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책소개
“우리 시대의 부처님”으로 칭송받는 성철(性徹, 1912-1993) 큰스님은 생시에 “『대지도론』과 『조론』을 통해 반야의 공사상과 중관사상을 이해해야 선(禪) 사상의 정수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강조하신 바 있다. 이에 백련불교문화재단에서는 성철 대종사 열반 30주기를 맞아 추모 학술사업의 일환으로 『조론오가해』를 도서출판 장경각(대표·원택圓澤 스님)을 통해 출간하였다.‘조론선집肇論善集’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이 책은 전6권 1질로 구성된 것으로 『조론』에 대한 역주와 연구논문을 묶은 『조론연구肇論硏究』 1권과 『조론』에 대한 대표적인 논서 5편에 대한 역주를 묶은 『조론오가해肇論五家解』(전5권)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소개
* 북경대학 철학과에서 북송北宋 선학禪學사상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취득.* 중국 중앙민족대학 티베트학연구원에서 티베트불교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 『불교미술기행』[이가서. 2005], 『다르마로드』[상·하. 랜덤하우스중앙(주). 2005] 등의 저서와 「『바세』 5종 필사본에 보이는 ‘김 화상 기록’ 비교 연구」, 「「조론서」 연구」, 「「물불천론」 연구」 등 우리말·티베트어·중국어로 쓴 다수의 논문이 있다.
최근작 : <조론연구 조론오가해 세트 - 전6권>,<다르마로드 2>,<다르마로드 1> … 총 4종
목차
제1권. 조론연구제2권. 조론소-조론오가해 1
제3권. 조론소-조론오가해 2
제4권. 조론중오집해-조론오가해 3
제5권. 조론신소-조론오가해 4
제6권. 조론락주-조론오가해 5
책속으로
▣ 중국불교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조론』 주석에 대한 최초 완역▣ 수많은 주석서 중 각 시대를 대표하는 5종의 주석서에 대한 역주
▣ 교감 표점 등의 작업 거쳐 역주, 풍부하고 상세한 각주도 주목
▣ 각 책의 「해제」와 함께 읽으면 중국불교 흐름 파악할 수 있어
성철대종사 열반 30주기 추모 학술사업
“우리 시대의 부처님”으로 칭송받는 성철(性徹, 1912-1993) 큰스님은 생시에 “『대지도론』과 『조론』을 통해 반야의 공사상과 중관사상을 이해해야 선(禪) 사상의 정수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강조하신 바 있다. 이에 백련불교문화재단에서는 성철 대종사 열반 30주기를 맞아 추모 학술사업의 일환으로 『조론오가해』를 도서출판 장경각(대표·원택圓澤 스님)을 통해 출간하였다. ‘조론선집肇論善集’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이 책은 전6권 1질로 구성된 것으로 『조론』에 대한 역주와 연구논문을 묶은 『조론연구肇論硏究』 1권과 『조론』에 대한 대표적인 논서 5편에 대한 역주를 묶은 『조론오가해肇論五家解』(전5권)로 구성되어 있다.
반야 중관사상의 요체를 담은 승조 스님의 논서
1. 후진後秦시대(384-417)를 살았던 승조(僧肇, 384-414) 스님이 반야·중관사상의 요체를 설명하고자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 「부진공론不眞空論」, 「물불천론物不遷論」,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 등을 지었고, 그 이후의 어느 때 사람들이 이 글들과 동진(東晉, 317-420)의 유유민(劉遺民, ?-410) 거사가 쓴 「유유민 거사의 질문편지」와 이에 대해 승조 스님이 대답한 「승조 스님의 답변편지」 등을 묶어 편찬한 책이 바로 『조론』이다. 승조 스님의 이름인 ‘조肇’자와 이치를 논의한 글이라는 의미의 ‘논論’자를 결합해 『조론』이라 불렀다. 승조 스님이 지은 논문의 묶음이라는 뜻이다. 1061년 찬술된 『조론집해령모초肇論集解令模鈔』에 “당나라(618-907)부터 북송 때까지 출간된 『조론』 주석서는 20여 종이나 됐다[始自有唐終於炎宋, 疏鈔注解二十餘家].”는 기록이 있을 만큼 『조론』은 주목받는 중요한 저서였다.
2. 현존하는 『조론』 주석서들 가운데 남조南朝 진나라(陳, 557-589)의 혜달惠達 스님이 지은 『조론소肇論疏』 3권(하권 결락), 당나라(唐, 618-907)의 원강元康 스님이 627-649년 찬술한 『조론소肇論疏』 3권, 북송(北宋, 960-1127)의 비사(秘思, 994-1056) 스님이 1053년 강술한 내용을 토대로 북송의 정원(淨源, 1011-1088) 스님이 1058년 집해集解한 『조론중오집해肇論中吳集解』 3권, 원나라(元, 1271-1368)의 문재(文才, 1241-1302) 스님이 저술한 『조론신소肇論新疏』 3권, 명나라(明, 1368-1644)의 감산 덕청(憨山德清, 1546-1623) 스님이 1616년 짓고 1617년 출간한 『조론략주肇論略注』 6권 등 각 시대를 대표하는 다섯 부의 책을 선택해 역주한 것이 바로 『조론오가해』이다.
3. 각 시대를 대표하는 스님 다섯 분이 주석한 책들을 모았다는 의미에서 ‘오가해五家解’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론오가해』 가운데 『조론략주』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번에 처음으로 번역됐다. 일본어나 영어 그리고 현대 중국어로도 옮겨진 적이 없다. 여기에 『조론』을 연구·분석하고 『조론』 본문을 주해注解한 내용을 담은 『조론연구』를 보탠 것이 전6권 1질의 ‘조론선집肇論善集’이다.
4. 1. ‘조론선집肇論善集’ 각 권의 내용
5. * 제1권 『조론연구』: 중국불교의 토대를 다진 『조론』의 내용을 분석하고 역주譯注한 책이다. ‘연구 편’과 ‘역주 편’으로 구성됐으며 ‘연구 편’에는 『조론』을 연구한 논문들이, ‘역주 편’에는 『조론』 본문에 대한 우리말 번역이 각각 들어있다. 신국판 양장 432쪽, 4만원.
6.
7. * 제2권 『조론소』: 『조론오가해』 1. 진나라의 혜달 스님이 찬술한 현존 최고最古의 조론 주석서이다 오래된 책이라 문장도 어렵고 필사과정에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뒤섞인 단락[錯簡]’도 있다. 위진남북조시대(220-589)의 중국불교에 나타났던 열반학파, 성실학파, 섭론학파, 지론학파 등과 관련된 내용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위진남북조시대의 불교를 연구할 때 반드시 읽어야 될 책으로 평가된다. 신국판 양장 488쪽, 5만원.
8.
9. * 제3권 『조론소』: 『조론오가해』 2. 당나라의 원강 스님이 삼론학三論學의 입장에서 저술한 책으로 『조론』에 대한 현존 최고最高의 주석서로 평가된다. 중국 고전과 훈고학 서적 등에서 인용한 내용과 불교의 경전과 논서의 내용을 인용해 설명한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이 책에 인용된 문헌 가운데에는 현존하지 않는 책들도 있다. 신국판 양장 528쪽, 5만원.
10.
11. * 제4권 『조론중오집해』: 『조론오가해』 3. 북송의 비사 스님이 강설하고 정원 스님이 집해한, 송대宋代를 대표하는 조론 주석서이다. 분량은 혜달 스님의 『조론소』나 원강 스님의 『조론소』에 비해 적은 편이나 압축된 설명이 특히 돋보이는 책이다. 신국판 양장 428쪽, 5만원.
12.
13. * 제5권 『조론신소』: 『조론오가해』 4. 원나라 문재 스님이 기술記述한, 원대元代를 대표하는 『조론』 주석서이다. 방대한 내전內典과 교리에 근거해 『조론』을 풀어낸 솜씨가 탁월하다. 훌륭한 책이기에 ‘상당한 인내심’과 ‘정교한 사고력’을 갖고 도전해야 된다. 역주자는 다섯 권의 주석서 가운데 굳이 한 권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한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 신국판 양장 600쪽, 6만원.
14.
15. * 제6권 『조론략주』: 『조론오가해』 5. 감산 스님이 본인의 수행경험을 바탕으로 찬술한 책으로 명대明代를 대표하는 조론 주석서이다. 간략한 말 속에 풍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조론』을 보다 쉽게 설명한 점도 돋보인다. 신국판 양장 476쪽, 5만원.
16. 2. ‘조론선집肇論善集’의 주요 특징
17. * 현존하는 각 권들의 여러 판본들을 비교·교감校勘했고, 표점標點을 모두 찍었으며, 이를 토대로 역주譯注했다.
18. * 주석서들이 탄생된 그 시대의 불교적·정치적·문화적 배경을 알 수 있도록 상세하게 설명한 「해제」를 각 권의 앞부분에 붙여 놓았다.
19. * 자세한 설명이 포함된 각주를 달아 보다 쉽게 이해하도록 했다.
20. * 『조론』 본문과 주석서에 있는 내內·외전外典의 인용문들의 출처와 근거를 확인했다.
21. * 제1권 『조론연구』에 수록되어 있는 「공空사상, 현학玄學 그리고 『조론』」이라는 글과 『조론오가해』 각 책의 앞부분에 있는 「해제解題」를 함께 읽으면 중국불교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22.
3. 『조론』은 어떤 책인가
후진시대(後秦. 384-417)를 살았던 승조(僧肇. 384-414) 스님이 저술한 『조론肇論』은 중국불교 역사상 중요한 전적典籍 가운데 하나이다. 승조 스님이 지은 「물불천론物不遷論」, 「부진공론不眞空論」,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 「종본의」와 「열반무명론」이 승조 스님 본인의 저작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갈린다.
등과 동진(東晉, 317-420)의 유유민(劉遺民, ?-410) 거사가 쓴 「유유민 거사의 편지」와 이에 대해 승조 스님이 답변한 「승조 스님의 답신」 등을 하나로 엮어 편찬된 책이 바로 『조론』이다. 승조 스님의 이름 가운데 ‘조肇’와 이치를 논의한 글이라는 의미의 ‘논論’자를 묶어 『조론』이라 불렀다. 승조 스님이 지은 논문의 묶음이라는 의미이다.
인도불교 중관파의 개조 용수(대략 150-250) 논사와 서역 쿠처[庫車. 구자국] 출신의 명승名僧 구마라집(鳩摩羅什. 343-413) 스님의 반야·중관사상을 계승한 승조 스님은 『조론』으로 삼론종三論宗 개창에 사상적인 길을 제공했고, 인도사상과 중국사상의 교류 및 범어梵語와 중국어의 회통에 새로운 모범을 보였다. 『조론』은 중국사상사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실재론實在論적인 노장철학의 무無·유有개념으로 유학儒學을 새롭게 해석하며 형이상학적인 논의를 진행하던 위진현학魏晉玄學의 물줄기를 성공性空을 통해 공空·유有를 탐구하는 수당불학隋唐佛學으로 돌리는 인도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초기까지 활동했던 운서주굉(雲棲袾宏, 1535-1615), 자백진가(紫柏眞可, 1543-1603), 감산덕청(憨山德淸, 1546-1623), 우익지욱(蕅益智旭, 1599-1655) 등 4대 고승 가운데 한 명인 우익지욱藕益智旭 스님은 각종 경전과 논서들을 열람하고 지은 『열장지진閱藏知津』에서 “중국에서 찬술된 저서 가운데 승조 스님, 남악혜사 스님, 천태지의 스님 등의 것이 유일하게 순일하고 순일하다. 진실로 인도의 마명 논사, 용수 논사, 무착 논사, 세친 논사 등의 저술에 비해도 부끄럽지 않다. 그래서 특별히 대승종론에 포함시켰다. 나머지 여러 스님들의 저작들은 순일한 맛은 있으나 흠이 있기에 다만 잡장에 넣었다.” “此土述作, 唯肇公及南嶽、天台二師, 醇乎其醇, 真不愧馬鳴、龍樹、無著、天親, 故特收入大乘宗論. 其餘諸師, 或未免大醇小疵, 僅可入雜藏中.” [明]智旭撰·楊之峰點校(2015), 『閱藏知津』, 北京: 中華書局, p.5.
며 승조 스님을 인도의 마명·용수 논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기록했다.
중국의 정사正史 이십사사二十四史 가운데 종교에 관한 기록이 있는 『위서魏書』 권114 「지제誌第 20·석노지釋老誌」에도 구마라집 스님과 승조 스님을 높이 평가하는 기록이 있다.
“그 때 후진의 요흥 왕은 구마라집 스님을 존경했다. 장안 초당사에 교리를 연구하는 사문 8백여 명을 소집해 경문을 새로이 번역시켰다. 구마라집 스님은 총명하고 또한 깊은 사상이 있었다. 인도와 중국 등 여러 나라의 말에 능통했다. 당시 사문 도융·승략·도항·도표·승조·담영 등은 구마라집 스님과 서로 상의하고 탁마하며 부처님 가르침의 깊은 뜻을 밝혔다. … 도융 스님 등은 모두 학식이 대단히 넓고 깊었다. 그 가운데서도 승조 스님은 특히 뛰어났다. 구마라집 스님이 글을 쓰고 경전을 번역할 때 항상 승조 스님이 붓을 잡고 기록했으며 여러 단어와 문장의 뜻을 확정했다. 『유마경』을 주석한 『주유마경注維摩經』 등 (승조 스님의) 저술이 수십 여 종에 이른다. 저술들에 절묘한 의미가 담겼기에, 불법을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이 전부 승조 스님을 스승으로 존경했다.” “是時, 鳩摩羅什爲姚興所敬, 於長安草堂寺集義學沙門八百人, 重譯經本. 羅什聰辯有淵思, 達東西方言. 時沙門道肜、僧略、道恒、道檦、僧肇、曇影等, 與羅什共相提挈, 發明幽致. 諸深大經論十有餘部, 更定章句, 辭義通明, 至今沙門共所祖習. 道肜等皆識學洽通, 僧肇尤爲其最. 羅什之撰譯, 僧肇常執筆, 定諸辭義, 注《維摩經》, 又著數論, 皆有妙旨, 學者宗之.” [北齊]魏收撰(1999), 『簡體字本二十四史20 魏書』, 北京: 中華書局, p.2015.
역사서가 출가자에게 이처럼 높은 평가를 내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중국불교사에서 승조 스님이 차지하는 위치가 그만큼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4. 구마라집 스님은 누구인가
모든 사람들이 스승으로 존경했다는 승조 스님에게 반야·중관사상을 정확히 가르쳐 준 구마라집 스님은 401년 12월20일 후진(後秦, 384-417)의 수도 장안[長安, 현재의 서안西安]에 도착한 뒤 ‘국가적인 후원’과 ‘조직화 된 역경譯經팀’ 등을 두 축으로 삼아 체계적인 경전 번역에 착수했다. 장안에 도착하기 전 머물렀던 감숙성 고장姑藏 지금의 중국 감숙성甘肅省 무위武威 시市이다.
엔 불법佛法을 전파할 여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고승전』 권제2 「구마라집전」에 보이는 “구마라집 스님이 양주에 체류한 지 여러 해, 여광呂光과 아들 여찬呂纂이 불법을 홍포하지 않았다. 불교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갖고도 가르침을 펴고 교화할 수 없었다.” “什停凉積年, 呂光父子旣不弘道, 故蘊其宗海, 無所宣化.” [南朝梁]慧皎撰·湯用彤校注(1992), 『高僧傳』, 北京: 中華書局, p.51.
는 기록에서 정황을 알 수 있다.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는 탁월한 학승인 그가 고장에 머무른 데는 사정이 있었다.
서기 382년 전진(前秦, 350-394)의 부견(苻坚. 338-357-385) 『삼국사기』 권제18에 따르면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우리나라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해준 왕이기도 하다.
왕은 장군 여광呂光을 서역에 파견했다. 이미 사해四海에 이름이 쟁쟁한 명승 구마라집 스님을 구자龜玆국에서 장안으로 모셔오기 위해서였다. 서역 여러 나라의 조공을 받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구마라집 스님을 데려오자는 계획은 도안(道安, 312-385) 스님의 건의에 따른 조치였다. 『고승전』 「도안전」에 “도안 스님은 구마라집 스님이 서역에 있다는 소식을 먼저 들었다. 경론을 함께 강의하고 그 뜻을 토론하고 싶었다. 매번 부견 왕에게 구마라집 스님을 모셔올 것을 권했다.” “安先聞羅什在西國, 思共講析, 每勸堅取之.” [南朝梁]慧皎撰·湯用彤校注(1992), 『高僧傳』, 北京: 中華書局, p.184.
는 기록에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도안 스님이 건의하기 전에 부견 왕은 이미 구마라집 스님을 만날 생각이 있었다. 『고승전』 「구마라집전」에 보이는 “전진 건원 13년[377] 정축년 정월에 태사가 아뢰었다. ‘정축년 정월의 별자리와 상응하는 외국의 어느 곳에 별이 나타났습니다. 필시 덕이 높은 지혜로운 분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보좌하게 될 것입니다.’ 부견 왕이 말했다. ‘짐이 들으니 서역에 구마라집 스님이, 양양에 도안 스님이라는 분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들이 아니겠는가?’ 즉시 사신을 파견해 그들을 찾게 했다.” “至符堅建元十三年歲次丁丑正月, 太史奏云: ‘有星見於外國分野, 當有大德智人入輔中國.’ 堅曰: ‘朕聞西域有鳩摩羅什, 襄陽有沙門釋道安, 將非此耶.’ 即遣使求之.” [南朝梁]慧皎撰·湯用彤校注(1992), 『高僧傳』, 北京: 中華書局, p.49.
는 구절이 이를 증명한다. 전진前秦의 10만 대군이 양양을 공략하고 68세의 도안을 장안으로 데려간 것이 379년, 부견 왕은 377년에 이미 구마라집 스님과 도안 스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도안 스님의 건의가 없었더라도 언젠가는 구마라집 스님을 장안으로 초치招致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383년 8월 안휘성 비수淝水 부근에서 벌어진 동진과의 전투에서 부견 왕의 87만 대군이 대패하고 말았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비수대전이 끝난 후 2년만인 385년 8월 부하였던 강족羌族 요장姚苌이 부견을 살해하고 그의 나라마저 위협했다. 결국 저족氐族 부홍(苻洪, 285-350-350)이 350년 장안에 건립한 전진은 394년 역사에서 사라진 반면 부견 왕의 신하였던 선비족鮮卑族 모용수慕容垂는 지금의 하북성 정현定縣에서 후연(後燕, 384-407)을, 요장은 장안에서 후진(後秦, 384-417)을 각각 세웠다.
서역을 떠나 장안으로 향하던 여광(呂光, 338-386-399)은 감숙성 양주凉州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그곳에서 자립해 후량(後凉, 386-403)을 세우고 장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구마라집 스님이 장안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여광이 죽은 후 서자庶子 여찬(呂纂. ?-399-401)이 형제 여소呂紹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계승했어도 열리지 않았다. 후진의 2대 왕 요흥(姚興, 366-394-416)이 여찬을 격퇴하기까지 무려 15년 동안 구마라집 스님은 양주에서 중국의 말과 문자를 배우며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장안에 온 구마라집 스님은 401년부터 405년까지 요흥 왕의 별장격인 궁사[宮寺, 소요원逍遙園]에 머물렀다. 406년부터 413년까지는 초당사[草堂寺, 대석사大石寺·대사大寺라고도 함]에 주석했다. 장안에 도착한 구마라집 스님을 요흥은 어떻게 대우했을까? 『자치통감資治通鑑』 권 제114 「진기晉紀 36」에 당시 상황을 전해주는 기록이 있다.
“후진 왕 요흥은 구마라집 스님을 국사로 삼아 마치 신을 섬기듯 존경했다. 친히 대신들 및 스님들과 함께 구마라집 스님의 경전 강의를 들었다. 또한 서역에서 들어온 경전과 논서 3백여 권을 번역해 줄 것을 구마라집 스님에게 요청했다. 대량의 탑과 절을 지었으며 그 곳에서 수행하는 출가자의 수가 항상 천 명 이상을 웃돌았다. 조정의 대소신료들도 모두 불교를 믿었다. 이로 인해 모든 지방에 불교를 믿는 분위기가 퍼졌으며 열에 아홉은 불교를 믿었다.” “秦王興以鳩摩羅什爲國師, 奉之如神, 親帥群臣及沙門聽羅什講佛經, 又命羅什飜譯經、論三百餘卷, 大營塔寺, 沙門坐禪者常以千數. 公卿以下皆奉佛, 由是州郡化之, 事佛者十室而九.” [北宋]司馬光編撰·何建章等校注(1998), 『資治通鑑新注』第4冊, 西安: 陝西人民出版社, p.3812.
5. 승조 스님은 어떤 사람인가
구마라집 스님이 후진에 들어오기 전인 384년 장張씨 성을 가진 장안의 한 빈한한 집에 아이가 태어났다. 바로 승조 스님이다. 출가 전의 승조 스님은 생계를 위해 다른 사람을 대신해 글을 써주는 일을 했다. 책을 베껴 써 주는 일을 하다 여러 경서들을 두루 읽었다. 그는 특히 노장사상과 관련된 서적에 관심이 많았다. 일찍이 『노자』를 읽은 뒤 “(내용이) 좋기는 하나 정신이 머무르고 세속의 번뇌를 털어내는 방법이 되기에는 오히려 부족함이 있다.”고 탄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삼국시대(220-280) 손권이 세운 오나라(吳, 222-280)에서 활동한 지겸支謙 거사가 번역한 『불설유마힐경』을 읽고는 머리로 그 책을 받들며 기뻐했다. 그리곤 “비로소 귀의할 곳을 찾았다.”며 출가했다.
타고난 총명으로 대승의 여러 경전과 율장·논장을 두루 섭렵했고, 20세쯤엔 이미 관중지방[지금의 서안 일대]에 이름을 드날렸다. 명성이 높아지자 시기심 많고 논쟁을 좋아하는 무리들이 양식까지 짊어지고 찾아와 도전했다. 그러나 승조 스님의 예리한 논변에 상대방이 격퇴되는 것이 정해진 결론이었고, 승조 스님의 명성을 올려주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이었다. 후일 구마라집 스님이 고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스스로 찾아가 그를 스승으로 모셨고, 구마라집 스님 또한 승조 스님을 지극히 아꼈다. 그러다 401년 스승을 따라 다시 고향 장안으로 돌아왔다. [南朝梁]慧皎撰·湯用彤校注(1992), 『高僧傳』, 北京: 中華書局, pp.248-249.
당시 구마라집 스님 밑에서 공부하기 위해 몰려든 문도는 3천여 명. 그들 가운데 입실한 사람은 오직 8명 정도였다. 나이 많은 사람 중에서는 도융(道融. 372-445) 스님과 승예(僧叡) 스님, 젊은 사람 사이에서는 도생(道生. 365-434) 스님과 승조 스님이 으뜸이었다. 「中論序疏」(T42, 1a), “什至長安, 因從請業. 門徒三千, 入室唯八, 睿為首領. 文云: ‘老則融睿, 少則生肇.’”
이들을 ‘구마라집 스님 문하의 사대 제자[什門四聖]’로 부르기도 한다. 구마라집 스님은 이들과 함께 401년부터 413년까지 양과 질에 있어서 그 누구도 따라오기 힘든 방대한 역경譯經 작업을 진행했다. 당연히 구마라집 스님의 역경에 승조 스님도 참여했다. 『고승전』 권제6 「승조전」에 “요흥 왕은 승조 스님과 승예 스님에게 소요원에 들어가 구마라집 스님을 도와 경론을 자세히 가다듬도록 시켰다.” “姚興命肇與僧叡等, 入逍遙園, 助詳定經論.” [南朝梁]慧皎撰·湯用彤校注(1992), 『高僧傳』, 北京: 中華書局, p.249.
는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경사업을 통해 반야·중관사상을 비롯한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들이 중국인들에게 명료하게 소개됐다.
흉노凶奴·갈羯·선비鮮卑·저氐·강羌 등 다섯 민족이 번갈아 십육국을 세웠다는 십육국시대(304-439)에 주로 활약했던 육가칠종[六家七宗. 반야사상에 대한 이해 방식이 서로 달랐던 일곱 개의 학파]에 소속된 학승·학자들이 대체적으로 ‘도가道家의 실재론적인 무無와 비슷한 그 무엇’으로 개념·내용을 오해했던 공空사상은 이때서야 비로소 ‘그 얽힘’을 풀고 나올 수 있을 정도였다. 구마라집 스님의 역경사업은 나아가 불교의 핵심적인 몇 가지 교의敎義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제공해 중국불교의 전성기인 수당불학 형성에 지적 토대를 마련해 준 것으로 평가된다.
6. 승조 스님은 정말 사형을 당했을까
『경덕전등록』 권제27 「제방잡거징염대별어諸方雜舉徵拈代別語」에 승조 스님이 요흥 왕으로부터 사형을 언도받고 집행되기 직전에 지었다는 게송, 즉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고 오온은 본래 공하다. 칼날이 머리를 베어 떨어트리는 것은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다[四大元無主, 五陰本來空. 將頭臨白刃, 猶似斬春風].”는 이른바 ‘임종게臨終偈’ 『景德傳燈錄』(T51, 434b1), “僧肇法師遭秦主難, 臨就刑說偈曰: ‘四大元無主, 五陰本來空. 將頭臨白刃, 猶似斬春風.’”
가 실려 있다. 정말 승조 스님이 지은 것일까? 청나라(清, 1636-1911) 세종 옹정제(雍正帝, 1678-1722-1735)는 『어선어록御選語錄』 권제1 「대지원정성승조법사론大智圓正聖僧肇法師論」에서 승조 스님의 게송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전등록』에 ‘승조 스님은 요흥 왕에게 사형을 언도받았다. 승조 스님은 7일의 휴가[假]를 얻어 『보장론』 집필을 마쳤다.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고 오온은 본래 공하다. 칼날이 머리를 베어 떨어트리는 것은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다.”는 게송을 읊었다’고 나온다. 이 게송은 결코 승조 스님이 지은 것이 아니다. 승조 스님은 구마라집 스님의 뛰어난 제자로 요흥 왕의 명령을 받고 소요원에 들어가 구마라집 스님이 경전과 논서의 내용을 세심하게 살펴 확정하는 것을 도왔다. 요흥 왕은 승조 스님을 특별히 존경하고 예우했다. 『십육국춘추』 「승조전」에 ‘후진 홍시 16년 장안에서 입적했다. 동진 의희 10년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물며 형벌을 받을 사람에게 휴가를 주어 『보장론』을 짓도록 할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즉 승조 스님은 상서롭게 입적했음이 틀림없다. 사형을 당했다는 점이 이미 없는 사실이므로 게송은 결코 승조 스님이 지은 것이 아니다.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御選語錄』(WX68, 526a13), “《傳燈錄》載, 僧肇在姚秦問大辟, 師乞七日假, 著《寶藏論》畢, 臨刑時說偈曰: ‘四大元無主, 五陰本來空. 將頭臨白刃, 猶似斬春風.’ 然此偈非肇所作也. 肇為鳩摩羅什高弟, 秦王姚興命入逍遙園, 助什詳定經論, 尊禮有加. 《十六國春秋》「僧肇傳」云: ‘以姚秦弘始十六年卒於長安, 時晉義熈十年也.’ 況典刑之人豈有給假著《論》之理? 則肇法師之以吉祥滅度, 信矣. 事既子虗, 偈非師作, 蓋訛傳焉.”
게송은 승조 스님의 친작이 아니라는 것이 옹정제의 생각이다. 탕용통(湯用彤, 1893-1964) 역시 『한위양진남북조불교사』 제10장 「승조략전僧肇略傳」에서 “『경덕전등록』 제27권에 ‘승조 스님이 요흥 왕에게 사형을 당할 때 게송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 이전에 이런 말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게송의 단어도 속되고 천박해 필히 정확한 것이 아니다.” 湯用彤著(1997), 『漢魏兩晉南北朝佛敎史』,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pp.231-232.
며 옹정제의 주장에 동조했다. 일본학자 마키타 타이료(牧田諦亮, 1912-2011)도 「『조론肇論』의 유전流傳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이 게송은) 선가禪家에서 사실과 다르게 전해진 것 같다.” 牧田諦亮(1955), 「肇論の流傳について」, 『肇論硏究』, 京都: 法藏館, p.276.
고 지적했다.
특히 『고승전』 권제6 「승조전」에 “당시 승조 스님이 (요흥 왕으로부터) 받은 존경이 이와 같았다.” “其爲時所重如此.” [南朝梁]慧皎撰·湯用彤校注(1992), 『高僧傳』, 北京: 中華書局, p.252.
는 구절이 있는데 “승조 스님이 요흥 왕으로부터 사형을 언도받았다.”는 『경덕전등록』의 기록은 「승조전」의 이 내용과도 어긋난다. 게다가 게송에 사용된 단어와 그 내용이 『조론』의 유려하고 화려한 문체文體나 심오한 내용에 비해 상당히 거칠고 정제되지 못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위작僞作이거나 잘못 전해진 게송偈頌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7. 『조론』을 무엇 때문에 썼을까
404년 구마라집 스님이 『대품반야경[마하반야바라밀경]』 번역을 마무리했다. 역경에 참여했던 승조 스님은 ‘마음으로 체득한 반야사상에 대한 견해’와 ‘스승으로부터 배운 학식學識’을 바탕으로 유명한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을 지어 구마라집 스님에게 읽어보기를 요청했다. 글을 본 구마라집 스님이 승조 스님에게 “불교경전에 대한 이해와 해설은 내가 그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지만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내가 자네 보다 못하다.” “吾解不謝子, 辭當相揖.” [南朝梁]慧皎撰·湯用彤校注(1992), 『高僧傳』, 北京:中華書局, p.249.
며 높이 칭찬했다. 또한 “공사상을 제일 잘 이해한 사람은 승조 스님이다.” 「肇論序」(WX54, 31a17), “解空第一, 肇公其人.” 길장(吉藏, 549-623) 스님이 지은 『정명현론淨名玄論』 권제6 「제일성가문第一性假門」[T38, 892a19]과 「백론서소百論序疏」[T42, 232a9] 등에도 있다.
고 구마라집 스님이 말 한 데서도 반야·중관사상에 대한 승조 스님의 이해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승조 스님의 학우學友인 축도생 스님이 408년 여름 「반야무지론」을 여산의 혜원(慧遠. 334-416) 스님과 유유민 거사 등에게 전달했다. 「般若無知論」(J20, 265a10), “去年夏末, 始見生上人示「無知論」.”
이를 읽은 유유민 거사는 “스님 가운데 뜻밖에도 평숙平叔 “평숙은 하안何晏의 자. 후한말의 대장군 하진의 손자로 190년 즈음 태어난 하안은 후일 조조의 사위가 된다. 노장사상으로 유학을 새롭게 해석해 “천하 만물은 무를 근본으로 한다[天下萬物, 以無爲本].”고 주장하며 왕필과 함께 위진현학의 한 파인 귀무파貴無派를 창도하는데 앞장섰다. 249년 고평릉사변高平陵事變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사마의(司馬懿, 179-251)에게 살해됐다.
이 있을 줄이야!” “不意方袍, 復有平叔.” [南朝梁]慧皎撰·湯用彤校注(1992), 『高僧傳』, 北京: 中華書局, p.249.
라며 감탄했고, 혜원 스님은 “(이런 글은) 일찍이 없었다!” “未常有也.” [南朝梁]慧皎撰·湯用彤校注(1992), 『高僧傳』, 北京:中華書局, p.249.
며 찬탄을 연발했다.
스승이 칭찬했던 「반야무지론」에 이어 410년 즈음엔 「부진공론不眞空論」과 「물불천론物不遷論」을 잇따라 발표했다. 413년 스승 구마라집 스님이 타계한 그 해 승조 스님은 마지막 작품으로 보이는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을 지었다. 네 편의 글들을 통해 승조 스님은 인도의 반야·중관사상을 중국에 정확하게 알리고 소개했다. 동시에 공사상을 잘못 이해한 기존 학설들의 단점을 지적해 동시대인과 후대인들에게 불교사상 이해의 큰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구마라집 스님의 열반을 애도한 글 「구마라집법사뢰鳩摩羅什法師誄」 구마라집 스님의 열반을 애도한 「구마라집법사뢰鳩摩羅什法師誄」라는 제목의 문장도 현존한다. 이 글은 『광홍명집』 권23에 수록돼 있지만 승조 스님의 친작親作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승조 스님이 저자로 되어 있는 『보장론寶藏論』이라는 제목의 저서도 현존하나 이 책은 위작僞作으로 보는 것이 중론衆論이다. 『보장론寶藏論』이 위작僞作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들을 참조하라. 湯用彤(1997), 『漢魏兩晉南北朝佛敎史』,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pp.233-234; 鎌田茂雄(1965), 『中國華嚴思想史の硏究』,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pp.375-401.
도 현존한다.
승조 스님은 무엇을 말하고자 『조론』을 썼을까? 감산 덕청 스님은 『조론략주肇論略注』에서 “「물불천론」은 속제에 합당하고 「부진공론」은 진제에 적합하며 속제·진제인 이제는 객체인 보여 지는 대상이 되고, 「반야(무지론)」는 주체인 관찰하는 마음이 된다. 「물불천론」·「부진공론」·「반야무지론」 등 세 편은 인因이 되고 「열반무명론」은 과果가 된다.” 『肇論略注』(WX54, 330c21), “「不遷」當俗, 「不真」當真, 二諦為所觀之境, 「般若」為能觀之心, 三「論」為因, 「涅槃」為果.”
; “앞의 「물불천론」과 「부진공론」은 속제와 진제가 둘 아닌 진리임을 밝혔다.” 『肇論略注』(WX54, 341c2), “以前「不遷」、「不真」二論, 以顯真俗不二之真諦.”
; “앞의 「물불천론」과 「부진공론」은 대상인 경境을 밝힌 것이고 「반야무지론」은 관찰하는 지혜를 설명한 글로 세 편 모두 원인[因]에 해당된다. 이들 원인에 대해 「열반무명론」은 결과[果]인 깨달음이 된다. 따라서 전체는 한 편의 논論이 된다.” 『肇論略注』(WX54, 352b11), “前「不遷」、「不真」為所觀之境, 「般若」為能觀之智, 三皆是因. 以此「涅槃」乃所證之果, 故以為論.”
고 설명했다.
속제·진제·지혜·열반, 즉 「물불천론」, 「부진공론」, 「반야무지론」, 「열반무명론」 등은 결국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반야·중관사상을 설명한 글이라 할 수 있다. 「물불천론」은 사물과 현상의 불거불래不去不來를 통해 중도中道·공空사상을 밝혔고, 「부진공론」은 비유비무非有非無라는 존재의 본성을 통해 연기·공·중도사상을 설명했으며, 「반야무지론」은 고요하나 (공성空性을) 인식하며 인식하나 고요한 반야의 특성을 드러내 반야에는 그릇되게 작용하거나 집착하는 지혜가 없음을 말했고, 「열반무명론」은 언어[言]·형상[象]·있음[有]·없음[無]으로는 태어나지도 않고[不生] 소멸되지도 않는[不滅] 열반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얻음 없음[無得]’으로 (열반을) ‘증득해야 됨[妙得]’을 천명했다.
그리하여 “그러면 깨달음은 멀리 있는가? 사물의 본성[空性]을 체득體得하는 그것이 바로 진리[中道]를 증득하는 것이다. 성스러움은 멀리 있는가? 중도를 체험하는 그것이 곧 신령스러움이다.” 「不眞空論」(T45, 153a4), “然則道遠乎哉? 觸事而真; 聖遠乎哉? 體之即神.”
며 존재에 내재된 공성을 증득하는 ‘바로 이것’이 깨달음이라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미륵보살이 열반을 증득하면 모든 중생도 열반을 증득한다.” 「涅槃無名論」(T45, 161b10), “若彌勒得滅度者, 一切眾生亦當滅度.”; 『維摩詰所說經』(卷上. T14, 542b17), “若彌勒得滅度者, 一切眾生亦應滅度.”
는 『유마힐소설경』 권상 「보살품 제4」에 나오는 구절이 현행본 「열반무명론」 단락 [55]에 인용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중생을 무한히 긍정하는 정신이 『조론』에 내포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조론』은 또한 후대 중국불교와 중국사상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위진남북조,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등 매 시기마다 『조론』을 주석한 책들이 나온 데서 이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의 불교학과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될 필독서가 『조론』이며, 고대와 중세 중국사상을 정확히 해독하기 위해서는 『조론』 독해讀解가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8. 『조론』의 여러 주석서들
『조론집해령모초肇論集解令模鈔』에 따르면 당나라부터 북송 때까지 출간된 『조론』 주석서는 20여 종이나 됐다. “始自有唐終於炎宋, 疏鈔注解二十餘家.” [北宋]淨源撰, 伊藤隆壽·林鳴宇校釋(2008), 『肇論集解令模鈔校釋』,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p.36.
물론 명나라 때 저술된 것도 적지 않다. 이들 가운데 위진남북조시대 남조 진나라(陳. 557-589)의 혜달惠達 스님이 지은 『조론소肇論疏』 3권, 당나라 원강元康 스님이 627-649년 찬술한 『조론소肇論疏』 3권, 북송(北宋, 960-1127)의 원의준식(圓義遵式. 1042-1103) 스님이 저술한 『주조론소注肇論疏』 천태종 출신의 학승 자운 준식(慈雲遵式, 964-1032) 스님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원의 준식 스님이 편찬한 책이다. 吉田剛(2000), 「宋代における『肇論』の受容形態について」, 『印度學佛敎學硏究』 第49卷第1號, pp.99-102.
6권, 북송의 비사(秘思. 994-1056) 스님이 1053년 즈음 강술한 내용을 토대로 북송의 정원(淨源. 1011-1088) 스님이 1058년 집해集解한 『조론중오집해肇論中吳集解』 3권, 정원 스님이 1061년 찬술한 『조론집해령모초肇論集解令模钞』 2권, 남송의 몽암夢庵 스님이 강술한 『몽암화상절석조론夢庵和尙節釋肇論』 2권, 원나라 문재(文才. 1241-1302) 스님이 저술한 『조론신소肇論新疏』 3권, 원나라 문재 스님이 주해注解한 『조론신소유인肇論新疏游刃』 3권, 명나라 감산 덕청(憨山德清. 1546-1623) 스님이 1616년 짓고 1617년 출간한 『조론략주肇論略注』 6권 등이 대표적이다.
이밖에 명나라 월천진징(月川鎭澄, 1547-1616) 스님이 1588년 발표한 『물불천정량론物不遷正量論』, 명나라 환거진계幻居眞界 스님이 1597년 저술한 『물불천론변해物不遷論辯解』, 명나라 도형道衡 스님이 1603년 찬술한 『물불천정량논증物不遷正量論證』, 명나라 용지환유(龍池幻有, 1549-1614) 스님이 저술한 『박어駁語』(1606년)·『성주석性住釋』(1606년)·『물불천제지物不遷題旨』 등 적지 않은 주석서들이 현존한다. 중국불교의 어느 시대에도 『조론』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지지 않았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6) 스님의 『종경록宗鏡錄』, 도원道原 스님이 1004년 편찬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만송행수(萬松行秀. 1166-1246) 스님의 『종용록從容錄』, 『분양무덕선사어록汾陽無德禪師語錄』, 『허당화상어록虛堂和尙語錄』 등에도 『조론』의 구절들이 인용되어 있다.
중국사상사와 중국철학의 발전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조론』은 위진현학의 종결終結이자 중국불교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저작” 湯一介著(2009), 『郭象與魏晉玄學』(第三版),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p.31; 張岱年主編(2014), 『中國哲學大辭典』(修訂本), 上海: 上海辭書出版社, p.155.
이라 할 수 있다. 당시 학술계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종합한 결과물이 바로 『조론』이라는 것이다. 하안(何晏, 190-249)과 왕필(王弼, 226-249)의 귀무론貴無論 현학, 완적(阮籍. 210-263)과 혜강(嵇康, 223-262)의 자연론自然論 현학, 배위(裵頠, 267-300)의 숭유론崇有論 현학과 곽상(郭象. 252-312)의 독화론獨化論 현학 등을 개괄해보면 이 점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현학사상과 『조론』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조론연구』(조병활 지음, 장경각, 2023)에 수록된 「空사상, 현학玄學 그리고 『조론』」을 참고하라.
9. 『조론』이 우리나라 불교에 끼친 영향
우리나라 불교도 『조론』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 권제4 「의해義解」편 ‘이혜동진二惠同塵’조에 『조론』이 등장한다. “혜공 스님이 일찍이 『조론』을 보고 ‘이것은 내가 옛날에 지은 것이다’고 말했다. 혜공 스님이 승조 스님의 후신임을 이로써 알 수 있다.” “(惠空)嘗見《肇論》曰: ‘是吾昔所撰也.’ 乃知僧肇之後有也.” 최광식·박대재(2009), 『점교點校 삼국유사三國遺事』, 서울: 고려대학교출판부, p.200.
는 문장이 그것이다. 원효(元曉, 617-686) 스님이 찬술한 『금강삼매경론』 권하 「총지품 제8」에는 「부진공론」의 마지막 구절, 즉 “승조 스님이 말한 것과 같다. ‘그러면 깨달음은 멀리 있는가? 사물의 본성[空性]을 체득體得하는 그것이 바로 진리[中道]를 증득하는 것이다. 성스러움은 멀리 있는가? 중도를 체험하는 그것이 곧 신령스러움이다.’” 『金剛三昧經論』(H1, 674b17), “如肇法師言: ‘道遠乎哉? 觸事而真; 聖遠乎哉? 體之即神矣.’” 현행본 「부진공론」 단락 [11]에 있는 구절이다.
는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조론』과 관련된 기록이 있는 또 다른 문헌은 고려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의 문집이다. 의천 스님은 1085년 5월 각종 불교서적을 구하고 화엄종·천태종 교학연찬을 위해 송나라에 들어갔다가 1086년 6월 귀국한 적이 있다. 당시 의천 스님은 송나라 화엄학의 중흥조로 평가받는 항주의 진수정원(晉水淨源. 1011-1088) 스님에게 화엄교학에 관해 물었다. 송대의 『조론』 주석서로 유명한 『조론중오집해肇論中吳集解』(전3권, 현존)를 집해集解하고 『조론집해령모초肇論集解令模钞』(전2권, 현존)와 『조론중오집해과肇論中吳集解科』(전1권) 등을 찬술한 바로 그 정원 스님이다.
귀국한 의천 스님은 정원 스님과 여러 번 편지를 교환했다. 이 글들이 『대각국사문집』과 『대각국사외집』에 남아 전한다. 그래서인지 의천 스님이 1090년 편찬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전3권. 1,010부 4,857권 수록) 권제3에 정원 스님이 펴낸 세 권의 『조론』 주석서를 포함해 적지 않은 『조론』 주석서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新編諸宗敎藏總錄』(H4, 695c4), “《肇論》一卷, 僧肇述. 《注》一卷, 亡名, 或云叡法師注待勘. 《夾科》二卷, 元康科. 《疏》三卷, 元康述. 《注》三卷, 光瑤注. 《注》三卷, 瑤等三注. 《注》三卷, 好直注. 《中吳集解》三卷<卷三第10張>, 《中吳集解科》一卷, 《令模鈔》二卷, 已上淨源述. 《寶藏論》一卷, 僧肇述. 《注》三卷, 法滋注.” 밑줄 친 부분이 정원 스님의 저서이다.
대부분 현존하지 않는 주석서들이다. 더욱이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권제20에 실려 있는 「해 좌주를 전송하며[送海座主]」라는 시의 제4구에 “강산이 비록 멀지만 마음이 계합되면 바로 이웃이 된다.”는 「반야무지론」 구절이 협주夾注로 부기附記되어 있다. 이 구절은 유유민 거사가 보낸 편지에 승조 스님이 답변하며 쓴 것이다. 원문은 “江山雖緬, 理契即隣.” J20, 265c8.
이지만 『대각국사문집』 권제20에는 “《肇論》云: ‘江山雖繞, 道契即隣.’” H4, 565b21.
으로 되어있다. 『금강삼매경론』, 『대각국사문집』, 『신편제종교장총록』, 『삼국유사』 등에 『조론』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는 점에서 신라시대 이래 해동의 불교인들도 이 책을 적지 않게 읽었음을 알 수 있다.
10. 『조론』 읽기·연구의 부수적인 효과
『조론』 읽기와 연구에서 가장 중요하고 긴요한 문제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조론』은 중국의 자생적인 사유체계인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았을까’가 하나이다. 한국·중국·일본의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하고 여기에 동의한다. ‘『조론』이 불교중국화의 출발점이 되는 저작인지’가 다른 하나이다. 중국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주장을 편다. 그들의 주장은 정확한 분석에 기반을 둔 것인가? 『조론』을 읽어가며 차분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삼국시대부터 십육국시대까지의 정치적인 상황, 사상적인 변천, 불교사적인 변화 등을 차례로 천착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사상도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형태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앞 시대와 동시대의 정치적·사상적·문화적 함의 속에서 탄생·성장·발전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조론』을 읽고 연구하는 것은 초기 중국불교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당시의 중국사상을 역동적이고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할 것이다.
두 번째, 초기 중국불교도들이 인도불교사상을 어떻게 이해했고, 어떤 방식으로 이를 받아들여 중국인 자신들의 사상으로 변화시켜 나갔는지를 입체적으로 밝힐 수 있다. 하나의 ‘외래 사상과 문화[A] A와 B는 필자가 편의상 붙인 것이다.
’가 ‘다른 문화권·언어권[B]’에 소개됐을 때 A가 B에 적응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귀중한 보기가 될 수 있다.
세 번째, 초기 중국불교의 변천과 그 궤적에 대한 연구는 중국사상의 다른 영역에도 적용할 수 있다. 중국불교와 유교·도교가 서로 습합習合되는 과정, 명대 이후 중국불교의 변용 등을 천착할 때 초기 중국불교, 특히 『조론』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네 번째, 각 시대별로 나타난 『조론』 주석서에 대한 연구를 통해 매 시기의 중국인들은 불교를 어떻게 이해했고, 중국사상사에서 불교의 위치를 어디쯤 설정했는지를 문헌자료를 통해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다섯 번째, 『조론』과 주석서 및 이와 관련된 사상의 흐름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는 중국불교사상의 역동적인 변화는 물론 20세기 이후 중국사상의 변동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하나의 모델·방법론을 제공할 수 있다.
머리말
- 『조론오가해肇論五家解』 출간을 축하하며 -이치에 맞게 말을 하면 듣는 사람이 기꺼이 믿고, 이치에 맞게 행동하면 보는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르며, 진리와 같이 하는 사람은 그 진리와 같아지고, 덕德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 덕과 같아지는 법이다. 그러나 따라 행하기 어려운 것으로 이치에 맞는 말과 행동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고, 같아지기 어려운 것으로 진리와 덕에 종사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도 없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크나큰 진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전해진 이래 무수한 현인들이 나타나 가르침을 풍부하게 하고 그 이치로 세상을 교화하고 메마른 대지를 윤택하게 했지만 그 가르침은 여전히 쉽게 잡히지 않고 귀에는 들리나 체득하기 어렵다. 진리와 이치가 훌륭하기는 하나 담백淡白하고 밋밋해 돌아보는 사람이 드물다. 뜻 높은 사람이 진리와 이치를 들으면 힘써 행하고 뜻이 중간 정도인 사람이 진리를 들으면 의심하고 뜻이 낮은 사람이 진리를 들으면 웃어버린다. 오직 뜻 높은 사람만이 담백함에 쌓인 제호醍醐의 맛을 음미吟味할 수 있다. 보물이 있는 곳에는 그것을 지키는 흉맹한 교룡蛟龍이 반드시 부근에 있다. 교룡을 제압하고 보배 그릇에 담긴 ‘감미로운 제호’를 맛보려면 ‘인연因緣이라는 복덕’과 ‘불퇴전不退轉의 정진精進’, ‘명석한 지혜’와 ‘원만한 방편方便’ 등을 갖춰야 된다. 위진남북조시대의 후진後秦에서 태어나 활동했던 승조 스님이 찬술한 ‘『조론』이라는 제호’를 음미하려해도 이 네 가지가 필요하다.
「물불천론」 「부진공론」 「반야무지론」 「열반무명론」 등 네 편에 담긴 제호의 맛은 다르면서 같고 같으면서 다르다. 동動과 정靜, 연기緣起와 공성空性, 비유非有와 비무非無, 가명假名과 중도中道, 속제俗諦와 진제眞諦, 반야般若와 열반涅槃, 본지本地와 수적垂迹, 자비慈悲와 지혜智慧 등 다양한 맛이 각각의 그릇에 가득하다. ‘이 글’을 읽으면 ‘저 글’이 떠오르고 ‘저 글’을 새기면 ‘이 글’이 되살아난다. ‘이 그릇의 음식’을 보면 ‘저 그릇의 음식’이 먹고 싶고 ‘저 그릇의 음식’을 먹으면 ‘이 그릇의 음식’이 뇌리에 스친다. 연리지連理枝처럼 결이 통하고 공명조共命鳥처럼 명命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 하나의 이치에 통하면 넷에 통하고 넷의 현리玄理에 통하면 불교의 오의奧義가 오롯이 파악된다. 유려한 문장과 생생한 표현으로 묘사된 「반야무지론」을 읽은 양자강 남북의 은사隱士와 현인賢人들이 “일찍이 이런 글은 없었다.”며 환호했다.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화성化城’이 그 안에 있고 형상으로 그리지 못하는 ‘보소寶所’가 글 속에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해가 쌓이면 이치는 전설이 되고 말과 글에는 먼지와 이끼가 겹겹이 쌓인다. ‘깨침의 바다’나 ‘지혜의 빛’은 언어로 묘사될 수 없으나 긴 잠에 빠져있는 중생을 깨워 제호의 냄새라도 맡게 하려면 말과 글에 의지해야 된다. 『조론』에 배어 있는 전설과 『조론』에 낀 이끼와 먼지를 걷어 내고자 적지 않은 현인들이 주석서를 쓴 것도 이 때문이다. 현존하는 여러 주석서 가운데 위진남북조시대 남조 진陳나라의 혜달惠達 스님이 지은 『조론소肇論疏』, 당나라의 원강元康 스님이 찬술한 『조론소肇論疏』, 북송의 비사秘思 스님이 강설講說하고 정원淨源 스님이 집해集解한 『조론중오집해肇論中吳集解』, 원나라의 문재文才 스님이 펴낸 『조론신소肇論新疏』, 명나라의 감산 스님이 기술記述한 『조론략주肇論略注』 등 다섯 권의 중요한 주석서가 『조론오가해肇論五家解』라는 이름으로 우리말로 번역되어 세상에 나왔다. 『조론략주』 이외의 네 권은 이번에 처음으로 옮겨졌다.
천리의 먼 길도 첫 걸음에서 여정旅程이 비롯되고 백층의 높은 건물도 첫 삽에서 건축이 시작된다. 『조론』이라는 보소寶所를 여는 ‘귀중한 열쇠’이자 불교의 오의처奧義處로 인도하는 ‘지남指南’과 같은 이 책들을 차근차근 읽다보면 언젠가는 먼지와 이끼가 걷혀지고 점차 진해져 오는 제호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번역을 위해 노력한 조병활 박사의 노고를 치하하며 경향京鄕의 현자들이 이 책에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내년은 마침 성철 대종사님의 열반 30주기가 된다. “우리 시대의 부처님”이신 성철 대종사님의 열반 30주기를 기념해 전6권의 『조론오가해』를 출간하게 된 것을 무엇보다 기쁘게 생각한다. 생전의 대종사께서는 『조론략주』를 읽으시곤 하셨는데 중국의 각 시대를 대표하는 다섯 종류의 『조론』 주석서들이 한꺼번에 번역·출간된 것을 보시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이놈아! 참선이나 잘해라!”는 가르침을 내리실까? 대종사께서 강설講說하신 적이 있는 분양 선소汾陽善昭 선사의 게송을 소개하며 『조론오가해』 출간에 거듭 찬사를 표한다.
三玄三要事難分, 삼현삼요의 일 분별하기 어려우나
得意忘言道易親. 뜻을 얻고 말을 잊으면 어렵지 않게 진리에 계합된다.
一句明明該萬象, 한 구절에 모든 모습이 분명하게 들어 있으니
重陽九日菊花新. 중양절에 핀 국화꽃이 싱그럽구나.
가야산 해인사 백련암에서
불기佛紀 2566(2022)년 6월
벽해 원택碧海圓澤 화남和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