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큰스님은 수행자들이 이론과 실천을 겸비하도록 매섭게 경책하신 선지식입니다. 1967년 해인총림이 출범하고 성철 큰스님이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 많은 수행자들이 해인사로 몰려왔습니다. 나는 해인총림 초창기의 그 수행열기를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방장 스님께서는 총림 첫 동안거에 이른바 ‘백일법문’을 펼치셨습니다. 불교의 방대한 가르침을 중도(中道)로 일관되게 꿰뚫어 설파하셨습니다. 백일법문이 열리는 해인사 궁현당에는 선원 강원의 스님들은 물론이고 산내 암자 대중 그리고 전국에서 몰려 든 스님들과 신도 등으로 자리가 비좁을 정도였습니다.
방장 스님께서는 백일법문을 통해 불교이론을 깨우쳐주시는 한편 참선수행이 성도(成道)의 지름길임을 누누이 강조하시고 화두참선의 실참을 이끌어주셨습니다.
선방 스님들은 일반정진.가행정진(하루 15시간 참선수행).용맹정진(잠자지 않고 24시간 참선수행) 등으로 치열한 수행을 했습니다. 방장 스님께서는 백일법문.상당법문 이외에도 소참법문으로 선방 스님들의 정진 열기를 드높이셨습니다. 소참법문은 정진 도중 방장 스님이 조사어록 등을 강설하는 법석입니다.
불교의 방대한 가르침 ‘중도’로 꿰뚫어 설파한
첫 동안거 때 ‘백일법문’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스님께서는 <신심명> <증도가> <육조단경> 등을 강설하셨습니다. 또한 차담시간(정진도중 차 마시며 잠깐 쉬는 시간)에는 지월.일타.혜암 큰스님도 동석하셔서 법담을 들려주셨습니다.
방장 스님께서는 선방 대중들이 좌선하고 있으면 불시에 어간문을 박차고 들어오셔서 장군죽비로 사정없이 내려치셨습니다. 조는 사람이든 졸지 않는 사람이든 가림 없이 후려치셨지요. 그 서슬에 다른 방의 정진 대중들도 정신이 번쩍 들곤 했습니다.
해박한 이론으로 자상하게 불교의 진리를 일러주시고 매서운 경책으로 수행자의 정진력을 드높이게 해 주신 방장 스님의 그 크신 은혜는 문자 그대로 뼈를 갈아 가루를 내고 몸뚱이를 다 부수어서도 갚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출가이후 강원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선방에 갔습니다. 이런 나에게 방장 스님의 백일법문과 소참법문은 경학(經學)과 선어록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폭을 넓게 했고 가차 없이 후려치는 장군죽비의 경책은 나로 하여금 늘 깨어있는 수좌정신을 갖게 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큰 뜻을 품고 출가하여 평생토록 참선정진으로 일관한 원각(源覺)스님. 해인사 원당암 달마선원 선원장인 스님을 뵈러 12월14일 원당암에 갔다. 가야산에는 근 닷새 동안 눈이 내려 쌓였다가 우리 일행이 가는 날은 비가 내렸다.
내린 눈이 얼어붙을까봐 걱정하던 터에 비가 내려 쌓인 눈을 녹아내리게 하니 다행이라 여겨졌다. 잔설이 희끗희끗한 원당암 경내는 결제 때라 그런지 마냥 고요했다. 밖에는 칼바람이 쌩쌩 불고 비가 내려도 선방의 정진 열기는 바깥 날씨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 대담 : 원택스님(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 스님께서는 혜암 큰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은사 스님의 뜻을 이어오고 있지 않습니까. 은사 스님 모시기도 어렵고 은사 스님의 뜻을 잇기는 더욱 어렵다는데 스님께서는 이토록 여일한 모습을 보이시니 후학들에게 무언의 가르침이 되고 있습니다.
스님의 은사인 혜암 큰스님께서는 성철 큰스님이 1947년 ‘봉암사결사’를 하실 때 동참하셨고 성철 큰스님 열반이후 해인총림 방장, 조계종 종정으로 성철 큰스님의 뒤를 잇지 않았습니까? 성철 큰스님과 혜암 큰스님 그리고 혜암 큰스님의 상좌인 스님 이 세 분의 법연은 어느 스님보다도 각별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지중한 법연을 생각하면 숙세의 인연이라 할까요. 어른 스님의 뜻을 이어 출가수행자로서 여법하게 잘 살아야하는데 그 어른들의 가르침에 미치지 못해 마냥 송구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선방 스님들은
가행정진 용맹정진으로 정진열기 드높이고
백일법문과 소참법문은
경학과 선어록에 대한 이해의 깊이, 폭을 넓게 했지요
- 스님께서는 말씀을 그렇게 하시지만 은사 스님 열반이후 원당암을 이처럼 큰 가람으로 일구시고 정진대중도 사부대중을 함께 받아들여 잘 지도하고 계시니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말을 듣고 있지 않으십니까?
“원당암이 오늘의 대가람이 된 것은 은사 스님의 법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야 뭐 당신께서 이루어놓으신 자리를 지켜나가는 것뿐입니다. 당신 계실 적처럼 지금도 정진대중들은 첫째 셋째 주에는 일반인들도 동참하여 철야정진하지요.
서울 대전 대구 부산 마산 창원 진주 밀양 등 전국 각지에서 근 300여명이 오십니다. 방학 때면 선방에선 각급 교사들도 참가하여 80~90여명이 정진하지요. 일과는 큰절 선방 일과와 같이 합니다. 하루 8시간 정진하고 큰절 용맹정진 기간에는 1주일간 용맹정진도 하지요. 그때는 본방 대중과 외부인 합쳐 250여명이 됩니다.”
- 백일법문 때 방장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고 하셨는데…
“1967년 봄에 혜암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그해 8월 비구계를 받았습니다. 그해 가을 총림이 출범하자 지월 큰스님이 도사(都寺, 주지)로 계시고 은사 스님께서는 유나로 계셨어요. 법흥스님이 장경각 장주로 계실 때입니다. 나는 그해 겨울 그리고 다음해 여름 겨울 그렇게 세 철을 해인사에서 보냈습니다.
백일법문 때 정진 열기는 대단했어요. 방장 스님께서 매일 하실 법문 초록을 내려주시면 상좌 원공스님과 종무소의 태정스님이 등사하여 법문 때 대중에게 주셨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초록들을 다 모아 책처럼 엮어놓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은사 스님도 그걸 갖고 계셨지요. (그러면서 원각스님은 그 초록 모음을 우리 일행에게 보여주셨다).”
가차 없는 장군죽비 경책은
늘 깨어있는 수좌정신을 갖게 했습니다
그 큰 은혜 어찌 갚을지…
- 은사 스님이신 혜암 큰스님이 정진하는 곳이면 스님께서 꼭 따라가셨다면서요?
“지리산 칠불암, 남해 용문사, 지리산 상무주에서 스님 따라 살았지요. 상무주 아래 문수암을 지을 때는 일꾼들 밥도 해 날랐습니다. 20~30분 걸리는 길을 일꾼 밥을 운반했지요. 은사 스님 가시는 곳이면 따라가서 겨울 한철 지낼 땔나무도 해놓고 했습니다. 은사 스님께서는 당신 홀로 계시지 않았습니다. 여러 스님들과 함께 정진하셨습니다.”
- 제방 선원에도 많이 다니셨다면서요.
“통도사 극락암, 송광사 구산 큰스님 회상, 범어사, 불국사, 상원사, 전남 강진 백련사 등에서 정진했지요. 그때 은사 스님은 해인총림에 계셨고요. 원당암에는 은사 스님 열반 후 왔습니다. 오기 전에는 경남 거창 고견사 주지를 10여년 맡았었지요.”
- 해인총림 선방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한창 신심이 나서 공부할 때라 의문도 많았습니다. 방장 스님을 꽤나 귀찮게 해 드렸지요. 불쑥불쑥 방장실에 가서 의문점을 여쭈었으니까요. 화두가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스님은 화두를 풀어서 설명하시는 분도 있었어요. 그 말 들으니 더 혼란이 오고 화두참구는 잘 되지 않았지요. 방장 스님께서는 그런 내게 ‘화두는 말로 풀어서 하는 게 아니다. 의심을 해야 한다’고 가닥을 바르게 잡아주셨습니다.”
- 후학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은사 스님께서는 ‘공부하다 죽어라’ 하셨지요. 이 말씀의 의미는 참선수행의 중요성을 일깨우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나의 마음을 깨쳐서 어디에도 끄달리지 않고 살아야 자유롭고 활발한 삶이 된다. 참선하여 자성을 깨우쳐서 진리의 삶을 살아라’는 뜻이지요. ‘공부하다 죽어라’는 말씀의 뜻을 깊이 헤아리기 바랍니다.”
성철스님에 이어 해인총림 방장,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혜암스님. 그리고 그 두 분의 상좌인 원택스님(왼쪽)과 원각스님(오른쪽)이 원당암에서 만나 은사의 가르침을 되짚어보고 있다.
■ 원각스님은…
1947년 경남 하동 출생. 1967년 혜암스님을 은사로 수계. 1967년 해인총림 선원 수선안거 이후 통도사 극락암, 송광사, 범어사, 오대산 상원사, 전남 강진 백련사 등 여러 선원에서 정진했다. 경남 거창 고견사 주지를 거쳐 현재 해인사 원당암 감원 겸 달마선원 선원장, 해인총림 선원 유나로 있다.
[불교신문 2875호/ 12월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