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 탄신 100주년 맞아
조계사ㆍ불교중앙박물관서
추모법회ㆍ유품전 봉행
성철스님 자취를 찾아서
‘나의 법연을 말하다’ 등
본지 2년여 연재분 곧 출간
분기별 포럼에 이어
내년엔 ‘선문정로’ 재해석
더 쉽게 널리 알릴 계획
“2012년 성철스님 탄신100주년, 2013년은 열반 20주년이 되는 해라 제사만 지내면 되는 것이었지만 돌아보니 다른 분들에 대해서도 종단차원의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가 없더라고요. 현대에 들어서만 보더라도 조계종이 성립된 지 60년 됐고, 그동안 많은 종정 스님, 큰스님들이 명멸해갔는데 지도자나 도(道) 높은 스님들을 흠모하는 모습이 왜 없는지 안타까웠습니다. 종정 원로의원 등 큰스님들을 배출한 문중, 교구본사단위에서도 이 어른들을 추모하는 열기가 높아져 우리 불교계에 존경할 어른 스님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많은 사부대중이 더 많은 신심을 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각 문중에서 어른 스님 모시는 분위기가 살아난다면 우리 조계종이 지금보다 더 많은 인물의 보고(寶庫)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기념사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지난해 우리(성철)스님에 이어 백양사 서옹스님, 그리고 올해 탄허스님 탄신100주년을 맞아 월정사가 오대산에서 대대적으로 기념행사 하는 것을 보며 나름대로는 다행스런 마음을 갖게 됐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종단과 연계된 기념행사가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대한불교총본산’으로 상징성이 있는 조계사 마당에서 열반다례만이라도 모실 수 있으면 더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어른들은 해당 본산뿐만 아니라 우리 조계종의 큰 어른이지 않습니까.”
<성철스님 시봉이야기>로 널리 알려진 원택스님은 은사 성철스님의 탄신100주년 한 해 전인 지난 2011년 분기별 학술포럼에 이어 2012년 종단차원의 100주년 추모법회와 유품전시회를 열어가며 추모열기를 이끌어왔다. 또한 본지에서 분기별 학술포럼을 중계하는 가운데 ‘성철스님 자취를 찾아서’와 ‘성철스님과 나의 법연을 말하다’는 기획을 최근까지 2년에 걸쳐 연재해왔다. 3년 째 행사가 남아있는 상태지만 지난 6일 수송동 백련불교문화재단 서울사무소에서 스님을 만나 한층 높아진 기념행사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기념행사의 시작은 탄신100주년 한 해 전 개최한 학술포럼. ‘퇴옹성철과 현대 한국불교의 방향’ 주제로 2011년 3월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개최한 제1차부터 지난해 11월말 동국대에서 ‘불교의 명상 - 고대 인도에서 현대 아시아까지’ 주제로 개최한 제8차에 이르기까지 8차례 진행됐다.
“지난해 11월 국제학술회의는 세계적으로 명성 있는 11명의 학자들이 초청된 만큼 남방불교의 선(禪)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남방불교권의 위빠사나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에서의 선(禪)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진리를 깨쳐가는 다양한 수행법을 알 수 있었다는 평가가 있었듯이 좋은 학술회의였습니다. 앞으로 눈 밝은 학자들이 성철스님의 선사상을 깊이 연구해서 조계종 선사상의 의(당)체가 어디 있는지 학문적으로도 더 깊이 밝혀주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난해 학술포럼이지만 불교방송 아이피티비(IPTV)에서 이달부터 자막 붙여 방송한다는 얘기도 듣고 있습니다.”
- 학술포럼은 본래 3개년 계획이었지요?
“(성철)큰스님께서 늘 저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선문정로(禪門正路)>가 내 책 중에 세상에 제일 많이 읽히고 알아줘야 할 책인데 어려워서 생각만큼 읽히지 않으니 주석과 해석을 붙여 많은 사람들이 선(禪)의 바른길을 걸어갔으면 한다’고 하셨듯이 수행론에 대한 학술회의는 이만큼에서 끝내고 ‘선문정로’에 담긴 스님의 뜻을 이어가는 학술포럼에 주안점을 둬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격주 강의하려 하는 데 내년부터 저서 중심으로 해야 스님의 뜻을 시비 없이 세상에 펼쳐갈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그 대신 올해가 육조혜능조사 열반 1300주년이니 추모 학술회의를 하고 싶습니다. 성철스님 탄신100주년 기념 학술회의는 ‘수증론’에 갇혀있는 성철스님이 아닌 더 넓은 측면에서 성철스님이 우리 사회에 어떤 사상적 영향을 끼쳤는지를 종합평가하는 올 11월 포럼으로 마칠까 생각중입니다.”
- ‘성철스님의 자취를 찾아서’라는 기획은 경남 산청 겁외사에서 해인총림 해인사까지 25곳을 답사해 33회에 걸쳐 본지에 연재됐습니다. 필자 이진두 논설위원은 연재를 마치면서 (성철스님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일러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위원의 글은 현장답사 기운이 강했습니다. 수행에 얽힌 얘기는 발굴되는 곳도 있었지만 얘기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이 많아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큰절에는 전해오는지 모르지만 암자는 기록 연한이 너무 짧은 것이 맹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선방서 결계도 하고 방함록도 작성하고 있으니 그것이나마 후대에 잘 전해지도록 종단이나 사찰 차원에서도 기록에 대한 방침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합니다.”
- 지난해 8월 시작한 ‘성철스님과 나의 법연을 말하다’는 기획연재는 무비스님부터 흥교스님에 이르기까지 14분을 찾아가 스님께서 직접 진행한 기획대담이었는데요….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이 45년 전 일이다보니 당시 법문을 직접 들었던 분들이 이제는 제방의 어른 스님들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착안했습니다. 그때 백일법문 들었던 어른들을 찾아뵙고 해인사 선방에서 정진하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 그 때의 활발발한 정신을 후학들에게 들려주는 대담을 하면 의미가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진행하게 됐습니다.”
- 성철스님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은 없었는지요?
“저는 29살쯤 출가해 백련암 행자를 하면서 나날이 5분 대기조식으로 긴장을 못 풀고 살아서 그런지 우리스님은 바늘 들어갈 틈도 없이 엄격한 스님으로 보여 ‘자비’라는 말은 느끼지도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혜총스님 대담에서 보면 성철스님이 얼마나 장난기가 많고 재미있는 분입니까. 체구가 작다고 만만하게 보셨는지 씨름을 걸어 왔지만 혜총스님이 늘 이겼다고 하지 않습니까. 재밌게 하려고 져주며 꿀밤도 날리는 그런 모습은 우리 상좌들이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거든요. 또 혜국, 인각, 대원스님 등의 말씀을 들어 보면 법에 대해 물으면 그렇게 다정하게 가르쳐주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대원스님은 ‘능엄주’를 외우고서야 방부가 통과돼 함께 살 수 있었는데 법거량까지 해 주실 정도로 공부에 대해서만큼은 전혀 귀찮아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 특별히 잘못 전해진 것은 없었군요.
“오히려 제가 생각을 많이 바꿨지요. 공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엄격하지 않았구나, 수행에 대해서는 한 말씀이라도 더 해 주셨을 정도로 나름대로는 후학을 위해 애를 많이 쓰셨구나. 상좌로서 저는 그런 모습을 못 봤는데 대담을 해 주신 스님들을 뵈면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됐습니다.”
- 통합종단출범 50주년과 성철스님 탄신100주년을 겸한 ‘성철스님 일대기 특별전’은 지난해 3월8일부터 3개월간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진행돼 호평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긍정’ ‘고개 끄덕임’을 준 전시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철스님을 회고해보면 의식적으로 기록을 해놓으신 것 아닌가 할 정도로 역사의 고비마다 기록을 묘하게 남겨놓으셨어요. ‘봉암사의 꿈’은 일력(日曆) 뒤에 해 놓으셨는데 불이 지펴졌으면 끝이지 않습니까. 당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최소한의 자료는 신기하게도 남겨두셨기 때문에 전시회를 할 수 있었던 것이죠.”
- 당초 탄신100주년 및 열반 20주년 기념사업은 3개년 계획으로 구상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올해 마무리하는 해입니다.
“올해로 제가 백련암에 와서 산지 42년째입니다. 지난해 탄신100주년, 올해가 스님 떠나신지 20주년이 돼서 ‘시자 원택스님’도 훌훌 벗어버리는, 이제는 정말 ‘성철스님 짐’을 벗고 자유로운 상태의 ‘무심한 사람’이 되도록 생활을 정리하는 계기로 삼아야지 하는 마음도 컸습니다. 그런데 탄신100주년, 열반20주년 사업한다고 오늘에 도달해보니 ‘나는 스님을 위해서 다했다, 스님을 위한 일을 다 마쳤다’기 보다는 뻐끔한 게 너무 많아 보여 오히려 ‘채워야 할 게 더 많구나’ 하는 생각에 후회만 하고 말 것 같습니다. (스님은 올해 우리나이로 일흔) 어떤 점에서는 끝이 있다고 하는 발상 자체가 어쩌면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일을 서둘러 마치고 싶은 조급증이었던가 보다 생각해봅니다.”
- 다른 스님들은 얘기했어도 정작 시자로서 스님의 ‘은사와의 법연’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백련(암)에 와서 스님을 떠나지 못하고 40여 년 동안 ‘성철스님 시자’로서 사는 근본이 무엇일까 생각해봤습니다. 시자로서 오늘도 짐지고 사는 근본이유는 ‘확실히 우리스님은 보통사람이 갖고 있지 않은 무언가 큰 힘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도(道)라 해도 좋고 우리가 못 깨친 깨달음을 갖고 있는 것이라 해도 좋다. 틀림없이 스님은 범인(凡人)이 갖고 있지 못한 높은 정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님 생전에 그 힘을 받고 싶어서 ‘저한테 살짝 지름길을 가르쳐 줄 수 있지 않습니까?’ 물었을 때 스님이 ‘이 자식, 미쳤나? 그런 길 없지는 않지만 그것은 도둑놈에게 칼 쥐어 주는 격이야. 알아도 못 가르쳐 줘’ 하시면서 호통치시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철스님을 모셨던 시자로서 말씀드릴 수 있다면 ‘산중어른 스님들은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큰 정신세계를 갖고 계시니 의심하지 말고 그 길을 열심히 따라갈 뿐이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수행의 바른 길’이라는 것입니다.”
원택스님은…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친구를 따라 찾아간 해인사 백련암에서 성철스님을 만났다. 만 번의 절을 하고 ‘속이지 마라’는 좌우명을 겨우 받고 실망해 돌아왔지만 이 후 다시 찾아갔을 때 ‘니 고마 중 되라’는 한마디에 출가했다. 1972년이다. 혹독한 행자생활을 거쳐 계를 받고 성철스님 곁에서 20여 년, 또 스님을 떠나보내고 20여년 이렇게 40여 년 동안 성철스님을 시봉하며 살고 있다. 스님은 조계종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불교신문 2895호/2013년 3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