 말씀이라 해도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면 그 뜻을 분명히 말씀드렸다. 그런 내 성격 때문에 처음에는 노장이 ‘니가 내 말을 반대하노’ 하시며 화를 내다가도 ‘말을 듣고 보니 니 말이 옳다’며 내 뜻을 받아들여 주셨다.
노장이 천제굴을 잠시 떠나 마산 성주사에서 총림을 결성하려 했을 때, 천제굴을 지키던 내가 뒤에 가서 상황을 보고는 마음이 내키지 않아 며칠 만에 돌아와 버린 게 그 한 예다.”(법전스님 자서전 ‘누구없는가’ 91쪽)
법전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성철스님은 ‘성주사 총림’을 구상한 듯하다. 그러나 다시 천제굴로 돌아온 데는 당시의 상황이 여의치 않은 걸로 보인다.
성철스님은 천제굴에 있으면서도 ‘성주사 비구니 결사’를 지도했고 성주사에 가서 한 ‘성주사 총림’ 뜻은 접은 걸로 성주사와의 인연을 끝냈다.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자
어찌 몽환(夢幻) 속에 피는 공화(空華)를 혼자서 잡으려 애를 씁니까. 더불어 재미있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높이 떠올랐던 화살도 기운이 다하면 땅에 떨어지고 피었던 잎도 떨어지며 뿌리로 돌아갑니다. 만물은 원래부터 한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시비선악(是非善惡)도 본래 하나에서 시작된 것이어서 이를 가른다는 것은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기둥을 끌려고 바닷물을 다 마시려는 것과 같습니다.
사바세계에 사는 모든 사람들도 원래가 하나요,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비선악의 분별심이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나로 보고 내가 이웃이 되고 열이 하나가 되고 백도 하나가되는 융화(融化)의 중도(中道)를 바로보고 분별의 고집을 버립시다.
모두가 분별심을 버리고 더불어 하나가 되어 삼대(麻)처럼 많이 누워있는 병든 사람을 일으키고 본래 청정한 사바세계를 이룹시다.
- 1993년 부처님오신날 법어 중에서

[불교신문 2786호/ 1월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