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정사(海月精舍)는 부산 해운대 근처 청사포(靑砂浦) 입구에 자리 잡은 절이다. 성철스님은 평생을 산에 살면서 산을 떠나지 않았다. 도회지 바닷가에서 스님의 법음과 법향을 느낄 수 있고 그 가르침을 일러주는 곳이 바로 해월정사다. 해월정사는 스님 생존시 건립됐다. 1977년 2월 창건된 이 절은 스님이 부산에 오면 머물던 절이다. 스님은 해인사에 주석하면서도 한 겨울 매서운 추위가 몰아칠 때는 가끔 따뜻한 이곳에서 추위를 피하기도 했다.

부산 청사포 해월정사 전경. 김형주 기자
동해남부선 해운대역에서 송정역으로 가는 기찻길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보기 드물게 풍광이 아름답다. 바다와 산 중간을 가로지르는 철길은 오른쪽으로 넓게 펼쳐진 바다와 왼편 숲이 우거진 산을 바라보며 달린다.
해운대역과 송정역 한가운데 쯤에 청사포라 이름하는 아늑한 포구가 있다. 그 포구를 품에 안은 듯 해월정사는 안온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해월정사는 와우산(臥牛山) 자락에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도회지 사찰로서는 드문 배산임해(背山臨海, 뒤는 산이요 앞은 바다) 형(形)이다.
‘시골노인 거처’ 정도로 여겨졌던 ‘고심당’ 비롯
생존시 당우 증축 불허 ‘봉훈관’ 2008년 완공
산을 떠나지 않은 스님이지만 평소 바다를 좋아했던 스님은 이곳에 머물면서 절 이름을 해월정사라 했다. 넓은 바다와 밝은 달빛(月光)이 부처님 지혜를 뜻하는 것이라며 그렇게 지었다. 스님은 해월정사에서 종단의 여러 일을 중진 스님들과 의논하고 지시하기도 했다.
해월정사는 또한 스님의 건강을 돌보는 장소로서도 큰 역할을 한 곳이다. 스님이 주석하던 당우는 지금 고심당(古心堂)이라는 현판이 있는 단층 건물이다. 스님은 이곳에 머물 때는 외부 인사들을 일체 접하지 않았으며 특히 매스컴에는 자신이 여기 있다는 말조차 나가지 않도록 아랫사람에게 엄하게 일러 놓았다. 그저 시골노인이 한가하게 거처하는 곳으로 여겨지게 했다.
백련불교문화재단이 설립(1987년 10월말 인가)될 무렵 정부의 주무부서인 문화관광부 종무관으로 근무하던 이용부(李勇夫) 씨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회상한다.
성철스님 유물이 전시된 시월전. 김형주 기자
“설립 인가증이 나왔다는 소식을 전화로 알렸더니 스님은 ‘그래, 빨리 보자. 니가 갖고 온나’ 그러셨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출장을 와서 스님을 뵈러 방에 들어갔지. 헌데 스님께서는 정장 차림이 아니셨어. 윗도리도 벗고 앉아 계셨지.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 스님께서 차림새가 저러하신데 큰 절을 올려야 하나?
잠시 멈칫하다가 그래도 절을 해야지. 큰스님께 절을 올린다는 것이 어디 당신의 겉모양새 보고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라는 마음이 들었지. 그래서 절을 하니까 스님은 ‘절 그만하고 얼른 그 서류부터 보자’ 그러셨어. 서류를 훑어보신 스님은 ‘니 밥 묵었나. 저기 가 봐라. 누가 있을 거다. 어서 밥 묵어라’ 그러셨어.”
해월정사에서 스님은 이렇듯 편하게 지냈다. 그런 시골노인 모습이니 누가 그를 해인사 방장이요, 종정이신 성철스님으로 알아보았겠는가.
‘중노릇’과 ‘受施如箭(수시여전)’ 친필 메모.
해월정사는 스님이 주석할 때의 모습과는 다르게 지금은 큰 절이 되었다. 스님은 당우의 증축을 허락하지 않았다. 신도들에게 부담을 끼쳐서 안된다는 말씀이었다. 스님이 열반에 든 이후 맏상좌 천제스님이 당우의 증.개축을 하기 시작했다.
집이 그동안 낡고 허술해진 곳도 많은데다 스님을 기리는 절로서 사격(寺格)을 갖추기에도 부족함이 있어서였다. 2004년 불사를 시작(성철스님은 1993년 입적)했다. 스님이 머물던 곳이라 불사 명칭을 스님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에서 ‘봉훈관(奉訓館) 건립 불사’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봉훈관 건립은 지난 2008년 완공했다.
지금의 해월정사는 일주문을 지나면 작은 연못이 있는 너른 마당이 있다. 마당 오른쪽에는 스님이 머물던 고심당이 있고 고심당에 한 층을 더해 와우산방(臥牛山房)을 앉혔다. 마당 정면은 해월전(海月殿, 1층) 적광전(寂光殿, 2층), 마당 왼쪽엔 종무소(1층)와 관음전(2층)이 있다.
공주규약 초안과 본문 참선할 때 마음가짐
일력 뒷면에 쓴 메모 경전 서책 등으로 꽉 차
이제는 유훈 널리 알리는 도량으로 거듭나게 될 것
적광전 뒤편 마당에 서면 봉훈관 4층 당우가 우뚝하게 보인다. 봉훈관 1층은 강의실과 끽다실, 2층은 선실, 3층은 성철스님 유물관으로 시월전(示月殿)이라 이름했다. 4층은 큰법당 비로전이다. 시월전은 봉훈관에서도 큰법당 다음으로 중요한 공간이다.
봉훈의 의미에 걸맞게 스님의 친필 120여점이 모셔져 있다. 스님의 법문 원고, 메모한 노트, 당시엔 종이가 흔치 않아 일력(日曆, 한 장 한 장 떼어내는 달력) 뒷면에 쓴 스님의 친필 메모 그리고 평소 스님이 소장했던 경전과 서책 등이 꽉 차 있다.
진열장에 모신 스님의 친필은 이 방에 들어서는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중 노릇-모든 사람들을 부처님과 같이 섬긴다. 世上에서 가장 尊敬받는 偉大한 人物은 모든 사람을 가장 尊敬하는 사람이다. 受施如箭’이라고 쓴 친필은 스님이 맏상좌 천제스님에게 내린 글이다. ‘受施如箭(수시여전)’은 신도들의 시주 받기를 제 몸에 화살을 맞는 것과 같이 하라는 뜻이다.
천제스님은 이 글을 대하면서 요즘의 불교계 상황을 되짚어 보며 안타까워한다. 무속불교의 타파.사찰에서의 상행위 근절, 사기 승단의 정화를 일러주신 은사의 가르침이 되새겨지기 때문일까.
맏상좌 천제스님(왼쪽)과 성철스님.
2층 선방은 시민선원도 개원했다. 여느 절의 선방과 달리 정면엔 가섭존자의 좌상 그리고 3면 벽에는 스님이 1947년 봉암사 결사를 할 때 쓴 ‘공주규약’ 초안과 공주규약 본문, 그리고 참선할 때의 마음가짐을 일러준 말씀들을 커다란 판넬로 만들어 걸어놓았다.
‘먹을 것이 없으면 차라리 살인.절도를 할지언정 어찌 부처님을 생활도구화 하겠는가?’ 봉암사 결사 공주규약 본문에서는 뺐지만 초안에 적은 이 말은 진정 출가수행인이 어떤 정신을 가져야 하나를 엄히 경책한 말이다.
해월정사는 이제 봉훈관 건립에 이어 성철스님 사리탑.추모비.추모전을 건립하는 ‘추모성역조성’ 불사를 추진하고 있다. 성철스님 생전에는 스님을 모시던 몫을 한 해월정사는 스님 열반후인 이제는 스님의 유훈을 더 널리 알리는 도량으로 거듭나게 된다.
스님이 그립고 스님의 법향과 법음이 그리운 사람이면 비록 불자가 아니라도 여기 와서 출가수행인의 자세와 출가정신을 새삼 가다듬는 절이 되도록 하겠다는 게 지금의 해월정사가 있는 의미요, 여법하고 충실한 도량으로서 발전하기를 바라는 염원일 것이다.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계를 스승으로 삼아라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최후로 부촉하셨다. “내가 설사 없더라도 계(戒)를 스승으로 삼아 잘 지키면 내가 살아있는 것과 같으니 부디 슬퍼하지 말고 오직 계로써 스승으로 삼아 열심히 공부하라. 너희가 계(戒)를 지키지 못하면 내가 천년만년 살아 있더라도 소용이 없느니.”
지당한 말씀이다. 계(戒)는 물을 담는 그릇과 같다. 그릇이 깨어지면 물을 담을 수 없고 그릇이 더러우면 물이 깨끗하지 못하다. 흙그릇에 물을 담으면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도 흙물이 되고 말며 똥그릇에 물을 담으면 똥물이 되고 만다.
그러니 계(戒)를 잘 지키지 못하면 추하고 더러운 사람의 몸조차도 얻지 못하고 악도에 떨어지게 된다. 그러니 어찌 계를 파(破)하고 깨끗한 법신(法身)을 바라리오. 차라리 생명을 버릴지언정 계(戒)를 파하지 않으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수도자에게 주는 글
[불교신문 2822호/ 6월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