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위대한 스승 성철 큰스님은 불자들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큰스님께서 이렇듯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받는 데는 어떤 점이 있어서인가를 도반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크게 5가지로 의견들이 모아졌습니다. 첫째는 종교적인 천재성, 둘째는 진실성, 셋째는 철저성, 넷째는 청빈성 그리고 다섯째는 정법주의입니다.
큰스님은 청소년 때부터 우주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사색하고 이 문제에 관한 동서고금의 양서(良書)를 탐독했습니다. 출가이후에도 철저한 수행으로 불교의 진리를 깨닫고 불교를 현대학문의 최첨단 이론으로 입증하여 현대인들이 불교의 진리성을 믿을 수 있게 했습니다.
두 번째 말한 진실성은 불교수행의 궁극 목적인 깨달음의 문제에 대한 큰스님의 수행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만큼 깨달음의 문제를 진실하게 천착한 분은 안 계실 겁니다. 큰스님은 ‘구경각’만이 완전한 깨달음이기 때문에 도중에 아는 지견이나 중간에 체험한 경지를 갖고 깨달음으로 착각하여 도인노릇하지 말고 진실하게 수행하라고 준엄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셋째의 철저성은 한번 정한 원칙을 철저히 지키신 것을 말합니다. 큰스님은 ‘스스로에게 엄격하신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계(戒)를 철저히 지니신 것이나 눕지 않고 참선수행하는 장좌불와, 절 문밖을 나가지 않는 동구불출(洞口不出) 등은 당신의 철저성을 일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청빈성은 당신이 말씀하신 ‘도를 공부하는 사람은 먼저 가난한 것부터 배워야 한다(學道先須學貧)’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평생을 청빈으로 사신 당신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으로 남아있지 않습니까? 정법주의(正法主義), 이 말은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말로서 큰스님을 일컫는 대명사처럼 되어 있습니다.”
학창시절에 (성철)큰스님을 만나 평생을 올곧은 수행자로 사는 지환(至歡)스님. 성철스님의 직계 상좌가 아니면서도 그 어느 직계 못지않게 큰스님의 사랑과 기대를 받으며 살아온 스님이다. 조계종 기본선원장 지환스님은 “큰스님이 내게 주신 은혜는 분골쇄신이라도 다 갚을 수 없다(粉骨碎身未足酬)”고 한다.
‘뼈가 가루되고 몸이 부서져도 다 갚을 수 없다’는 증도가의 한 구절 ‘분골쇄신미족수’를 들먹이면서 성철 큰스님을 회고하는 지환스님. 스님은 좀 더 오래토록 성철스님을 곁에서 모시면서 더 많은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스님 곁을 일찍 떠났다는 회한을 ‘나의 박복함과 어리석음’으로 표현한다. 그러면서도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는 모두가 큰스님의 은혜’라고 한다.
대담 : 원택스님(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 대학생 시절에 큰스님을 뵈었다고 들었습니다.
“예, 성철 큰스님을 처음 친견한 것은 대학 1학년 때의 이른 봄이었습니다. 당시 큰스님은 경북 문경 김룡사(金龍寺)에 주석하고 계셨습니다. 나는 서울 뚝섬 봉은사에 설립된 ‘대학생수도원’에 들어가려할 때입니다.
대학생수도원에는 이미 박성배 교수를 지도교수로 선배 몇 명이 있었습니다. 수도원생이면 모두가 하루 3000배씩 1주일을 해야 했습니다. 나도 성철스님께 가서 1주일을 하루 3000배씩 하기로 하고 김룡사에 갔지요.
큰스님을 뵈었을 때의 가장 인상적인 점은 큰스님께서는 내게 몇마디 질문하셨고 나는 주눅 들지 않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룸비니불교학생회에서 활동하면서 당대 고승이신 청담.관응스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눈 밝은 스승 만나야 깨달음의 길로 바로
들어설 수 있다고 하죠? 저에겐 큰 복입니다
그러기에 성철 큰스님 앞에서도 또박또박 대답을 한 것 같습니다. 겉으로 무섭게 보이는 큰스님이지만 내가 드린 질문에는 자상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큰스님 법문을 듣는 동안 현대물리학, 위상수학, 심층심리학 등 현대학문에 박학강람하신 데 놀랐습니다.
나는 감격해서 ‘스님, 산중에 계시는 스님께서 어떻게 현대학문을 그렇게 많이 알고 계십니까?’ 하니 ‘예끼, 이놈, 네깐 놈이 뭘 안다고…’ 하시며 크게 웃으셨습니다. 3주 예참기도를 마치고 대학생수도원 생활을 하면서도 머릿속에는 출가하고 싶은 생각이 자꾸 일어났습니다.”
- 해인총림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2학기 때 건강이 좋지 않아 휴학하고 김룡사에 가서 공양주를 했습니다. 큰스님이 김룡사를 떠나 해인사로 가셔서 해인총림 방장으로 백일법문을 하시던 1967년 겨울 나도 그때 큰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 무렵, 큰스님께 화두를 간택 받겠다고 간청하여 참선수행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모든 수행이 다 그렇지만 특히 선수행을 하는 데는 눈 밝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깨달음의 길로 바로 들어설 수 있고 정각(正覺)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 스승을 만난 것이 나에게는 큰 복이었습니다.
1980년 10·27법난 당시 종단개혁방안 말씀하시며
‘정리해 오라~’ 해 비상종단 책임자에 전해…
공부를 하다가 어려움이 있을 때면 큰스님께 갔습니다. 큰스님 방에 들어가 무릎 꿇고 앉아서 큰스님을 뵙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고 몇 말씀을 들으면 그 순간 내 마음은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되었습니다.
수행도중 아랫배가 아파서 한동안 고생할 때였습니다. 큰스님은 이를 보고 ‘좌선하다 찬 기운이 몸에 들어와서 그런 거다. 기와를 가져다가 군불 땔 때 구워서 수건으로 여러 겹 감싸가지고 아랫배에 대거라. 그러면 배가 따뜻해져서 그 증세가 나을 거다’하시며 처방해주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이처럼 자상하셨습니다.”
- 큰스님 모시면서 기억나는 것 또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이른바 ‘10.27법난’이 있을 때입니다. 1980년이었지요. 법난 이후 교단의 정화와 중흥을 위해 비상종단이 수좌 스님을 중심으로 꾸려졌을 때입니다. 그 어느 날 큰스님께서 나를 찾으셨습니다.
종단개혁방안을 말씀하시면서 ‘내 말을 문장으로 정리해서 갖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밤새 끙끙거리면서 큰스님 말씀을 정리하여 다음 날 아침에 보여드렸더니 ‘그런대로 됐다. 비상종단 책임자에게 갖다 줘라’ 하셨지요.”
뭘 알았다는 지견에 빠지면 화두에 대한 의심되지 않아
공부에 ‘간단’ 있으면 향상 없다 하다말면 퇴보하기 쉽다는 말씀
뼛속 깊이 사무치게 다가옵니다
- 공부에 대한 문답을 하신 것이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어느 땐가 정진이 잘 되었습니다. 만법유식(萬法唯識)의 도리와 법계가 곧 나라는 걸 홀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큰스님께 달려가 자랑했더니 ‘야, 이놈아! 아직 멀었어. 뭘 알았다는 지견(知見)에 빠지면 화두에 대한 의심이 되지 않아. 그게 큰 병통이야. 오매일여가 되고 내 외명철(內外明徹)이 되어 확철대오 할 때까지 화두 의심을 간절하게 해야 해. 이 멍청아!’ ‘공부에 간단(間斷)이 있으면 향상이 없다. 하다 말다 하면 오히려 퇴보하기 쉽다’고 고구정녕이 일러주신 큰스님 말씀이 뼈 속 깊이 사무치게 느껴졌습니다.
‘이 공부는 참되게 제대로 안 해서 안 되는 것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큰스님의 말씀은 언제나 내 마음 속 깊이 박혀있습니다.”
“계의 중요성을 알고 철저히 지계(持戒)하라. 고독을 극복하고 인욕과 부동심(不動心)의 자세를 갖추어라. 경론(經論)에만 의지하지 말고 내 마음속의 보배를 개발하라. 사량분별(思量分別)을 경계하라. 중생의 불성(佛性)을 확신하고 자기를 믿어라. 지견병(知見炳)에 빠지지 말고 스스로 실답게 참구해서 바로 깨쳐라.”
성철 큰스님이 일러주신 말씀을 평생 간직하고 수행자의 길을 가는 지환스님. 스님은 성철 큰스님의 어느 말씀보다 ‘영원한 대자유, 영원한 대원행과 일체중생을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버린다’는 서원을 챙긴다고 한다.
조계종 기본선원장 지환스님이 원택스님(오른쪽)과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촬영을 해 주석처인 동화사 기본선원 앞에 섰다.
■ 지환스님은…
서울고등학교 1학년 때 룸비니불교학생회에 들어가 불교에 입문하였고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 시절 성철스님을 만나 법문을 듣고 발심하여 1967년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1969년 광덕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뒤 한때 월간 <불광>과 불광법회에서 은사 스님의 포교불사를 도와드렸고, 해인총림선원 성철스님 회상과 백양사 운문암 서옹스님 회상 등 제방선원에서 참선 정진했다. 2002년부터 현재까지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조실 진제스님(조계종 종정예하)을 모시고 참선수행 중이다.
[불교신문 2857호/ 10월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