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은 후학들에게 수행자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스스로 수행자의 길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고 자신이 성취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전하는데 평생을 보냈습니다. 해인총림 방장시절 스님은 ‘백일법문’을 비롯하여 상당법문, 소참법문을 통해 고구정녕이 불교의 이론과 사상, 불자가 지녀야 할 가치관을 일러주셨습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깨달음에 이르는 첩경은 참선수행임을 누누이 말씀하시고 수좌들에게 엄하면서도 자상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선방에서는 장군죽비로 수좌들을 가차 없이 경책했습니다. 조는 수좌만이 아니라 졸지 않는 수좌도 그 큰 장군죽비로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정진대중들은 스님의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정신을 번쩍 차렸으니까요.
요즘의 수행풍토에서 스님의 그런 모습이 무척 아쉽고 그립습니다. 방장 스님이나 조실 스님 그리고 지도자 위치에 있는 스님들이 성철스님처럼 그렇게 이론과 실천으로 후학을 일깨우고 다그친다면 제방의 수행분위기는 엄청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진 중에도 도반끼리 법을 두고 의견을 달리하는 토론도 나오고 해제 때면 여기저기 수행처에서 법거량이 빈번하지 않겠습니까?”
부산 범어사에 주석하면서 선(禪)과 교(敎)로 두루 불자들을 지도하고 있는 우리 곁의 선지식(善知識) 무비(無比)스님. 스님은 젊은 시절 성철스님과의 법연(法緣)을 말하는 자리에서 첫 마디를 이렇게 말하면서 대담에 응했다.
- 성철스님과의 첫 만남은 어떠했습니까?
“1970~1971년 겨울 스님께서 <육조단경>을 강의할 때 참석했습니다. 그 이전 1967년 동안거 때 스님의 ‘백일법문’ 법석에는 참석하지 못했었지요. 역경연수원에 가느라고. 당시 소참법문 형식으로 육조단경을 스님께서 강의하셨는데 감로수와 같은 그 법문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합니다.
1971년 동안거 때는 한 철 동안 용맹정진하기로 도반 몇몇과 결사하고 선열당(禪悅堂) 뒤편 조사전(祖師殿)에서 목숨을 내건 정진에 들어갔어요. 그때 성철스님의 법문과 죽비경책은 결사대중을 이끄는 양 날개였습니다.
당시 동참 스님들인 적명.거해.근일.일현.정안.현호스님 등은 지금 제방에서 지도자로서 후학을 제접하고 있지요. 그때의 한 철 용맹정진 이후 7일간의 용맹정진에 더러 동참하곤 했으나 그 시절처럼 혼신을 다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큰스님의 경책이 없었기 때문이라 여깁니다.”
육조단경 강의 때 첫 만남
법문과 죽비 경책은 대중 이끄는 양 날개
- ‘나는 큰 절 방장 스님 시자’라는 말을 자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 하! 그 이야기 말이요? 나는 큰스님의 상좌가 아니잖습니까. 그런데도 방장 스님 시자라 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요. 그 당시 큰스님은 해인사 백련암에 주로 머무셨지요. 상당법문 때나 큰 절에 일이 있을 때면 백련암에서 큰 절로 오셔서 퇴설당에 머무셨어요.
그때는 내가 ‘현지 시자’를 자원했지요. 스님이 머무실 방을 청소하고 아궁이에 미리 군불도 때 놓고…. 그 일이 내 몫이었지요. 그러한 데는 큰스님의 말씀을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는 내 딴의 꿍심이 있었어요.
그런 내가 기특했던지 스님은 내가 여쭙는 말에 흔연히 답해주셨지요. ‘불교를 알려면 어느 책을 읽어야 합니까’ 하니 ‘<종경록(宗鏡錄)>을 일러주셨고 일본학자 우이 하주쿠(宇井伯壽, 1882~ 1963)의 <불교대전>도 읽으라 하셨지요. 불교대전은 10권으로 된 책인데 일본의 인도철학자요 불교학자이며 문헌을 철저히 고증하는 학문연구로 유명한 우이 하주쿠의 유명한 저서이지요.”
- 돈점논쟁(頓漸論爭)에 대한 스님의 견해는 어떠십니까?
“큰스님은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 1210) 국사를 엄청 비판했지요. 그걸 ‘돈점논쟁’이라 부르는데 돈오돈수(頓悟頓修, 단 번에 깨치어 도를 이룬다)와 돈오점수(頓悟漸修, 깨쳤다 해도 습기는 남아 있으니 점차 닦아 나가야 한다)의 수증론(修證論, 닦음과 깨침의 논리)을 말하는 것이지요.
달리 말하면 문자와 이론으로 깨달음을 아는 것은 해오(解悟)이지 증오(證悟, 자신이 깨달음을 체득함)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증오라야 진정한 깨달음이요 대각의 성취이지 해오의 단계는 문자와 언어로서만 아는 것이기에 궁극적인 깨달음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큰스님이 보조스님을 비판하는 대목은 초기 보조사상은 ‘해오’에 머물렀으나 보조스님 말기에는 ‘증오’라야 한다고 보조스님 스스로도 그렇게 말했는데 후학들은 초기의 보조사상에만 머물러 있다는 질타(叱咤)이지요. 보조스님을 바로 알고 참선수행자는 돈오돈수를 근본목표로 해야 한다는 큰 가르침이지요. 큰스님은 자신의 이 말씀을 <선문정로(禪門正路)>라는 책에 자세히 해 놓으셨지요.”
- 백일법문 법석에 참석하지 않으셨다면 그 법문을 접할 기회는 없었겠습니다.
“아니지요. 백일법문을 듣는 것으로 말하면 동시대 살고 있는 승속(僧俗) 가운데 나만큼 그 법문을 많이들은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자부할 정도입니다. 큰스님의 직접 강의를 들은 것은 <육조단경>이 전부였지만 천제.만수.원공.원기스님 등이 큰스님의 법문이나 강설을 녹음으로 잘 남겨두었고 이것을 원택스님이 CD로, 책으로 자세히 풀어서 지금 널리 퍼뜨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요즘은 당시 그 법석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도 당시와 똑같은 분위기를 느끼며 큰스님 녹음 법문을 듣고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백일법문’ 통해 불교, 중도사상 회통
신심명 증도가 등으로 스님 사상 깊이 이해
- 그렇게 자부하신다면 스님께서 생각하시는 백일법문의 영향력은 어떠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큰스님은 백일법문을 통해 불교를 중도(中道)로 회통(會通)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내용은 중도(中道)라고 한마디로 일러주시고 그 중도의 법칙으로 불교를 설명했으며 중도를 기준으로 불교와 비불교를 판단하는 근거로 삼았지 않습니까. 백일법문을 들어보면 큰스님이 중도로서 불교를 꿰뚫었음을 알게 되고 이른바 ‘성철사상’의 뿌리를 알게 된다고 봅니다.
나는 백일법문 그리고 큰스님이 강설한 신심명(信心銘), 증도가(證道歌), 육조단경(六祖壇經) 등을 통해 ‘성철스님의 법을 깊이 이해했고 당신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은 무비(無比)’라고 나 스스로 믿고 있습니다. 허- 허- 허.”
- 스님 오늘 말씀 참으로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큰스님은 나에게는 ‘선사(禪師)는 이러해야 한다’는 표상입니다. 나는 후학들에게나 불자들에게 ‘성철스님을 거울삼아 수행해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대선지식을 모시고 살았던 나의 삶이 참으로 크나큰 복(福)이었음을 새삼 알았기 때문입니다. 큰스님 가신지 20년이 다 된 지금 다시금 큰스님을 회상할 기회를 내게 주어서 내가 원택스님에게 감사해야겠습니다.”
범어사 화엄전을 찾아온 원택스님(오른쪽)과 이진두 논설위원에게 성철스님과의 법연을 이야기하는 무비스님(왼쪽). |
부산 범어사에서 여환(如幻)스님을 은사로 출가, 해인사 강원 졸업, 해인사 통도사 등 여러 선원에서 안거했다. 탄허스님의 법맥을 이은 대강백으로 통도사.범어사 강주, 조계종 승가대학원장과 교육원장, 동국역경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 동화사 한문불전승가대학원장. 범어사 화엄전에 주석하면서 전국의 수많은 법회와 인터넷카페 염화실(http://cafe.daum.net/yumhwasil)을 통해 불자들의 마음을 열어주고 있다.
역.저서로 <금강경오가해> <금강경강의> <화엄경강의> <지장경강의> <사람이 부처님이다> <법화경(상.하)> <일곱 번의 작별인사-49재 법문집> <신 금강경강의> <무비스님 직지강설> <신심명> <천수경> <무비스님의 보살계를 받는 길> <당신은 부처님> 등 다수가 있다.
[불교신문 2838호/ 8월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