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바람이 쌀쌀한데 어찌 이리 밖에 나와 계십니까?” “아, 올 시간이 되었는데 와 안 오나 해서 나와 보았지요. 자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지난 10월31일 오후. 종진스님을 뵈러 해인사 율원으로 가던 날, 그 유명한 가야산의 단풍도 시들어 가던 때였다. 늦가을 오후라서 햇살은 그리 따사롭지 않았고 바람이 차가웠다. 종진스님은 율원 앞문에서 우리 일행을 그렇게 맞아들였다.
당신이 쓰는 방안에 들어서자 가사부터 수하고 좌정했다. 성철 큰스님을 처음 뵌 이야기부터 당신의 학인시절, 파계사 성전암에서 성철 큰스님께 화두 받은 이야기, 해인사 강주 시절, 성철 큰스님의 ‘백일법문’ 이야기, 해인사 율주를 맡기까지의 이야기 등 지난 반세기 동안 성철스님과의 법연을 말씀하는 종진스님. 스님은 감회가 깊은 여러 이야기들을 특유의 맑고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차근차근 일러주셨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일평생 선(禪)의 근본을 세우고 계승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신 어른입니다. ‘화두를 들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다’라고 늘 상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또한 당신께서는 수행자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셨습니다. ‘봉암사 결사’ 시절의 ‘공주규약’에서 출가수행자의 정신을 알 수 있습니다.
스님다운 스님으로 살 것을 강조하셨고 당신이 평생토록 귀감을 보였습니다. 수행자는 본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 특히 참선하는 수좌들은 깨어있어야 한다는 말씀은 곧바로 당신이 다른 말로 하신 ‘자기를 바로 봅시다’로 요약된다고 하겠습니다.”
15세에 출가하여 평생토록 올곧은 출가수행자의 길을 가는 종진스님. 스님은 경학.참선수행.율장의 깊은 뜻을 익히고 체득하여 후학과 신도들에게 쉽고 자상하게 일러주고 있다. 율사이자 대강백인 종진스님은 작은 체구에 맑은 미소를 간직한 포근한 어른이다. 그러나 후학들에게 부처님 계율을 일깨우고 경책하실 때는 그 어느 선지식보다 냉엄하고 날카롭기 그지없는 분이다.
■ 대담 : 원택스님(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 성철 큰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가 50년이 넘었다고 했는데 그러면 큰스님이 성전암에 계실 때가 아닙니까?
“그렇지요. 큰스님께서는 그때 우리가 요즘 행하고 있는 <능엄주>와 108배를 정리해서 일과로 삼으셨지요. 그때 나는 동화사 강원(승가대학)에서 공부할 때입니다. 능엄주 출간 소식을 듣고 큰스님이 계시는 성전암에 갔지요. 1961년이니까 지금부터 51년 전이군요.
세월 참 빠르네요. 큰스님께 예를 올리고 삼천 배를 했지요. 밖에서 듣기와는 다르게 큰스님에 대한 첫 느낌은 온화하고 편안함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엄하다고 하는데….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도 잊히지 않습니다.”
- 큰스님에게서 화두를 받으셨다면서요.
“1962년 김천 청암사에서 동안거를 끝내고 도성스님(부산 태종사 회주)께서 큰스님 뵈러 가자고 해서 성전암에 또 갔어요. 삼천 배를 하라 해서 했지요. 60대 초반의 노보살도 와 있어서 함께 했습니다. 오후에 시작하여 밤을 새고 아침에서야 끝냈지요. 큰스님 방에 들어가 화두를 받았습니다.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이었어요. 이 화두에 대해 깊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 해인사 강원에서 수학하셨다는데요.
“그해 해인사로 갔지요. 강원 치문반에서 공부했는데 그 윗반에서 하는 <서장(書狀)>을 청강하면 안 되겠느냐고 강주(지관)스님께 말씀드렸더니 그리 하라 하셔서 사집반 공부도 함께 했어요. 강원에서는 월반하여 1년 반 만에 사교.대교를 다 거쳤지요. 1963년 하안거 때 졸업했습니다.”
51년 동화사 학인시절
‘능엄주’ 출간소식 듣고 성전암 찾아가 처음 봬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 화두 받고도
대도성취 못해 죄송한 마음…
- 성철 큰스님께서 스님께 불명(佛名)을 지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종진’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는데 1966년 봄 큰스님이 문경 김룡사에 계실 때 뵈러 갔었지요. 그때 은사 스님이 큰스님께 제 이름을 새로 지어주시면 좋겠다고 말씀드리니까 흔연히 응해주셨습니다. ‘반주(般舟)’라는 이름이었어요.
그런데 그 이름은 쓰지 않았습니다. 이름이 갖는 의미는 깊은 뜻이었는데 왠지 발음이 내 맘에 들지 않아서였지요. 노래에 곁들이는 음악도 반주이고 밥 먹으면서 술 한 잔 하는 것도 반주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그 뜻은 정말 깊으나 발음이 안 좋아서 그 이름은 한 번도 안 썼어요.”
- ‘백일법문’ 때 직접 들으셨습니까?
“1967년 여름 해인사에서 종회가 열리고 해인사에 총림을 설치하는 법이 통과되었지요. 성철 큰스님이 해인총림 방장에 추대되었지요. 그해 동안거 때 전국의 수좌들이 방이 비좁을 정도로 많이 모였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법문 요약을 미리 인쇄하여 청법대중 스님께 나눠 주셨습니다.
당시에는 등사원지에 철필로 긁어 등사잉크로 한 장 한 장 프린트 할 때입니다. 큰스님의 원고를 원공스님.태정스님이 밤새 철필로 옮겨 쓰고 인쇄를 했지요. 원공스님은 큰스님의 상좌로 인쇄뿐만 아니라 법문의 녹음도 맡았어요. 큰스님 법문하시는 법상 앞에 녹음기를 놓고 법문을 모두 녹음했어요. 지금 CD로, 책으로 나온 <백일법문>은 그때의 녹음을 원택스님이 그대로 옮겨 펴낸 것이지요.”
- 그 후 해인사에 계속 머무르셨습니까?
“1968년 해인총림 수좌로 계셨던 석암(錫岩) 큰스님이 해인사에 오기 전에 주석하던 부산 선암사로 가실 때 나도 선암사로 갔습니다. 1970년 가을 지관(智冠, 전 총무원장)스님이 선암사에 들러 ‘내가 해인사 주지서리 임명장을 받았다. 해인사 강원을 맡아 달라’고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직도 공부를 더해야 합니다’라고 사양했지요.
석암 큰스님께서 ‘공부를 가르쳐 주신 스승이 직접 와서 청을 하는데 사양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 단 석 달을 하더라도 거절해서는 안 된다. 어른에 대한 대접이 아니다’라고 하셨어요. 해인사 강주를 맡으면서 성철 큰스님을 또 모시게 되었지요. 하루는 방장(성철)스님이 찾으신다기에 방장실에 갔어요. 방장 스님은 요즘 학인들이 잘 지낸다고 들었다면서 ‘강주가 학인을 잘 지도해서 그런 거지’ 하셨어요.”
‘선문정로’ ‘본지풍광’ 출간 후
원택스님이 주관하에 ‘선림고경총서’도 나와
이러한 조사어록 출간은 전에 없었던 획기적 불사
‘선’에 대한 이해·수행지침 일깨우려는 강한 의지…
- 해인율원은 언제부터 맡으셨습니까? 스님께서 율원을 맡게 된 저간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1985년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해인총림에는 일타 큰스님이 주지로, 무관스님이 강주로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진주 연화사에 있었어요. 무관스님이 내게 와서 ‘어른 스님께서 스님더러 율원을 맡으라 하시니 가십시다’ 하는데도 사양했습니다. 무관스님은 그 이후에도 나를 찾아와서 같은 이야기를 했지요. 그래서 해인율원에 오게 되었습니다.”
- 큰스님과 함께 살면서 큰스님에 대한 기억이 많으실텐데요.
“큰스님은 선문어록 강설을 많이 하셨지요. 방장을 맡기 이전부터 선객(禪客)에게 <증도가>를 익히라는 권유를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일타 큰스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해인사 백련암에 가서 큰스님과 대화할 때 큰스님께 물었답니다. 어떤 책을 보면 공부에 도움이 되겠느냐고. 큰스님은 <육조단경>은 근본이고 <신심명> <증도가> <돈오입도요문론> 등을 말씀하셨답니다.
또한 영명 연수 선사의 <주심부(註心賦)> <종경록(宗鏡錄)> 등을 공부하라고 하셨답니다. 어느 때인가 나는 큰절 경학원 앞에서 방장 스님께 조사어록 출간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그 후 <선문정로> <본지풍광> 두 저서를 내시고 원택스님이 주관한 <선림고경총서>도 나왔지요.
이러한 조사어록 출간은 여태까지 없었던 획기적인 불사입니다. 선(禪)에 대한 바른 이해와 수행지침을 일깨우려는 성철 큰스님의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봅니다.”
- 스님께서는 ‘나는 성철스님께 죄스러운 게 두 가지 있다’고 하셨다는데….
“화두를 받고서도 선방에서 열심히 정진해서 대도를 성취하지 못한 것이 그 하나요, 이름을 주셨는데 ‘반주삼매’를 성취하지 못하여 큰스님 기대에 못 따른 점이 그것입니다.”
- 큰스님 ‘임종게’에 대한 말씀은?
“임종게 첫 구절의 ‘생평(生平)’이 ‘생년(生年)’으로 잘못 표기된 것을 바로 잡아 보도자료로 배포한 것 말이지요. ‘생평’과 ‘생년’을 한자로 흘려 쓰면 ‘平’과 ‘年’이 같은 자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두 말은 다릅니다. ‘생평’이라 써야 옳고 큰스님께서도 그리 쓰셨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기억에 남습니다.”
원택스님(왼쪽)과 대담을 마친 종진스님(오른쪽)이 해인총림 율주 처소 앞에서 못 다한 ‘성철스님과의 법연’ 이야기를 이어가며 환하게 웃고 있다.
■ 종진스님은…
1940년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 1955년 대구 동화사에서 석우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1961년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63년 해인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 1970년 지관스님으로부터 강맥(講脈), 1985년 일우스님으로부터 계맥(戒脈)을 이어받았다. 1970년부터 1989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해인총림 강주를 역임하고 1985~1998년 해인총림 율원장, 1999~2004년 파계사 영산율원 율주를 거쳐 지금은 해인총림 율주를 맡고 있다.
[불교신문 2867호/ 11월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