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심정사(古心精舍)는 부산 중구 중앙동에 자리 잡고 있는 절이다. 중앙동은 이름 그대로 부산의 중심지다. 지금도 이 일대를 부산사람들은 ‘원도심지’라 부른다. 원도심(原都心)이라는 말은 이 지역이 원래부터 부산의 중심지라는 말이다. 옆의 광복동과 더불어 중앙동은 6.25한국전쟁 이후 부산의 문화와 상권의 중심지였다. 한국전쟁 때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들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생활터전을 잡아갔다. 부산의 상징인 용두산(龍頭山) 자락에 펼쳐진 광복동.중앙동은 부산이 전쟁으로 임시수도가 된 시절의 흔적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성철스님 영정 앞에서 ‘능엄주’ 1000독 기도정진하는 부산 고심정사 신도들. 신도들 가운데 20여명은 매일 3000배 참회기도를 1년간 이어간다. 김형주 기자
가수 현인(玄仁)의 노래로 유명한 ‘40계단’에는 지금 그 옛날을 생각하게 하는 노래비와 가수의 좌상(坐像)이 있고 그 아래에는 6.25 당시 피난생활의 고달픔과 고난의 생활상을 알게 하는 청동 조형물들을 조성해서 보여주고 있다.
전쟁의 상흔(傷痕)이 묻어 있는 곳, 부산의 중심지인 이곳 중앙동에 성철스님을 기리는 가람이 세워진 데는 감동어린 사연이 있다. 고심정사는 성철스님이 부산 나들이를 할 때면 잠시 머물던 한 신도의 집을 헐고 그 터에 세운 절이다.
동산스님 추모재 참석차 부산 나들이 때
머물던 현광-대법선 신도 집
백련불교재단에 기증 전법도량으로 거듭나
스님 열반 후 문도들에 의해 건립됐다. 이 터는 신도 현광(玄光) 이용수(李龍壽)와 대법선(大法船) 최봉순(崔鳳順) 부부가 천초탕(千草湯)이라는 큰 목욕탕과 숙박을 겸한 4층 대형건물을 운영하던 곳이었다. 성철스님은 부산에 오면 이 건물의 맨 위층에 마련된 별실에 머물렀다.
청사포 해월정사가 건립되기 전이었다. 스님은 은사이신 동산스님의 추모재에 참석차 부산 범어사에 올 때면 이곳에서 머물곤 했다. 현광 거사와 대법선 보살은 현재 원로 비구니인 백졸(百拙)스님의 부모이다. 백졸스님은 부산 해운대구 재송동 옥천사(玉泉寺) 회주이다.
성철스님 열반 후 현광 거사는 자신이 살던 이 건물과 터를 성철스님의 추모현창 사업에 쓰라고 백련불교문화재단에 기증했다. 이 무렵의 이야기를 백졸스님에게 들었다.
“거사님은 처음부터 절에 다니기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가 성철스님을 자주 찾아뵙고 그 지도를 받으셨고 저 또한 그런 인연으로 큰스님 지도를 받고 출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아버지이신 현광 거사님도 우리 모녀의 불심에 젖게 되었다고 할까요. 큰스님을 이해하고 믿고 따르게 되었지요.
거사님 말년의 어느 날 저를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출가하여 선방에서 정진하고 있을 때지요. 거사님은 저에게 물었지요. ‘성철 큰스님을 위한 사업을 하는 재단 같은 것이 있느냐’라고. 저는 백련불교문화재단이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자기를 바로 보는 사람’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
‘남모르게 돕는 사람’ 기조
거사님은 그러면 그 재단 책임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그러십디다. 원택스님이 그 분인데 그러면 두 분이 자리를 같이하도록 주선하겠다고 했어요. 그런 말이 오고간 지 얼마간 시일이 지난 뒤에서야 두 분이 만나게 되었어요. 원택스님도 처음에는 거사님의 뜻을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거사님이 크게 마음 쓰신 그 뜻을 가볍게 할 수 없다는 무거운 마음이 들었고 만에 하나라도 그 큰 원력에 미치지 못할까봐 선뜻 응하지 못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거사님의 뜻을 원택스님이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거사님은 이 결정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어요. 어쩌면 당신은 무언가 자신이 이 세상에 왔다간 흔적을 이렇듯 성철 큰스님을 모시는 일에 한 몫을 한데 대해 마음 편히 이승을 떠나게 되었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어요.”
고심정사 전경.
1999년 11월4일 현광 거사가 지녔던 건물과 토지를 백련불교문화재단으로 기증했다고 고심정사 원택스님은 밝혀놓고 있다. 원택스님은 2002년 이 터에 가칭 부산 백련불교대학 신축계획을 수립했으나 예산부족으로 그 계획을 수정, 리모델링 공사를 시행했다.
그러던 중 건물구조 진단 결과 사용금지 판정을 받아서 공사를 중단했다. 이듬해인 2003년 5월 성철스님문도회는 기증자의 뜻을 잇고 큰스님의 법을 펼치기 위하여 이 자리에 절을 창건하기로 하여 옆의 토지 62,7㎡(19평)를 매입했다.
2004년 4월 성철스님문도회 주관으로 ‘고심정사 기공식’을 갖게 되었다. 2005년 완공된 고심정사는 대지 544,5㎡(165평) 지하1층 지상6층 연면적 2996.4㎡(908평)의 대가람이다. 주차장(1층) 불교대학(2층) 공양간과 샤워실(3층) 선원(6층)으로 너른 수행공간과 부속공간을 마련했다.
불교대학 14기 걸쳐 졸업생 1000여명
포교사도 75명 배출
신도들은 정기적으로 법신·광명진언 1000독
20여명은 매일 3000배 참회
5층 법당은 330㎡(100여 평)의 넓은 공간이다. 2단으로 된 불단 중앙엔 석가모니불, 서쪽엔 아미타불, 동쪽엔 약사여래불을 모셨다. 불단 서쪽에는 영단을, 동쪽에는 성철스님의 영정을 크게 모시고 있다. 좌우보처 보살상, 10대 제자, 지장보살 미륵불과 사천왕을 모신 후불 목탱화가 장엄하다.
고심정사 불교대학은 전국의 어느 불교대학에 비해 강사진과 강의내용이 올곧고 알차다. 현직 교수로 짜여진 강사진과 기초부터 높은 수준의 경전강의에 이르기까지 교과목의 폭과 깊이를 더하고 있으며 2005년 제1기에서 올해 14기까지 배출된 졸업생도 1000여명이나 된다. 이 불교대학을 거쳐 포교사 자격을 얻은 사람도 75명이나 된다.
도심지 가람인 고심정사는 ‘자기를 바로 보는 사람’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 ‘남모르게 남을 돕는 사람’을 길러내는 목적으로 불교대학을 운영하고 불자들의 신행생활을 이끈다. 철저히 성철스님의 수행정신과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고 실생활에 적용토록 일깨우고 다짐한다.
사찰 터를 기증한 신도 부부 현광 거사와 대법선 보살.
신도들은 정기적으로 법신진언기도 광명진언기도 1000독 기도 그리고 그 중에서 20여명은 매일 3000배 참회기도를 1년 한다. 5~6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부처님 당시에도 재산이 많은 장자(長子)가 부처님을 위해 전 재산을 털어 절을 짓고 불법(佛法)을 널리 펴게 했다. 오늘날에도 그 원력들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현광 거사의 성철스님을 위한 원력 또한 그러하다.
부산 도심지 대가람 ‘고심정사’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부처님법을 그리고 그 불법을 그대로 따르고 평생을 살아온 성철스님의 수행정신과 크나큰 지도력을 새삼 가슴 깊이 느끼게 된다.
“돈을 벌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돈을 쓰기 또한 정말 어렵다”는 말을 곱씹으면서 현광 거사와 대법선 보살 내외의 불심과 불교 홍포 원력을 거듭 생각한다. 성철스님의 뜻에 따라 불법을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알고 바르게 행하는 불자들이 고심정사에서 더욱 더 많이 태어나기를 기원한다.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최잔고목
부러지고 이지러진 마른 나무 막대기가 최잔고목(摧殘枯木)이다. 이렇듯 쓸데없는 나무막대기는 나무꾼도 돌아보지 않는다. 땔나무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불 땔 물건도 못 되는 나무 막대기는 천지간에 어디 한 곳 쓸 곳이 없는 아주 못 쓰는 물건이니 이러한 물건이 되지 않으면 공부인(工夫人)이 되지 못한다.
결국은 제 잘난 싸움마당에서 춤추는 미친 사람이 되고 말아서 공부 길은 영영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인은 세상에서 아무 쓸 곳이 없는 대낙오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오직 영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 버리고 세상을 아주 등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버림받는 사람, 어느 곳에서나 멸시 당하는 사람, 살아나가는 길이란 공부 길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불법(佛法) 가운데서도 버림받은 사람, 쓸 데 없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영원한 자유’를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천태 지자대사 같은 천고의 고승도 죽을 때 탄식하였다. “내가 만일 대중을 거느리지 않았던들 육근청정의 성위(聖位)에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어른노릇 하느라고 오품범위(五品凡位)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지자대사 같은 분도 이렇게 말씀하였거늘 하물며 그 외 사람들이랴.
- 수도팔계(修道八戒) 중에서
[불교신문 2826호/ 6월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