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해인사 주석처였던 퇴설당 앞에 선 원융스님(해인총림 수좌). 김형주 기자
“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 (역천겁이불고 항만세이장금)
천겁의 세월이 지나도 옛 되지 않고 만세를 뻗쳐 항상 지금이다.
‘성철스님의 자취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스님이 머물던 도량을 순례하는 글을 마무리 지으면서 찾아간 절이 해인사다. 해인사는 스님의 출가도량이자 열반도량이다. 다시 찾아온 해인사 일주문 앞에 서서 ‘伽倻山(가야산) 海印寺(해인사)’라 쓴 편액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날따라 이 글이 새삼 감회를 갖게 한다. 일주문 주련(柱聯)에 새겨진 글 역시 그러한 마음을 더하게 했다.
“천겁의 세월이 지나도 옛 되지 않고 만세를 뻗쳐 항상 지금이다.” 천제스님(부산 해월정사 회주.성철스님 맏상좌)은 이 말이 지닌 뜻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언제나 자리해온 해인사를 말해주는 적절한 표현”이라고. 성철스님(1912~1993)이 열반한지도 내년이면 20주년이 되고 올해는 탄신100주년이 되는 해다. 스님의 자취를 찾는 순례길의 끝자락에서 해인사 일주문 주련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보았다.
출가-전법-열반도량 해인총림 설립 이어
방장-종정으로 추대돼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수행정신 올곧이 펼친 곳
출가한 곳, 법을 넓고 크게 펴신 곳, 장엄한 열반의 모습을 보이신 도량. 성철스님은 해인사 도량에서 높고 높은 법의 깃발을 온누리에 드리우고 평생토록 이룬 모든 것을 남김없이 우리에게 주고 가셨다.
그러나 우리는 스님을 보낸 것도 아니요 스님은 우리 곁을 떠난 것도 아니다. 스님을 떠올리면 당신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 마음속에 스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스님을 대할 수 있다. 해인사가 천겁의 세월을 지나도 그대로 듯 성철스님도 이와같이 늘 우리와 함께 한다.
성철스님은 1967년 해인사에 다시 와서 총림을 설립하고 1981년엔 조계종 제7대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당신의 세수 69세. 이어 1991년 제8대 종정으로 재추대되고 1993년 열반했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성철스님이 종정직을 수락하면서 내린 법어이다.
당시 스님을 두고 사회 매스컴에서는 ‘신비의 베일에 싸인 성철 조계종 종정’ ‘취임식에 참석하지도 않고 법어만 내린 성철 종정’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그랬다.
선문정로ㆍ본지풍광 비롯 禪宗 핵심어록 ‘강론’ 등
37권 ‘선림고경총서’
백련재단-문도회-신도 원력 모아져 지금도 발간
스님은 당신을 종정으로 추대한 그 취임식에도 나가지 않았다. ‘산승(山僧)은 산에 있어야 한다’는 신조였기에 그러했다. 이때부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말이 스님을 상징하는 말처럼 사람들 사이에 번져갔다.
스님이 종정으로 추대된 데는 그 전해인 1980년 이른바 10.27불교법난이 발생한 일과 무관하지 않다. 종단이 어려운 때에 스님의 법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기에 자운 큰스님 등이 스님에게 사전 상의도 없이 종정직을 맡게끔 한 것이었다. “안한다는 말 하지 말고…”라는 간곡한 자운 큰스님의 말에 성철스님도 어쩔 수없이 수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해인총림의 설립 - 방장추대 - 종정추대로 이어진 스님의 가야산 주석시절은 문자 그대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스님의 수행정신을 올곧이 펼친 시기였다.
종정이 된 해 스님은 <선문정로(禪門正路)>라 이름한 저서를 출간했다. ‘선의 바른 길’이라는 이 책을 통해 스님의 선(禪)에 대한 당신의 사상을 집대성하고 돈오돈수(頓悟頓修) 사상을 설파했다.
“…고금(古今) 선지식들의 현언묘구(玄言妙句, 깊은 뜻을 지닌 말과 묘한 언구)는 모두 눈(眼)속에 모래를 뿌림이라…열할(熱喝)과 통방(痛棒)도 납승의 본분이 아니거늘 어찌 다시 눈 뜨고 꿈꾸는 객담(客談)이 있으리오마는 진흙과 물속에 들어가서 자기의 성명(性命)을 불고(不顧)함은 고인(古人)의 낙초자비(落草慈悲)이다.
정법상전(正法相傳)이 세구연신(歲久年深)하여 종종(種種) 이설(異說)이 횡행하여 조정(祖庭)을 황폐케 하므로 노졸(老拙)이 감히 낙초자비를 운위(云謂)할 수는 없으나 만세정법(萬世正法)을 위하여 미모(尾毛)를 아끼지 않고 정안조사(正眼祖師)들의 수시법문(垂示法門)을 채집하여 선문(禪門)의 정로(正路)를 지시(指示)코자 한다….
성철스님 부도. 김형주 기자
선문은 견성이 근본이니 견성은 진여자성을 철견(徹見)함이다. 자성은 그를 엄폐한 근본무명 즉 제8아뢰야의 미세망념이 영절(永絶, 영원히 끊어짐)하지 않으면 철견하지 못한다. … 견성 방법은 불조(佛祖) 공안(公案, 화두)을 참구함이 가장 첩경이다…. 무릇 이설(異說)의 일례(一例)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이다. 선문의 돈오점수 원조(元祖)는 하택(荷澤)이며 규봉(圭峯)이 계승하고 보조(普照)가 역설한 바이다.
그러나 돈오점수의 대종(大宗)인 보조도 돈오점수를 상술(詳述)한 그의 저서 <절요(節要)> 벽두에서 하택은 시지해종사(是知解宗師)니 비조계적자(非曹溪嫡子)라고 단언하였다. 이는 보조의 독단이 아니요 육조(六祖)가 수기(授記)하고 총림이 공인한 바이다. 따라서 돈오점수 사상을 신봉하는 자는 전부 지해종도(知解宗徒)이다.
원래 지해(知解)는 정법을 장애하는 최대 금기(禁忌)이므로 선문의 정안조사들은 통렬히 배척하였다. 그러므로 선문에서는 지해종도라 하면 이는 납승의 생명을 상실한 것이니 돈오점수 사상은 이렇게 가끔 가공(可恐)할 결과를 초래했다.
이렇듯 이설(異說)들의 피해가 막심하여 정법을 성취하지 못하게 되나니 참선고류(參禪高流)는 이 책에 수록된 정전(正傳)의 법언(法言)을 지침삼아 이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용맹정진 확철대오하여 불조의 혜명을 계승하여 영겁불멸의 무상정법을 선양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선문정로> 서문)
천겁의 세월이 지나도 해인사가 그대로이듯
성철스님의 가르침도 늘 우리 곁에 남아 있어…
성철스님은 또 1982년 <본지풍광(本地風光)>을 펴냈다. <본지풍광>은 스님의 상당(上堂) 법어를 모은 책이다.
“성철스님은 이 두 권의 책을 펴내고는 ‘부처님께 밥값 했다’고 흔연해 하셨다”고 일타스님은 말했다.
스님은 이 두 책을 비롯하여 스님의 말씀 및 종문(宗門)의 핵심어록에 관한 스님의 강론을 엮은 10여 종의 책과 스님께서 몸소 실천하여 번역하게 한 선종의 주요 어록 37권을 함께 묶은 <선림고경총서(禪林古鏡叢書)>를 발간했다.
이 모두의 책들은 백련불교문화재단(이사장 원택스님)과 성철스님문도회(회장 천제스님) 그리고 신도들의 원력으로 지금까지도 계속 발간되고 있다.
원융(해인총림 선원 수좌)스님의 안내로 퇴설당(堆雪堂)에 갔다. 성철스님이 열반한 방인 퇴설당은 지금은 방장실로 쓰고 있지만 이전에는 선방이었다. 출가이후 40여년을 줄곧 선방에서 지낸 원융스님은 “퇴설당에서 나도 근 10년 지낸 적 있지”했다. 성철스님 시자로 있으면서 평생 화학사(化學絲)로 된 옷은 입지 않고 광목.모시만 입고 있는 스님. 지금도 행전 착용을 고집하는 스님이다.
성철스님 열반 3일전 병환으로 누워있는 은사에게 원융스님이 물었다. 스승이 잠든 것을 보고 원융은 “스님, 이러한 때 스님의 경계는 어떠십니까?”하고 물으니 깊이 잠든 것 같던 스님이 벌떡 일어나 난데없이 원융의 뺨을 한 대 힘껏 쳤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상좌들은 “스님께서 오래 사시려나 보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 때의 제자 원융스님도 이제는 70이 넘은 노승으로 참선수행자의 지도자가 되었다. 스승은 가도 그 가르침은 남는다는 말을 원융스님을 만나 다시금 느꼈다.
해인총림 현판. 김형주 기자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성철스님 임종게(臨終偈)
生平欺誑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불교신문 2830호/ 7월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