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럴 때는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게 최상이라고. ‘좋으면 좋다 하고 싫으면 싫다 하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말고 터놓고 말하자’라고. 문제가 생겼을 때는 즉시 어른께 여쭙고 해결해나가는 게 상책입니다. 성철스님께서는 아랫사람의 바른 말을 언제든지 들어주셨고 권위나 위엄으로 누른다거나 막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스님, 이런저런 일이 생겼습니다. 이런저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래? 니 생각은 어떻노? 우짜면 좋겠노’ ‘이리저리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 그라모 그리 하도록 해라’
스님과의 대화는 이렇듯 막힘이 없었습니다. 항간에서는 큰스님의 카리스마를 이야기하고 엄격한 면을 앞세워 권위적이고 독선적이라는 말들도 더러 합니다. 내 생각엔 큰스님의 그런 카리스마는 정법을 지키고 법대로 사는 것을 말씀하실 때는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정법수호ㆍ법대로 할일엔
카리스마 여지없지만
대중화합 수행공간에서는
주위 수행자 의견 먼저 청취
그러나 대중이 화합하여 사는 수행공간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해결할 때는 언제나 당신 의견보다 주위의 수행자들 의견을 먼저 들으셨습니다. 그러시고서는 ‘그래 그 생각들이 옳다 그대로 하자’고 흔쾌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어른이든지 한 산중의 어른으로서는 권위와 위엄을 지니기 마련입니다. 그와 함께 대중의 공의(公議)를 수용하는 포용력과 관대함도 함께 갖추고 있는 지도력이 있습니다. 성철큰스님 모시고 몇 철 살지 않았지만 가까이서 느낀 큰스님의 풍도(風度)는 위엄과 자비를 두루 갖춘 그런 선지식이셨습니다.”
출가이후 40여년을 참선 수행의 외길을 걸으면서 정진력을 깊게 하고 밝은 지혜로 이(理)와 사(事)에 원융함을 지니고 후학을 이끌고 있는 정광(淨光)스님. 학문과 선(禪)수행으로 승속 간 걸림 없는 교화를 널리 펴고 있는 정광스님.
그러나 스님은 밖으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기로 알려진 분이다. 불교계 언론인 사이에서조차도 스님과의 면담은 좀체 없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지금은 통도사 서운암 무위선원 선덕(善德)으로 후학을 지도하고 있는 스님을 뵙고 법어를 듣는 영광을 누린 것은 커다란 복덕이었다.
■ 대담 : 원택스님(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 해인총림에서 지내실 적 이야기를 좀 해 주십시오.
“(성철)큰스님께서 ‘백일법문’ 하실 때 나는 동화사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이듬해 해인사에 갔지요. 당시 총림에서는 지월 큰스님이 주지, 일타 큰스님이 율주로 계셨습니다. 그런데 소임을 이르는 직명이 옛 중국 총림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주지를 도사(都寺)라 했지요.
청규(淸規)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 살림이 (수행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조사전에서 10여명이 한 철을 용맹정진 했지요. 적명.근일.무비.거해.정안스님 등이 함께 했지요. 한 철을 잠 안 자고 방바닥에 허리붙이지 않고…. 모두들 그렇게 장좌불와의 수행이었어요.
그때는 모두들 기운이 좋을 때라 그렇게 잘 살았지요. 처음 한 달 동안은 힘들다 싶었는데 한 달이 지나니 힘든 줄 모르게 되었습니다. 방장 스님은 조사전에 경책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수행자들 자율에 말기신 거지요.”
- 해인총림에는 얼마나 머무셨습니까?
“근 4년 있었습니다. 처음 해인총림에 갈 때는 10년은 살아도 좋겠다 했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나서 송광사를 거쳐 봉암사에 갔지요. 봉암사에서는 30년을 살았어요.”
해인사서 한철 장좌불와 때
육조단경 신신명 증도가 강설
소참법문으로 수좌들 의욕고취
수행분위기 진지…열기 넘쳐
- (성철)방장 스님께서는 상당법어만이 아니라 소참(小參)법문도 하셨지 않습니까.
“그랬습니다. <육조단경> <신심명> <증도가> 등을 강설하셨지요. 그때 그 법문들을 소중하게 들었습니다. 질문도 많이 했지요. 방장 스님은 어떤 질문에도 소상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소참 법문으로 수좌들에게 의욕을 불어넣어 주셨지요. 수행 분위기가 진지하고 열기에 넘쳤지요.”
- 그 무렵 기억나는 게 있는지요.
“예, 그리 내세울 것도 없고 지금 얼른 말하자니 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만 한 두어 개 일은 기억합니다. 서옹 전 종정께서 <임제록>을 펴내셨을 때 일입니다. 임제록 가운데 삼구(三句) 삼현(三玄) 삼요(三要)가 있어요.
글귀 중 ‘三要印開朱點側(삼요인개주점측)’을 ‘삼요의 인(印)이 열림에 붉은 점이 우뚝하고’로 번역한 구절입니다. 그 ‘붉은 점이 우뚝하고’에 대해 방장 스님께 여쭌 적이 있고 <벽암록> 제2칙 ‘조주의 명백함도 필요 없음(趙州不在明白)’의 수시(垂示)에 ‘하늘과 땅이 비좁고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이 일시에 어둡고…’하는 첫 구절이 있어요.
그 글귀 중 ‘하늘과 땅이 비좁고’를 한자 원문에는 ‘乾坤窄(건곤착)’이라 했어요. 이 글귀를 갖고도 방장 스님과 문답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 <선문정로>에 대한 생각은….
“1980년대 초인가? 방장 스님의 ‘선문정로’를 보았습니다. 그러고서 서신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선문은 본래 정로는 없는데 구전(口傳)을 즐겨하는 인심(人心)만 무성하다’ 대충 이런 내용이 담긴 서신이라 기억합니다.
그 후 방장 스님으로부터 나보고 한번 다녀가라는 연락을 받았으나 못 가 뵙고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봉암사 살 때 봉암사 주변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려는 정부에 반대하여 산문을 폐쇄하며 맞설 때 방장 스님을 뵈러 간 적 있습니다. 그때 큰스님께서는 봉암사 대중의 의견에 적극 찬동하셨습니다. 그 법력으로 오늘의 봉암사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 봉암사는 방장 스님께서나 종단이나 그리고 수행자에게 두루 큰 의미를 갖는 수행처가 아닙니까? 정광스님께서 봉암사 살 때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한국불교사에서 ‘봉암사 결사’가 갖는 커다란 의미를 새기며 봉암사에 살았어요. 스님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새삼 짚어보고 내 삶을 정리하는 기간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신도를 상대하여 법회도 열고 기본선원을 운영하며 <서장(書狀)> <전심법요(傳心法要)> 등 선어록을 비롯해 <유교경(遺敎經)>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도 강설했습니다. 동춘 큰스님, 서암 전 종정을 모시고 법답게 살았지요. 서암스님 열반하신 후 비석 건립 등 뒷일을 잘 마무리 하고 2009년 봉암사를 떠나 지금 이곳으로 왔습니다.”
봉암사 국립공원 지정 반대
적극 찬동…오늘날로 이어져
수행자 삶은 깨달은 그대로
현실에서 실천하는 삶이라야…
- 성철스님에게 받은 영향이 있다면….
“방장 스님의 돈오돈수(頓悟頓修) 사상은 분명 새바람이었습니다. 바람직하고 좋은 것이라 느끼는 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내가 방장 스님께 받은 영향이라면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말하고 싶습니다. 수행자는 깨달음이 근본이요 행위는 깨달음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지 않습니까?
수행자의 생활이 자신이 깨달은 수행력과 맞지 않으면 그 생활은 실격이지요. 돈오하여 깨달은 그대로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삶이라야 하고 그런 불교가 되어야 합니다. 요즘 돈오사상은 여러 사람들이 따라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봅니다.
나는 돈오사상을 설명하려면 점수사상을 먼저 이해시켜야한다고 봅니다. 그 두 사상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쪽에만 치우쳐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 후학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으시면….
“언제나 선대(先代)의 일들을 잘 가려 후대(後代)를 올바로 이끄는 게 문제입니다. 후대에 귀감이 되는 일과 말을 해야지요. 지금 우리 불자는 할 일이 많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보(心量)가 더 커져야 합니다. 부처님의 광대심(廣大心)으로 자비와 포용력을 넓혀야겠지요.”
- 스님께서는 여기서도 외부상대 않으시고 조용히 사실 생각이십니까?
“아닙니다. 이제는 나를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지, 언제나 갈 생각입니다. 그동안 내가 드러내지 않고 살고 있다는 소리들이 있는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찾는 이가 별로 없었다는 말이 맞겠지요. 찾으면 가야지요. 나와 소통하는 문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허 허. 그게 내가 할 일이고요.”
통도사 서운암 무위선원에서 대담 중인 원택스님(왼쪽)과 정광스님. 정광스님은 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지행합일’을 들었다. 그것이 성철스님에게서 받은 영향으로 수행자는 깨달은 그대로가 생활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
경남 창원 출생으로 1961년 쌍계사에서 대월(大越)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68년 비구계를 받았으며 평생을 전국 여러 선원에서 참선수행의 외길을 걸어왔다. 동화사 해인사 송광사 등을 거쳐 봉암사에서는 30년 머물렀다. 봉암사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려는 정부에 맞서 오늘날의 봉암사로 지켜내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저서로 <지증대사비명소고(智證大師碑銘小考, 1992년 간행)>가 있다.
[불교신문 2852호/ 9월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