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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조와 조론]
‘승조 시대’ 중국사상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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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검(조병활)  /  2018 년 8 월 [통권 제6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93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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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과 전쟁·전쟁과 분열이 끊이지 않았던 십육국 시대(304∼439)였지만 학문과 사상분야에선 어김없이 새로운 사조思潮가 나타나 이어지다 사라졌다. 승조(僧肇. 384∼414)와 『조론』의 사상은 당시 학술계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종합한 결과물이다. 중국철학 발전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조론』은 위진현학의 종결終結이자 중국불교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저작”이라 할 수 있다.

 

위진시대 주류사상 현원지학

 

주지하다시피 승조가 살았던 위진남북조시대의 주류 사상은 불학佛學이 아닌 현원지학玄遠之學 즉 현학玄學이었다. 현학은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고도 한다. 추상적인 개념과 사변思辨으로 경험세계를 넘어서는 유有·무無와 본本·말末(만물의 근원 즉 본체론本體論), 재능才能과 성질性質(인성人性 탐구), 일一과 다多(사회가 존재하는 근거), 성인聖人의 조건(이상적 인격) 등을 주요한 주제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위진남북조시대를 현학의 시기로 파악하는 것은 중국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선 이미 공인된 사실이다. 20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인 펑요우란(馮友蘭. 1895∼1990)은 「『중국철학사신편』서론」에서 “중국역사상 정치·경제·문화 등 각 방면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친 변화가 세 번 있었다. … 한 번은 고대; 한 번은 근대; 한 번은 현대에 일어났다. 춘추전국시대의 변화가 첫 번째; 봉건사회에서 半식민지·반半봉건사회로의 전환이 두 번째; 半식민지·반半봉건사회에서 사회주의로의 변화가 세 번째다. … 세 번의 변화를 중심으로 중국역사를 나누면 춘추전국시대 이전[고대古代]; 춘추전국시대 이후부터 봉건사회말기까지[중고中古]; 半식민지·반半봉건사회부터 신민주주의 혁명시기[근대近代];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시기[현대現代] 등이 그것이다. … 중고中古시대는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한과 후한; 위진남북조시대부터 수·당까지; 송·원·명·청시대 등이다.” 고 전제한 뒤 위진남북조의 중심철학을 현학, 수·당의 중심사상을 불학佛學으로 각각 규정하고 자신의 논지를 전개했다.

 

모우종산(毛宗三. 1909∼1995)도 『재성才性과 현리玄理』·『불성佛性과 반야般若』를 통해 현학은 위진남북조시대를, 불학은 수당시기를 대표하는 사상임을 밝혔다. 모우종산은 『불성과 반야』서문에서 “『재성과 현리』는 주로 위진남북조시대의 도가 현리玄理를 밝혔으며, 『심체心體와 성체性體』는 송·명의 유학을 해석한 것이며, 『불성과 반야』는 위진남북조·수·당의 불학을 조명한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런지위(任繼愈. 1916∼2009)가 중심이 되어 편찬한 『중국철학발전사』 역시 위진남북조시대의 주된 철학은 현학, 수당시기의 중심은 불학으로 파악했다. 라오쓰광(勞思光. 1927∼2012) 또한 『신편중국철학사』에서 현학과 불학을 각각 위진남북조시대와 수당시대의 주류 사상으로 보았다.

 

‘현학’이라는, 사상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 위진남북조시대를 대표하는 이 단어는 서진시기(265∼316)에 이미 사용됐다. 용례가 『진서晉書』권54 「육운전陸雲傳」에 보인다. 

 

“처음, 육운(262∼303)은 친구 집에 머물기 위해 길을 가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 길을 잃었다. 어느 곳인지 알지 못했다. 풀이 가득 우거진 곳에 불빛이 보였다. 불빛을 찾아가다 한 집에 도착 했다. 그 곳에서 한 소년을 만났다. 용모가 아름답고 거동에서 품격이 풍겨 나왔다. 함께 『노자老子』에 대해 토론했는데, 그의 말에는 심원한 의미가 들어 있었다. 날이 밝아오자 이별하고 십리쯤 걸어가 친구 집에 도착했다. 친구가 근처 십리 이내에 집이 없다고 말했다. 육운은 비로소 느끼는 바가 있었다. 어제 밤 머물렀던 곳을 찾으니 바로 왕필王弼의 무덤이었다. 육운은 본래 현학玄學을 공부하지 않았는데, 그 때부터 『노자』의 내용을 토론함에 대단한 성취가 있었다.”

 

「육운전」에서 보듯이 위진현학은 노장철학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현학을 ‘노장老莊 혹은 현종玄宗·현허玄虛의 학문’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남조 양梁나라 때부터 수隋나라까지 살았던 안지추(顔之推. 531∼591)가 지은 『안씨가훈』권제3 「면학勉學」제8에 주목할 만한 기록이 있다. 

 

“『노자』·『장자』는 대체로 참[眞]을 온전히 보존하고 근본 성품을 기르며, 외물이 자신을 옭아매는 것을 싫어하는 내용들이다. … 하안何晏과 왕필王弼은 이런 현학을 ‘근본적인 가르침[玄宗]’으로 삼아 이어가며 서로 과장하고 숭상했으며, ‘경치에 붙은 형체와 풀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景附草靡]’을 대하듯이 했다. 신농神濃씨와 황제黃帝의 교화가 모두 자신의 몸에 있다고 여겼으며,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버렸다. 그런데 하안은 조상曹爽과 무리를 짓다 (사마의에게) 살해 됐으니 이는 권세의 그물에 걸려 죽은 것이다. 왕필은 남 비웃기를 잘해 사람들이 그를 질시했으니 이는 남 이기기를 좋아하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 남조 양나라 때 이런 풍조가 다시 일어나 『장자』·『노자』·『주역』을 묶어 삼현이라 했다.”

 

안지추가 현학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보고 있음이 인용문에서 여과 없이 드러난다. 그의 기록에 나오는 현종玄宗은 노자·장자의 사상을 연구하는 현학을 말한다. 특히 “『장자』·『노자』·『주역』을 묶어 삼현이라 했다.”는 부분에서 위진현학과 노자·장자철학이 깊은 관련이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세설신어·문학 제4』에 전하는 대화 역시 음미할만하다. 

 

“완선자(완수阮修. 270?∼312?)는 당시 명성을 얻고 있었다. 태위 왕이보(왕연王衍. 256∼311)가 그를 만나자 질문했다. ‘노자 장자의 말과 성인(공자)의 가르침은 같은가 다른가?’ 완선자가 ‘아마도 같지 않을까요!’ 대답이 훌륭하다고 생각한 왕이보는 완선자를 발탁해 연掾이라는 관직을 내렸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삼어연三語掾(세 마디 말에 연이라는 관리가 되었다는 의미)이라고 불렀다. 위개가 이 소식을 듣고 비웃으며 말했다. ‘한 마디면 될 것을 세 마디씩이나 할 필요가 있나!’ 완선자가 말했다. ‘만약 천하에 덕망이 널리 퍼진 사람이라면 말없이 발탁되는 법! 어찌 한마디라도 말 할 필요가 있나!’ 마침내 위개와 완선자는 친구가 되었다.”

 

노장철학과 공자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고 본질적으로 같다는 완선자의 말은 위진현학의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위진현학이 주요하게 다룬 문제들이 지적知的놀이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인용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전후 맥락이 생략된 채 전하는 단편적인 기록만으로 전반적인 상황을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몇 마디 말에 관리나 친구가 됐다는 점에서, 현학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기보다는 ‘관념적인 말놀이’만 즐겼다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사실 대화에 등장하는 왕이보王夷甫 즉 왕연은 서진 영가 5년(311) 동해왕 사마월이 죽자 여러 사람들에 의해 원수元帥로 추대됐으나 석륵과의 전투에서 패해 포로가 된 바로 그 사람이다. 명사名士로 이름이 쟁쟁했던 왕연이었기에 석륵은 그를 만나고 싶었다. 석륵이 그에게 진나라의 사정을 물었다. 왕연이 말하길 자신은 국사에 참여한 적이 없다는 등 핑계로 일관했다. 오히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석륵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했다. 화가 난 석륵은 그를 칼로 죽이지 않고 밤에 사람을 보내 담을 무너뜨려 압사壓死시켰다. 죽음에 임해서야 왕연은 탄식했다. “아아! 내 비록 (능력이) 옛 사람들에 미치지 못하나, 만약 ‘내용 없고 허무한 것’을 숭상하지 않고 전력을 기울여 나라를 바로잡았더라면 오늘 이 같은 일을 당하지 않았으리라!”  당시 그의 나이는 56세. 지적知的 놀이로 즐긴 ‘공허한 말’의 폐단을 왕연은 죽을 때 비로소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아무튼, 본本·말末과 유有·무無의 문제를 주요하게 다룬 현학자들 대부분은 고위관료이거나 당시를 대표하는 학자들 즉 명사名士들 이었다. 그들은 존재의 근본 등을 탐구하며 ‘세상의 일[世務]’과 ‘세상의 사물[世物]’에서 벗어나 ‘깨끗하고 맑은 담론[淸談]’을 추구했다. 청담을 통해 현학가들은 노장철학이 중시한 ‘무위자연’(自然. 만물 존재의 근거 즉 도道 혹은 본체本體. 우주만물의 자연 질서. 이상세계)과 공자의 가르침인 명교(名敎. 유교가 중시하는 사회적 준칙. 인간 사회의 도덕질서. 현실세계)를 일치시킴으로써 이상과 현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다시 말해 노장철학을 기본으로 삼아 유가와 도가의 조화를 꾀하고, 자연과 명교를 회통시키려 한 철학사조가 바로 위진현학이라 할 수 있다. 

 

경학에서 현학으로

 

위진현학도 다른 사상들처럼 시대적 변화와 요청의 산물이다. 전한 무제(기원전156∼기원전141∼기원전87) 이래 유학은 정치 현실을 지배해온 중심사상이었다. 『한서漢書』권6 「무제기 제6」에서 반고班固는 “탁월한 식견으로 잡가雜家의 학설을 내쫓고, 육경六經의 지위를 확립했다.”며 무제를 높이 평가했다. 『한서』권56「동중서전董仲舒傳」에서도 “동중서(기원전179∼기원전104)가 대책을 올려 공자의 학문을 높이고, 백가百家의 주장을 억제하고 물리쳤다.”며 유학이 무제 이래 주된 사상이 됐음을 지적했다. 한나라 당시에 발전한 학문이 경학經學인데, 현실 정치에 활용할 수 있는 방안으로 삼고자 유교 경전 속의 이론을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단순히 문자의 의미를 해석하는 훈고訓詁를 위해서가 아니라 문장에 담긴 큰 뜻[大義]을 밝혀내려는 학문적 작업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동중서가 『춘추번로春秋繁露』에 의거해 제안한 “하늘과 인간은 서로 통하며 반응한다.”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과 전한 말부터 시작되어 후한이 망할 때까지 통치자들이 창도倡導한 일종의 미래 예언술預言術인 참위설懺緯說은 점차 속화俗化되어 경세치용의 역할을 담당할 수 없게 변해갔다. 황당하면서도 번잡한 신비주의 학설로 둔갑해 버렸다. 후한 말기 유가사상의 쇠퇴가 두드러지자 법가 음양가 도가 등의 사상이 유가독존儒家獨尊의 틀을 뚫고 세력을 얻었다. 한漢·위魏교체기에 유가의 지위를 이은 것이 도가사상 즉 노장사상이었다. 비교적 단순하면서도 정제된 노장사상으로 명교(유교의 삼강오륜 등)를 새롭게 해석하는 현학은 이러한 사상적 흐름 속에서 출현했다.

 

여기에 힘을 보탠 것이 청의淸議였다. 부패한 정치 현실을 비판하며 사인士人 계층 사이에 형성된 정치적 여론을 청의라 한다. 청의의 형성은 한나라의 관리 선출방식과 관련이 있다. 당시의 관리 선출은 지역사회 사인士人들의 인물평[鄕論]을 참작해 중앙정부 고관들이 인재를 천거했다. 이것이 ‘지방에서 추천된 인재 가운데 선택한다’는 향거리선鄕擧里選. 특히 후한 명제(28∼57∼75) 이래 유교는 국교였기에 지방의 우수한 학도들을 명경明經 혹은 효렴孝廉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정부에 등용했다. 그 결과 후한 말기에 이르러 지방과 중앙에는 유교 지식인층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인물평론 등을 통해 자연스레 환관정치의 부패상을 비판하며 자신들의 여론을 만들어나갔다. 그런데 환관의 사주를 받은 환제(桓帝. 132∼146∼167)가 조정을 비판하는 유생 200여명을 검거하고, 이들을 당인黨人이라 부르며 관리임용을 금지시켰다. 166년에 일어났던 제1차 당고사건이다. 당고黨錮는 당파로 지목된 유생들의 관리 임용을 금한다는 의미다.

 

환제 사후 영제(156∼168∼189) 때 환관들이 정변을 일으켜 대신 두무竇武와 진번陳蕃을 살해하고, 그 당파黨派로 지목된 사람 100여명을 죽였으며, 600∼700여명을 금고禁錮에 처했다. 이것이 169년에 벌어졌던 제2차 당고사건이다. 관리로 등용되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유학을 연구하던 사람들에게 금고禁錮는 가장 무거운 형벌이다. 인재등용의 문이 닫힌 그 틈을 비집고 관직을 팔고 사는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지식인들은 더더욱 환관들이 발호하는 중앙정부를 불신하게 되었다. 당고의 화禍를 당해 직접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지식인들은 점차 추상적인 인물평론 나아가 사람들의 본질적인 재능과 본성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인물평론은 결국 ‘노장철학을 논의하는 청담’ - 이를 현담玄談이라고도 한다 - 으로 연결되어 현학사조 발전을 촉진시켰다.

 

시대적·사상적 흐름 속에서 탄생된 위진현학은 몇 단계를 거치며 전개된다. 당시 사람들이 현학의 전개과정을 어떻게 파악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세설신어·문학 제4』에 있다.

 

“원굉(袁宏. 328∼376)은 하후태초(하후현夏侯玄)·하평숙(하안何晏)·왕보사(왕필王弼) 등을 정시(正始. 240∼249)의 명사로 하고, 완사종(완적阮籍)·혜숙야(혜강稽康)·산거원(산도山濤)·상자기(상수向秀)·유백륜(유령劉伶)·완중용(완함阮咸)·왕준충(왕륭王戎) 등을 죽림의 명사라 보았다. 또 배숙칙(배해裵楷)·악언보(악광樂廣)·왕이보(왕연王衍)·유자숭(유개庾凱)·왕안기(왕응王應)·완천리(완첨阮瞻)·위숙보(위개衛玠)·사유여(사곤謝鯤) 등을 중원(서진)시대의 명사로 삼았다.”

 

동진시대(317∼420)를 살았던 원굉이 나눈 현학의 단계는 정시시기(240∼249) 현학; 죽림시기(255∼262) 현학; 서진시기(265∼316) 현학 등이다. 이 구분에는 원굉 자신이 살았던 동진시대와 그 이후의 남북조시대(439∼589)가 빠져있다. 동진·남북조시대는 현학과 불학이 서로 사상적 영향을 주고받았던 시기였고, 특히 『조론』이 “위진현학의 종결이자 중국불교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저작”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인물·사상·시기 각각의 관점에서 중심인물로 하안·왕필 → 혜강·완적 → 배위·곽상郭象 → 승조·도생道生; 사상적으로 하안·왕필의 귀무론貴無論 현학 → 완적·혜강의 자연론自然論 현학 → 배위의 숭유론崇有論 현학·곽상의 독화론獨化論 현학 → 승조의 비유비무론非有非無論(중도사상 즉 반야학)·도생의 열반학涅槃學; 시대적으로 정시正始시기현학(240∼249) → 죽림竹林시기현학(255∼262) → 원강元康시기현학(291∼299) → 불학佛學주도시기로 현학·불학의 전개단계를 구분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현학의 단계 구분과 관련해 탕이졔(湯一介)는 하안·왕필을 중심으로 한 정시시기, 혜강·완적을 중심으로 한 죽림시기, 배위·곽상을 중심으로 한 원강시기, 장담(張湛)을 중심으로 한 동진시기로 구분했다. 湯一介著, 『郭象與魏晉玄學』(第三版), 北京:北京大學出版社, 2009, p.85. 장따이녠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中國哲學大辭典』의 시기 구분도 탕이졔(湯一介)와 비슷하다. 張岱年主編, 『中國哲學大辭典』, 上海:上海辭書出版社, 2014, p.155. 반면 위뚠캉은 정시현학(하안·왕필의 귀무론 현학), 죽림현학(완적·혜강의 자연론 현학), 서진현학(배위의 숭유론 현학·곽상의 독화론 현학), 동진불현佛玄합류시기(육가칠종·구마라집·승조·도생) 등으로 나누었다. 余敦康著, 『魏晉玄學史』, 北京:北京大學出版社, 2004, 目錄.] 

 

하안. 왕필의 귀무로

 

정시현학의 대표자는 하안(190∼249)과 왕필(226∼249)이다. 하안은 후진의 대장군 하진의 손자이자, 조조의 사위였다. 이들 사상의 핵심이 『진서晉書·왕연전王衍傳』에 기록되어 전한다. 

 


왕필

 

“위나라 정시 연간에 하안과 왕필은 『노자』와 『장자』에 관한 주석注釋을 지어 말했다: ‘천하의 만물은 모두 무無를 근본으로 한다. 무라는 것은 만물의 이치에 두루 통하는 것이자 공功을 이루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 무에 의지해 음과 양의 변화가 있고, 무에 의지해 만물이 형성되며, 현명한 사람은 무에 의지해 덕을 펴며, 현명하지 못한 사람도 무에 의지해 어려움을 면하고 몸을 지킨다. 비록 높은 벼슬[爵]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무의 작용은 귀하고 귀한 것이다.’ 왕연은 이 말을 중시했지만, 배위는 이 말에 반대해 글을 지어 비판했다. 그러나 왕연은 그 비판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동했다.” 

 

무를 중시하는 하안과 왕필의 현학사상[貴無論]이 인용문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천하 만물은 모두 무를 근본으로 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세설신어·문학 제4』에 “하안은 어려서부터 기이한 재주가 있었으며 『주역』과 『노자』를 말하는 데 뛰어났다.” 『삼국지·위지·조진전』에 “(하안은) 어렸을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유명했다. 『노자』와 『장자』의 말을 좋아했으며, 『도덕론』과 여러 문文과 부賦등 수십 편을 저술했다.” 『삼국지·위지·종회전』에 “처음, 종회가 어렸을 때 산양 사람 왕필과 함께 이름이 알려졌다. 왕필은 유가와 도가의 이치를 잘 논했고, 글 쓰는 재주가 있고 변론도 뛰어났다. 왕필은 『주역』과 『노자』에 주석을 달았으며, 일찍이 상서랑에 임명되었고, 나이 20여 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등의 기록을 통해 하안과 왕필이 『노자』·『장자』·『주역』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내용 해석에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무가 만물의 근본이라는 생각은 왕필이 주석한 『노자』제40장 주注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천하의 사물은 모두 유有로써 생겨나지만, 유의 시작은 무無를 근본으로 한다. 유를 온전히 하고 싶으면, 반드시 무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록 높은 벼슬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무의 작용은 귀하고 귀한 것이다.”는 구절에서 무는 인격신人格神도 의식意識도 아니며, 다만 사물이 존재하는 근거 혹은 도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노자』·『주역』·『논어』 해석에 있어서는 왕필이 하안보다 더 빼어났고, 독창적인 점도 많았다. 『세설신어·문학 제4』에 전하는 “하평숙(하안)이 『노자주』를 완성하고 왕보사(왕필)를 찾아갔다. 왕필의 주注가 너무 정묘한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깊이 탄복하며 말했다. ‘이런 사람이라면 하늘과 사람 사이의 일을 함께 토론할 수 있겠다!’ 그리고는 자신의 주석을 『도덕이론』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기록에서 저간의 사정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왕필은 특히 무를 본체론本體論적인 도道로 해석했다. 이는 왕필이 지은 『논어석의論語釋疑』에 남아있는 “도道라는 것은 무無를 말하는 것이다. 무는 통하지 않음이 없고, 무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 하물며 무를 도라고 말하는 것은 텅 빈 본래 그대로의 모습이어서 형체가 없고, 모양으로 만들 수 없다. 이 도道는 형체로 드러낼 수 없기에, 다만 마음과 뜻으로 흠모할 따름이다.”는 구절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아무튼, 무에서 유가 나오고 무가 바로 도라는 하안과 왕필의 이론은 발생론·생성론生成論·실체론實體論적인 의취意趣가 강하다.

 

귀무론에 이어 등장한 현학사조는 죽림시기의 자연론自然論이다. 대표자는 완적(210∼263)과 혜강(223∼262). 둘 다 죽림칠현에 포함된다. 『세설신어·임탄任誕 제23』에 ‘대나무 숲 속의 일곱 현인[竹林七賢]’에 대한 기록이 있다. 

 

완적, 혜강의 자연론

 

“진류 출신 완적, 초국 출신 혜강, 하내 출신 산도 등 세 사람은 나이가 비슷했다. 혜강의 나이가 조금 적었다. 그들의 교제에 참여했던 사람은 패국 출신 유령, 진류 출신 완함, 하내 출신 상수, 낭야 출신 왕융이었다. 일곱 사람은 항상 대나무 숲에 모여 마음껏 즐기며 술을 마셨다.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대나무 숲의 일곱 현인’이라고 불렀다.”

 

완적과 혜강은 하안(190∼249)·왕필(226∼249)과 동시대 사람이다. 완적은 건안15년(210) 태어나 경원景元4년(263)에, 혜강은 황초黃初4년(223)에 태어나 경원3년(262)에 각각 죽었다. 249년에 죽은 하안과 왕필에 비해 두 사람은 13∼14년을 더 살았다. 완적과 혜강의 현학사상은 전기와 후기가 다르다. 전기 즉 정시(正始. 240∼249) 이전엔 자연과 명교의 결합을 추구했다면, 정시 이후 즉 후기엔 자연이 근본이고 명교는 지말支末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를 드러낸다.

 

이미 설명했듯이 자연과 명교는 위진 시기 개념을 분류할 때 자주 사용됐던 한 쌍의 철학적 범주範疇다. ‘자연自然’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겨 있었다. ‘자연스럽다’는 뜻의 자연; 만물존재의 근거라는 의미의 자연 즉 도道; 우연偶然이라는 의미의 자연; 필연必然이라는 뜻의 자연 등등. 대체적으로 존재의 상태, 만물존재의 근거라는 의미 즉 도道의 또 다른 명칭, 본체本體·근본根本이라는 뜻으로 자연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반면 명교名敎는 삼강·오륜 등 사회생활의 준칙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이 때문에 유가는 명교를 숭상했고, 도가는 자연을 근본으로 여겼다.

 

완적·혜강은 본래 자연과 명교의 결합을 추구했다. 이상적 자연 질서에 근거한 도덕 질서 확립을 주장했다. 완적은 「통노론通老論」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하늘과 사람의 이치에 밝고, 자연의 분수에 통달했으며, 다스림과 교화의 본체를 꿰뚫고, 크게 삼가는 가르침을 깊이 살핀 이가 바로 성인이다. 그래서 임금과 신하는 손을 내려 맞잡아[예절이 있었다] 본래 그대로의 질박함을 온전히 갖추었고, 백성들은 기뻐하며 성품의 본성과 현실의 목숨의 조화를 보전했다. 도道라는 것은 저절로 그러함을 본받아 변화하는 것이니, 제후와 왕이 능히 그것을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장차 저절로 교화될 것이다. 이것을 『주역』은 태극太極, 『춘추』는 원元, 『노자』는 도道라고 불렀다.”

 

혜강 역시 「성무애악론聲無哀樂論」에서 자연과 명교의 조화를 추구했다. 

 

“옛날의 왕은 하늘의 가르침을 이어 만물을 다스렸고, 반드시 간단함과 쉬움의 가르침을 높이 받들었으며, 함이 없는[無爲] 다스림을 시행했다. 임금은 위에서 조용히 다스렸고, 신하는 아래에서 순응했다. … 마음을 조화시켜 내부를 만족시키고, 기를 다스려 외부를 살폈다. 그래서 노래로 뜻을 밝혔고, 무용으로 심정을 널리 드러냈다. 그렇게 한 뒤에 그것을 글로 지어 문장을 모았고, 노래와 무용을 밝힘으로서 풍과 야라는 시의 형식을 만들었다. … 마음이 이치를 이치가 마음을 서로 따르도록 했으며, 기氣가 소리에 소리가 기에 상응하도록 했다. … 큰 가르침[大道]의 융성함이 이 보다 더 성대한 적이 없었고, 지극한 편안함이 이 보다 더 드러난 적이 없었다.” 

 


벽돌에 그려진 죽림칠현의 그림

 

이처럼 완적과 혜강의 전기 사상은 자연과 명교의 조화로운 발전에 강조점이 있었다. 그러나 249년에 있었던 사마의 중달의 쿠데타 이후 조씨와 사마씨 간의 정쟁政爭에서 사마씨가 우위를 점하고,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 등 사마씨 집단이 명교를 이용해 “염치도 없이”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기 시작하자 둘의 사상도 서서히 변했다. 정치가 마땅히 그러해야할 질서[자연自然]를 어그러뜨리자 자연과 명교가 대립되기 시작했으며, 점차 자연을 숭상하고 명교를 비판하는 경향으로 기울어졌다. 명교가 천지의 근본질서를 어지럽히고 만물의 본성에 위배됨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촉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일조한 종회(鍾會. 225∼264)의 참소로 사마소에게 죽임을 당한 혜강은 「태사잠太師箴」에서 일그러진 명교를 강하게 비판했다.

 

“옛날에는 천하를 위했는데, 지금은 한 사람의 몸만 위한다. 아래 사람은 위 사람을 질투하고, 군주는 신하를 의심한다. 사나움과 난잡함이 더욱 많아지고, 이 때문에 나라도 망하고 무너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혜강은 마침내 명교를 버리고 자연을 높이기 시작한다. 이는 혜강의 「석사론釋私論」과 완적의 「대인선생전大人先生傳」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무릇 군자는 옳고 그름에 마음을 두지 않으며, 행동은 도道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다. 무엇 때문인가? 대저 기氣가 안정되고 정신이 비어있는 사람은 자랑과 높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몸이 밝고 마음이 통달한 사람은 정식情識이 원하는 바(욕망)에 묶이지 않는다. 자랑과 높임이 마음에 없기에 능히 명교를 뛰어 넘어 자연에 모든 것을 맡기며[越明敎而任自然], 정식이 욕망에 묶이지 않기에 능히 귀함과 천함을 살펴 사물의 이치에 통달한다. 자연스럽게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기에 큰 가르침[大道]과 어긋나지 않으며, 명교를 뛰어넘어 자연에 맡기기에 옳고 그름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옛날 하늘과 땅이 열리고 만물이 함께 생겨났다; 큰 것이 그 성품을 안정시키고, 세밀함이 그 형체를 고요하게 만들었다; 음은 그 기氣를 감추었고, 양은 그 정精을 발양시켰다; 해롭게 함이 없었으며, 이익을 다툼도 없었다; 놓아도 잃어버리지 않았고, 거두어도 가득차지 않았다; 없어져도 중간에 요절하지 않았고, 남아 있어도 장수하지 않았다; 복을 얻을 곳도 없었고, 화를 당할 잘못도 없었다; 각자는 그 명命에 따라 법도를 서로 지켰다. 현명한 사람은 지혜로 승리를 구하지 않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음 때문에 패배하지 않았다; 약한 사람은 핍박받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고, 강한 사람은 힘으로 모든 것을 다하지 않았다; 군주가 없어도 사물들의 질서가 잡혔고, 신하가 없어도 모든 일들이 이치대로 이뤄졌다; 몸을 보존하고 본성을 닦음에 그 기강에 어긋나지 않았다; 오직 이와 같을 뿐이었기에 능히 오래도록 유지되었다. (그런데) 지금 너희들이 음音으로 성聲을 어지럽히고 색깔을 지어 형체를 속이고 있다; 밖으로 그 용모를 바꾸고 안으로 그 감정을 숨기고 있다; 욕심을 품어 많음을 구하고, 속임수로 이름을 추구하고 있다; 군주가 세워지자 학대가 많아지고, 신하의 서열이 정해지자 도적이 생겨났다; 않아서 예법을 만들어 백성들을 속박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속이고 둔한 사람을 기만한다. … 너희들 군자의 예법은 실로 천하를 비천하게 만들고 천하를 어지럽히고 천하를 망하게 하는 술책일 따름이구나!”

 

현실 정치의 준칙인 명교를 비판하고 자연을 강조한 이 사상은 사실 하안·왕필의 귀무론 현학의 발전적인 형태다. 귀무론에 이미 무無(자연)를 중시하고 유有(명교)를 낮게 보고, 근본을 중시하고 지말을 천시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적·혜강의 자연론 현학 역시 일종의 본체론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청나라 때 편찬된 <고성현상전략> 권5에 실려 있는 혜강의 모습

 

자연을 존중하고 명교를 낮춰보는 자연론 현학의 신봉자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술에 취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마치 사리에 통달한양 여기는 풍조가 지나쳐 폐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설신어·덕행 제1』에 이와 관련해 주목할 가치가 있는 구절이 있다. 

 

“왕평자와 호무언국 등은 모두 멋대로 방종한 행동을 했다.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나체로 있기도 했다. 악광이 웃으며 말했다. ‘명교에도 즐거운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저렇게 할 필요까지 있을까?’”

 

배위의 숭유론 출현

 

무를 중시하는 귀무론과 방종한 생활을 깨달음인양 호도하는 자연론 현학의 말류적 폐단이 지나치자 원강 시기 배위(267∼300)가 나서 이들을 비판했다. 『진서』권제35 「배위전裵頠傳」에 기록이 있는데, 약간 길지만 전부 인용할 필요가 있다. 

 

“배위는 당시 풍속의 방탕함과 유교적 가르침을 존중하지 않는 것을 심히 우려했다. 하안·왕필은 본래부터 명성이 있었다. 그들의 말은 과장되고 허무하며, 예법을 존중하지 않았다. 일 하지 않으면서 국록을 받고 과분한 은총까지 누렸다. 관리된 자들도 이를 본받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왕연과 그 무리들은 특히 유명했다. 그들의 직위는 높고 권세도 대단했다. 그러나 정무政務를 보살피지 않고, 서로 모방하며 풍속과 법도를 쇠퇴하게 만들었다. 이에 배위가 『숭유론』을 지어 귀무론을 비판했다. ‘무릇 함께 모여 있는 만물 이외 다른 지고무상한 도道는 없다. 사물의 차이를 활용해 각각의 종류를 정하며, 형체와 모양이 있는 물체들은 모두 같지 않다. 이로 인해 성장하고 변화하는 일체의 실체가 있다. 사물의 변화와 감응작용은 매우 복잡하며, 이 복잡한 것이 바로 질서와 이치를 만드는 근원이다. 만물이 서로 구별되는 다른 종류이기에 종류마다 자기의 특징이 있다. 스스로의 특징이 있기에 만물은 서로 의존하며 존재한다. 만물이 생기고 변화하는 것을 탐구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치[理]이다. 이치는 있음[有]에 의해 드러난다. 사물이 존재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자資라 하며, 조건이 그 사물이 존재하는 데 적합한 것을 의宜라고 하며, 적당한 조건을 선택하는 것을 정情(실정에 맞음)이라고 한다. 지식 있는 사람이 관리가 되든 은퇴하든 그 모습은 같지 않고, 침묵하고 말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러나 고귀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을 찾는다는 그 정황情況은 모두에게 다르지 않다. 사물의 여러 이치가 동시에 존재하지만 해를 끼치지 않기에 귀함과 천함도 나타난다. 귀함과 천함의 차이가 있는 그 곳에 얻음과 잃음이 존재하므로 좋은 징조와 나쁜 징조가 드러난다. … 유有를 천시하면 반드시 형체를 도외시하게 되며, 형체를 도외시하면 제도를 잃어버린다. 제도를 버리면 방지하는 것을 소홀히 하게 되고, 방지하는 것을 소홀히 하면 반드시 예禮를 상실한다. 예와 제도가 없으면 정치를 할 수가 없다. … 『노자』를 보면 넓은 가르침이 있다. 그런데 『노자』는 ‘무無에서 유有가 생긴다’고 말했다. 이는 아무 것도 없는 허무를 주主로 한 것으로, 한 쪽의 말을 일방적으로 세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그러한 연유가 있겠는가! … 대저 아무것도 없는 지극한 허무는 그 무엇도 만들어 낼 수 없다[夫至無者, 無以能生(無=不能)]. 따라서 태어남의 시작은 자생自生이다. 자생은 반드시 체體인 유有를 필요로 한다. 유有를 버리면 생존마저 위태롭다. 이미 존재하는 사물이 유有를 존재의 근거로 하기에 아무 것도 없는 허무虛無는 단지 유有가 없어진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조건에 따라 키워져 이미 존재하는 유有를 무無의 작용이 능히 보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스림의 이치에 의해 이미 존재하는 여러 사람을 무위無爲가 능히 교화하고 길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心]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일을 할 때는 반드시 마음에 의지해야 한다. 일을 하는 마음이 일 자체가 아니라고 마음을 무無로 간주해서는 절대 안된다. 장인匠人은 그릇[器]이 아니지만, 그릇을 만들 때는 반드시 장인에 의지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릇을 만드는 장인이 그릇과 같지 않다고 장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서는 안 되는 것과 똑 같다. 깊은 물속에 있는 고기와 용을 편안히 누워서 잡을 수는 없다; 높은 벽 위에 있는 날짐승을 공손히 손을 잡은 채 잡을 수는 없다; 정성을 다해 물고기 잡는 미끼를 거는 것을 무지無知가 능히 할 수는 없다; 이로 보건대 유를 숭상하는 숭유崇有가 이미 있는데, 허무虛無가 민중에게 무슨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건가!”

 

인용문은 많은 사실을 알려 준다. 귀무론과 자연론 현학의 영향으로 관리들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았고, 유교적 예법은 방치되어 정치가 바르게 이뤄지지 않아 숭유론 현학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첫 번째다. 다음으로 배위는 『노자』의 “무에서 유가 생긴다.”는 구절을 편향된 가르침으로 치부했다는 점이다. 배위가 자생론自生論을 제창했다는 점이 인용문이 세 번째로 알려주는 사실이다. 만물의 탄생은 자생 즉 스스로 생기며, 비록 스스로 생기지만 유有를 본체로 한다. 자생과 유는 체體·용用의 관계이며, 허무虛無는 유有가 결핍된 상태라는 주장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여기서 네 번째 사실이 도출된다. 배위가 이해한 무無는 생성론·본체론 적인 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배위는 귀무론 현학이 주장한 본체론적인 무를 경험세계의 허무虛無(아무 것도 없는 것)로 끌어내려 버렸다. 배위의 귀무론 비판이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배위가 본체론 적인 유有를 제안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현학의 관심을 관념적인 문제에서 현실적인 사물事物로 옮긴 것은 배위의 공로다. 명교를 세울 본체론적인 근거를 제시했다는 점과 곽상의 독화론獨化論 현학이 태어날 기초를 마련해놓았다는 점 역시 그의 업적이다. 

 

곽상의 독화론

 

배위에 이어 현학사상의 무대에 등장한 곽상(郭象. 253∼312)은 무無가 유有를 만들어낸다는 점도, 유가 능히 무를 생기게 한다는 점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다만 만물은 “홀로 스스로 생겨난다[塊然而自生].”고 주장했다. 『장자집석莊子集釋』에 이와 관련된 곽상의 주注가 있다.

 

[1] “무無는 이미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유有를 낳을 수 없다; 유는 아직 생기지 않았기에 생성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생生을 생기게 하는 것은 누구인가? 홀로 스스로 생겨난다. 스스로 생겨나지, 내가 생기게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사물事物을 생기게 할 수 없기에, 사물 또한 나를 생기게 할 수 없다. 내 스스로 그러하다. 스스로 그러 하니[自己而然] 이를 일러 천연天然이라 한다. 천연일 따름이니 함[爲]이 하는 것은 아니다.”

 

[2] “묻는다: ‘사물을 만드는 조물주造物主는 있는가? 없는가? 없다면 누가 사물을 만들어 내는가? 있다면 물物로 여러 모양의 물건을 나오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러 모양의 각각의 물건이 있은 연후에 비로소 조물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물건이 있는 영역에 관련해서는, 비록 다시 그림자 옆의 그늘이라도 그윽한 어둠 속에서 홀로 변화해 태어나지[獨化] 않음이 없다. 조물주는 없고 물건 각자가 스스로를 만든다. 물건 (스스로가) 스스로 만들뿐 다른 것에 의지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이것이 천지의 올바름이다.”

 

[3] “그런즉 무릇 그것을 얻음[得之]은 밖으로 도道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고, 안으로 자기에게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홀로 스스로 얻어 변화해 태어나는[獨化] 것이다. 대저 태어남의 어려움이란 오히려 홀로 변화해 스스로 얻음 때문이다. 이미 그 생生을 얻었으면 다시 무엇 때문에 생生을 얻지 못해 (그것을) 얻으려 근심하는가!”

  

인용문에서 보듯이 무無는 이미 없는 것이기에 유有를 만들어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유有는 자기 자신이 한계적 존재이기에 다른 한계가 정해진 존재물을 만들어 낼 능력이 없다. 무와 유가 만물을 만들어 내지 못하기에, 만물은 단지 스스로 변화해 태어난다[獨化]. 모든 사물은 스스로 자기 존재의 근거일 따름이다. 조물주라는 말도 할 수가 없다. 만물은 모두 ‘스스로 태어나는 것[自生]’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곽상의 독화설獨化說은 만물 스스로 필요한 모든 성분性分을 자족自足하고 있기에 다른 실체적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有라는 실체를 근거로 전개된 배위의 자생설과 큰 차이가 있다.

 

비유비무의 중도 사상 전파 

 

곽상 이후 동진시기(317∼420)를 살았던 장잠(張湛. 370∼?)이 현학을 새롭게 구성하려 했으나 귀무론·숭유론 등을 종합하는 정도였지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지는 못했다고 평가된다. 중국에 전래된 지 이미 오래되어 일정정도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불교가 독자적인 학설을 유포하고 있었던 점도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본체론에 가까운 무無·유有를 대체할 새로운 사유방식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다.

 

[『세설신어·문학 제4』 등에 이를 방증傍證하는 기록이 적지 않다. 출가자인 지도림의 『장자·소요유』 이해가 현학가 곽상과 상수를 뛰어넘었다는 것; 지도림이 『장자·소요유』에 대해 이야기하자 고관高官이 떠날 줄을 몰랐다는 일화; 동진의 명사名士들이 모두 지도림의 말과 생각에 관심을 갖고 즐겼다는 기록; 동진의 간문제簡文帝(321∼371∼372)가 개최한 재회齋會에서 지도림이 한 가지 해석을 내릴 때마다 모임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만족해했다는 일화; 『유마경』·『성실론』·삼승三乘·돈오頓悟·십지十地·육가칠종六家七宗 등 불교와 관련된 경전과 술어들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 등에서 동진시기 불교의 사회적·사상적 영향력이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때인 후진 홍시弘始 11년(409) 구마라집이 『중론中論』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특히 "무엇인가 존재한다고 하면 상주론常住論에 빠지고, 무엇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단멸론斷滅論에 떨어진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마땅히 유有와 무無에 집착해서는 안된다[定有則著常, 定無則著斷. 是故有智者, 不應著有無]."는 『중론中論․관유무품觀有無品(제15장)』의 열 번째 게송은 위진현학의 실체론적인 무․유개념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여러 인연因緣의 결합으로 출현한 존재[사물․개념․관념]는 유有라고 말 할 수 없고 무無라고 말할 수도 없다는 비유비무非有非無에 입각해 지은 글이 바로 승조가 410년 발표한 「부진공론不眞空論」이다.

 

만물은 본질적으로 공空한 성질性質[공성空性]을 갖고 있으며 모든 존재는 성질상 공한 성품[성공性空]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정통 반야중관사상이 구마라집과 함께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어 연구되면서 귀무론·자연론·숭유론·독화론 현학은 관심의 대상에서 더욱 더 멀어지게 된 것이다. 대신에 승조와 『조론』이 그 자리와 공간을 차지하고 채웠다. 당연히 사상계의 흐름도 현학에서 불학 쪽으로 점점 옮겨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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