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큰스님께서는 선(禪)에서 이야기하는 견성(見性)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확실히 일러주신 선지식입니다. 참선수행이 대각(大覺)의 첩경임을 평생 주창하시고 구경각이 견성임을 바르게 일러주셨습니다.
선방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화두를 잡고 수행한다 해도 견성이 무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한 채 정진하는 후학들에게 참선수행의 바른 길, 정로(正路)를 확실히 인식시켜 주셨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당신의 이런 가르침을 <선문정로(禪門正路)>라는 저서로 내보이셨지요.
근.현대 우리 불교계에 큰 획을 그은 분입니다. 임제.덕산스님의 번갯불 같고 천둥치는 것 같은 선기(禪機)를 드러내셨지요. 나는 성철 큰스님께서 보인 그런 선기는 임제.덕산보다 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참선수행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깊이 느끼고 출가 전 이미 선(禪)의 오묘한 경지를 체득하셨기에 한평생 선의 바른 길을 일깨워 주실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김룡사서 일주일 만에
능엄주 외우고 3000배하고 입방
의문나면 묻다 야단도 맞아
기특하게 여기신 것 같아
충남 공주 학림사(鶴林寺) 오등선원(五燈禪院) 조실 대원(大元)스님. 1956년 14세에 출가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참선수행으로 일관해온 대원스님은 스스로 참선수행의 오묘한 이치를 체득, 옛 절터에 선원을 창건하여 후학들을 매섭게 다그치고 있다.
학림사는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514번지에 자리잡고 있다. 계룡산의 장군봉과 제석봉, 임금봉 등이 주위를 장엄하고 있는 지석골이라 불리는 터에 대가람을 세웠다. ‘지석골’은 사투리로 ‘제석골’을 일컫는다고 한다. 불교의 제석천(帝釋天)에서 따온 이름으로 조선중기까지 이곳에 제석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대원스님은 1986년 이 옛 절터에 가람을 일으켜 참선수행을 널리 펴고 있다. 전국 선방에서 유일하게 한 철 100일 동안 용맹정진하는 선원으로 유명하다. 장군같이 우람한 체구에 부리부리한 눈이 만나는 상대를 압도하지만 말씀을 하실 때 자상하고 환한 웃음이 인상적이다.
■ 대담 : 원택스님(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 정말 큰 불사를 이루셨습니다. 건물이 지하와 1ㆍ2층 대단한 선방인데 현재 한국 선원 중 가장 큰 대중방인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 이처럼 대가람을 일군 저간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걸망 메고 제방 선원을 찾아 수행할 때입니다. 불국사를 떠나 가을날 이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등산하는 기분으로 왔는데 잠깐 쉬면서 주변을 돌아보니 경관이 수려하고 아늑한 곳이라 참 좋았어요. ‘여기에 토굴을 차리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지요. 다른 스님에게도 그렇게 말했지요. ‘이곳에 토굴 하나 차리면 괜찮겠다’고. 그러나 다른 스님들은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어요….
그러고 말았는데 공주 갑사(甲寺)에서 정진할 때입니다. 비몽사몽간에 웬 노스님을 만났어요. 그 노스님이 ‘그 터에는 아무나 사는 게 아니지. 토굴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내가 보기엔 스님이 인연이 있는데…. 생각만 내면 될 건데…’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같이 가보자고 해요.
그 터야말로 공부인(工夫人)이 살 곳이라고. 그래서 ‘내가 누구신지 존함이라도 일러 주십시오’ 하니까 ‘이름은 알아서 뭐하나. 그저 도선이라고만 알게’라고 하셨어요. 그러고서 잠이 깼지요. 충청도 땅에 아는 사람도 없고 이곳도 처음 와 보는 곳인데 지금처럼 이런 가람을 여기 세울 줄 알았겠어요? 처음엔 그저 자그마한 토굴이면 족하다고 했는데 이제는 총 560여 평의 큰 건물이 되었네요. 허허.”
학림사는 또한 1만여 평의 부지도 확보했다고 한다. 선방은 원래는 스님 위주로 운영했다가 세월의 변화에 따라, 선의 대중화를 위해 사부대중에게 입장의 문호를 개방했다고 한다. 해마다 전국에서 이곳 선원을 찾는 불자들이 늘고 있단다.
‘화두에 대한 답’은
‘만들어서 되는 게 아니다’ 강조
어느 날 목욕하다 거울 보는 순간
그 말씀에 계합…‘오매일여 됐다’고
말씀드리면서 게송 읊었더니
- 성철 큰스님을 처음 뵌 때는 언제입니까?
“큰스님께서 문경 김룡사에 계실 때지요. 오대산 전강스님 회상에서 정진하고 김룡사를 찾았어요. 큰스님께 화두를 받으려면 3000배를 해야 한다, ‘능엄주’를 일주일 안에 다 외워야 입방할 수 있다하여 웬만한 사람은 모두 도로 가버린다는 말이 있었어요.
당시 김룡사에 가려면 점촌에서도 근 40리가량 걸어가야 했어요. 버스가 있긴 했어도 하루 한 두 번인가 다닐 때였지요.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마침 버스가 왔어요. 차 안에 두 분 스님이 타고 있는데 동진스님과 현경스님이었지요.
동진스님은 김룡사에서 교무를, 현경스님(입적, 전 해인사 주지)은 재무를 맡았지요. 두 스님과 김룡사에 닿으니 마침 큰스님께서 방갓을 쓰고 지팡이 짚고 내려오시더군요. 첫 눈에 보아도 그 기걸 찬 기풍이 드러나셨어요. ‘저 분이 성철 큰스님인가 보다’ 했지요.
큰스님은 나를 보고서도 아무 말 없이 그냥 올라가셨어요. 나는 당신을 따라가는데 그 위풍당당한 기(氣)가 느껴졌어요. 천하를 누르는 듯 고고한 기상이었지요. 김룡사에 가서는 일주일에 능엄주를 외고 3000배하고 입방했어요.”
‘그나마 오매일여와 씨름하고
자기 목소리로 그런 말할 줄 아는 놈은 너 뿐이다…
언제나 오매일여도 다함이 아니니
열심히 화두와 씨름하라 그러면 이룰 날 있다’ 하셨죠
‘선문정로’가 나오고 나서는 ‘견성했다’는 이들 쑥 들어가
- 김룡사 사실 때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큰스님께서는 법당 왼쪽 개울 건너에 있는 명부전 옆의 작은 방에 계셨어요. 당시 나는 선방에 앉아 있다가도 문득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큰스님께 갔습니다. 다른 스님에게 같이 가자니까 아무나 가지 못한다고 그래요. 주장자 맞고 쫓겨나기 일쑤라고.
어느 날 오후 입선(入禪)했다가 큰스님께 갔어요. ‘누구야? 들어와!’ 하시는데 그 위풍에 가슴이 꽉 막히는 듯 했어요. 묻기는 물어야 하는 데 입이 안 떨어져요. 멀뚱히 서서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일러 주십시오’ 하니까 ‘니 와 서 있어? 앉아서 물어’ 하셨어요.
‘앉고 서는 데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하니 ‘니 아직 모른다. 나가라’ 하셨어요. 그 후 또 갔지요. ‘조사서래의…’ 했지요. ‘이 멍청아 아직도 못 알아들었어?’ 하십디다.
그 때 나는 ‘아, 처음에 알아차리지 못한 내 허물이 크구나. 그 때 알았어야 했는데…’라고 생각했어요. 그 후에도 생각이 떠오르면 큰스님 방에 갔지요. 그런 나를 큰스님께서는 기특하게 여기신 것 같았어요.”
- 김룡사 이후에는 큰스님을 뵙지 않으셨습니까?
“아니요. 1970년 고암 큰스님이 해인총림 방장으로 계실 때 해인사 선방에 갔습니다. 그러면서 성철 큰스님이 다시 방장으로 오셨을 때 뵈었어요. 큰스님은 조사전에 계셨어요. 그때도 김룡사 시절처럼 불쑥불쑥 큰스님께 가서 의문나는 점을 묻고 큰스님께 야단도 맞고 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언제나 오매일여(寤寐一如)도 다함이 아니니 화두를 주야장천(晝夜長川) 놓지 말고 열심히 화두와 씨름하라. 그러면 이룰 날 있다고 하셨지요. 큰스님께서는 화두에 대한 답은 ‘만들어서 되는 게 아니다’라는 걸 강조하셨지요.
어느 날 목욕하다 거울을 보는 순간 그 말씀에 계합되었어요. ‘오매일여 되었다’고 큰스님께 말씀드리면서 게송을 읊었더니 큰스님께서는 ‘그나마라도 오매일여와 씨름하고 자기 목소리로 그런 말 할 줄 아는 놈은 너 뿐이다’ 하셨어요. 그러시면서 ‘누구한데 입실한 데 있느냐’고 하시기에 ‘고암스님입니다’ 하니 ‘그래? 그라도 내하고 함께 살자’ 하셨어요.”
- 몽중일여(夢中一如)는 묻지 않으시고 바로 오매일여를 말씀하셨습니까?
“큰스님께서는 그때 오매일여만 물으셨어요.”
- <선문정로>에 대해 잠깐 말씀하셨는데….
“내가 처음 절에 갔을 때는 견성했다는 사람 많았어요. 그런데 큰스님의 <선문정로>가 나오고 나서는 그 사람들 견성했다는 소리 쑥 들어갔어요.”
- 오등선원에는 입방 대중 모두가 100일 동안 용맹정진 한다는데 참 희유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모두가 조실 스님의 크나큰 법력이라 그렇지 않겠습니까? 조실 스님의 법력으로 이번 동안거에도 눈 푸른 납자가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말씀 참으로 고맙습니다.
의문나는 것을 묻고 가르침을 받던 시절 성철스님 이야기를 하며 환하게 웃는 오등선원 조실 대원스님(왼쪽)과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택스님. 사진=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기획팀장
■ 대원스님은…
1942년 경북 상주 출생. 1956년 상주 남장사로 출가하여 1958년 고암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1962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66~1986년 당대 선지식인 효봉, 금오, 고암, 전강, 경봉, 성철스님 등을 참방, 21년간 정진을 가열차게 했다. 1986년 고암 대종사의 법을 이어받았다. 옛 제석사 터에 학림사를 창건. 1995년 오등선원을 개원하고 조실로 추대됐다. 2001년 오등시민선원 개원, 선(禪)의 대중화에 진력. 2010년 대한불교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 수석대표를 맡기도 했다.
[불교신문 2871호/ 12월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