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조와 조론]
‘승조 시대’ 중국불교의 주요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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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검(조병활) / 2018 년 9 월 [통권 제6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102회 /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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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기원전 206∼기원후 8) 말 후한(25∼220) 초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황노黃老사상과 비슷한 방술方術·도술道術의 하나로, 붓다는 황제黃帝·노자老子처럼 신선神仙 가운데 한 명으로 이해됐다.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난 뒤 중국인들은 붓다가 중국의 신선과 비슷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전래된 이후 250∼350년 정도의 학습·수행을 거쳐 중국인들 스스로 불교 교의敎義를 연구·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됐다.
이런 저런 과정에 불교는 서서히 중국인의 습속習俗과 부합되는 방향으로 변해갔다. 중국적인 것으로 변용變容되기 시작했다. 적응適應의 조류潮流가 흐르는 동안 불교와 함께 인도·서역에서 전래된 언어·사유체계·음식·미술·무용 등도 중국인의 풍속에 내재화內在化되고 있었다. 잦아진 접촉과 상호간에 주고받은 영향으로 ‘외래문화’였던 불교는 빼놓을 수 없는 ‘중국문화’의 한 부분이 되었다. 중국의 피와 살로 전화轉化된 것이다.
발전·변화하는 도중途中에 인도불교의 사상·학설들이 끊임없이 들어와 중국불교에 영향을 주었고, 전래된 학설들을 연구하며 형성된 학설·학파는 천태·화엄·선종 등 종파불교 탄생의 밑거름이 됐다. 변용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중국불교는 중국사상의 한 부분이지만 중국 전통사상 및 인도불교와 다르고, 중국불교의 구성요소이자 인도불학佛學을 흡수하며 형성된 중국불학은 다른 나라의 그것과 차이 나는 독자적인 풍취風趣를 갖게 됐다. 그래서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큰 연구 주제의 하나는 불교가 만들어 낸 중국문화의 변용이다. 거의 2000년 정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변용을 추적할 수 있고, 중국인의 삶이나 사상의 모든 측면에서 불교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미국의 중국불교 연구가 아서 라이트(1913∼1976)의 지적은 틀림이 없다. 이미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는 중국불교 발전의 동력은 무엇일까?
금나라 때 판각된 대장경이 1933년 중국 산서성 조성현 광승사에서 발견되었다. 진제가 번역한 <금강경>의 첫 부분.
불교의 중국적 변용에 무엇보다 큰 힘이 된 것은 ‘불교의 성서聖書 ‘성서聖書(경전經典)’를 고전 중국어로 번역한 역경譯經이다. 역경이 없었다면 중국불교는 지금과 훨씬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방대한 학문적 업적과 뛰어난 불교문화를 자랑하는 오늘날의 중국불교가 태어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역경은 그 만큼 중요하다. 하나의 외래문화가 다른 지역에 전파되어 뿌리내릴 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현지인들을 흡수吸收·전화轉化시키는 일이다. 이를 위해 가르침을 담은 교전敎典을 현지의 말과 글로 옮기는 것이 시급하고 필수적이다. 번역하기 위해선 불경의 언어 즉 기점 언어source language인 산스크리트어[범어梵語]와 목표 언어target language인 중국어[고전 중국어]를 알아야 한다.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중국에 온 외국인 역경가들 가운데 극히 일부만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4세기 후반 이전에 산스크리트어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중국인은 거의 없었다.
『고승전·권1』에 따르면 산스크리트어를 완벽하게 익힌 최초의 중국인은 4세기 후반의 역경가 축불염竺佛念이다. 500연대 후반에서야 범어를 제대로 이해한 중국인이 비로소 등장한 것이다. 이런 저런 다양한 역경逆境을 뚫고 역경승과 한인漢人 보조자들은 훌륭하고도 멋지게 불교 경전 즉 성경聖經을 번역해 냈다. 세계번역사世界飜譯史에 불멸의 금자탑金字塔을 세웠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당나라 스님 지승智昇이 730년(개원 18) 편찬한 『개원석교록』은 불전 목록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지승이 채택한 서지학적·목록학적 분류는 이후 출간된 각종 경전목록과 대장경의 모델로 기용起用됐다. 이 책이 출간된 당시까지 존속됐던 불전의 총수는 1,078부 5,048권이었다. 바로 이 『개원석교록』에 따르면, 후한 명제 영평 10년(67)부터 헌제 연강 원년(220)까지 역경자(역경의 주요 책임자)는 12명, 번역된 경전(경율론 포함) 수는 합계 292부部 395권卷, 이 가운데 97부 131권이 당나라 개원연간에도 전해지고 있었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황제에 즉위한 220년(황초 원년)부터 위나라가 망한 265년(함희 2년)까지 번역된 경전의 숫자는 12부 18권, 역경자는 5명, 4부 5권을 개원연간에 볼 수 있었고 8부 13권이 당시 이미 전해지지 않았다. 이처럼 후한 중·후기부터 직접 읽을 수 있는 경전의 숫자가 점점 증가하자 중국인들의 불교 이해 수준도 그에 따라 높아졌다.
중국 불교사상 최초의 한역漢譯 경전은 무엇일까?『고승전·권1·섭마등전攝摩騰傳/축법란전竺法蘭傳』에 관련 자료가 있다.
“기록이 전한다. ‘섭마등이 『사십이장경』 1권을 번역해 처음 난대蘭臺의 석실 열네 번째 칸에 봉하여 두었다. 섭마등이 머무른 거처는 지금 낙양성 서옹문 밖 백마사이다.’”
“축법란도 역시 중천축 사람이다. … 『사십이장경』 등 다섯 부를 번역했다. … 강좌江左에는 오직 『사십이장경』만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이 천여 단어 가량 된다. 중국 땅에 현존하는 여러 경전들은 이것을 시초로 삼는다.”
그런데, 남조 양나라 스님 승우僧祐(445∼518)가 510년에서 518년 사이에 편찬한 『출삼장기집·권2』에는 “『사십이장경』 1권 (구록舊錄에는 한나라 『효명황제사십이장』이라 했다. 도안이 편찬한 목록에는 이 경이 없다.)”고 기재되어 있으며, 수나라 학승學僧 비장방이 597년 펴낸 『역대삼보기·권4』에는 “가섭마등. 『사십이장경』 1권. 이상의 1경은 명제 때 중천축국 사문 가섭마등이 번역한 것이다.”라고만 적혀있다. 축법란의 이름이 없다. 종합하면 인도 이름이 ‘카쉬야파 마탕가’인 가섭마등이 번역한 『사십이장경』이 최초의 한역 경전이라는 것이다.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불교학자 가운데 한 명인 탕용통(湯用彤. 1893∼1964)은 『한위양진남북조불교사』제3장에서 “동한(후한) 때 이미 『사십이장경』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렇다면 후한 때 『사십이장경』이 이미 있었다는 것은 정말 의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여기에 의문을 제시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탕용통과 더불어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불교학자 가운데 한 명인 뤼청(呂澄. 1896∼1989)도 반대파에 속한다. 『중국불학원류약강』라는 책에서 그가 지적했다.
“『사십이장경』은 처음 전래된 경전도 아니고, 직접적인 번역본도 아니다. 경전 초록抄錄이다. 내용적으로 볼 때 『법구경』에서 초록한 것이다. … 현존하는 『법구경』은 삼국시대 지겸이 번역한 것이다. 지겸支謙이 쓴 서문에 의하면 지겸이 번역하기 전 또 다른 번역본이 있었다. 따라서 한나라 말기에 이미 『법구경』이 있었던 것이다. 『사십이장경』은 마땅히 지겸 이전에 번역된 『법구경』에서 초록해 윤색한 것이다. 『사십이장경』의 출현은 상당히 늦은 후대일 것이다.”
사실, 전한 말 후한 초 전래된 불교는 당시 서역에서 중국에 들어와 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신앙되고 있었다. 그러나 광무제 유수의 넷째 아들인 유장(劉莊. 후한 제2대 황제 명제明帝. 28∼57∼75)이 황제로 있던 당시에 경전 번역이 시작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신앙인들이 증가해 교리를 알고 싶다는 무언의 요구가 점차 커지자 번역이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출삼장기집』 역시 안세고安世高 전기를 역경자譯經者 전기 가운데 제일 먼저 싣고 있다. 도안(312∼385)이 편찬한 『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錄』에도 안세고가 옮긴 『안반수의경』은 기록되어 있다. 이런 저런 사실로 미루어 최초의 번역가는 안세고일 가능성이 크다. 안세고보다 20년 늦게 중국에 도착한 지루가참支婁迦讖(줄여 지참支讖이라고도 한다)이 뒤이어 역경에 종사했다.
안세고는 서역의 안식국(安息國. 파르티아. 지금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서부에 걸쳐 있었던 나라) 왕자이며, 지루가참은 월지국(月支國. 박트리아. 아프가니스탄 동북부와 우즈베키스탄 남부에 걸쳐 있었던 나라) 사람이다. 당시 역경승들의 성姓은 대개 출신지역을 따라 붙였다. 안식국에서 왔으면 성姓이 안安, 월지국에서 태어났으면 지支, 인도인에게는 축竺, 강거국(康居國. 소그드 지역,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 일대) 태생에게는 강康이라는 성을 주로 붙였다. 본인의 고향이기도 했지만 선조의 출신지인 경우도 있고, 스승의 성을 따라 붙인 예例도 없지는 않다. 한족漢族으로 스승의 성을 따라 ‘축竺’성을 붙인 사람도 있다. 축도생竺道生이 그렇다. 그는 본래 ‘위魏’씨였지만 스승 축법태竺法汰의 성을 따라 ‘축’성을 갖게 되었다. 월지국에서 온 사람의 후손인 축법호竺法護 역시 출신 지역에 따르면 ‘지支’성이 되어야 하나 스승 축고좌竺高座의 성을 따랐다.
중국 돈황에 있는 월아천. 뒤로 보이는 산이 명사산이다.
이름이 청淸, 자字가 세고인 안세고는 후한 환제 건화建和 초년(147) 낙양에 도착했다. 『종리중경목록』에 따르면 안세고는 35부 41권의 경전을 번역했다. 대표적인 것이 호흡법에 입각한 명상법을 설명한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신체의 구성요소를 분석한 『음지입경陰持立經』 등이다. 『안반수의경』의 ‘안’은 들숨[흡吸], ‘반’은 날숨[호呼]을 뜻한다. 들숨과 날숨의 숫자를 헤아리며 정신을 집중하는 법 즉 일종의 수식관數息觀이 실려 있다. 『음지입경陰持立經』은 5온·6처 등에 대해 설명해 놓았다. 부파불교의 상좌부가 중시한 경전이 안세고 번역의 주류를 이룬다.
환제 말년인 167년 낙양에 도착한 지루가참이 - 『종리중경목록』에 의하면 - 옮긴 것이 확실한 것은 3부 14권,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 경전은 9부 12권이다. 반야의 지혜를 논한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붓다를 바로 앞에 나타나게 하는 삼매三昧에 관한 내용을 담은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등을 한역漢譯했다. 주로 대승계열로, 지참이 번역의 저본으로 사용한 경전은 인도인 축불삭竺佛朔 갖고 온 것이었다.
안세고나 지루가참이 각각 상좌부가 중시한 경전과 대승계 경전을 번역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후한 환제 시대 서북 인도의 지배자는 쿠샨왕조의 카니쉬카 대왕이었다. 쿠샨왕조의 수도는 오늘날 파키스탄의 폐샤와르, 파키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갈 때 반드시 통과해야 되는 카이버 고개 부근에 위치한 이 도시의 당시 이름은 푸르샤푸르였다. 그곳은 설일체유부 교학의 중심지였다. 그들은 대승을 멀리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다른 부파部派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다른 부파와 대승학파는 다른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세고와 지루가참이 상좌부·대승계 경전들을 중국어로 옮긴 이면에는 이러한 교파적 원인도 작용했다고 중국학자 뤼청은 『중국불학원류약강』에서 분석한다.
게다가 당시 서역에서 중국에 들어와 상업에 종사하고 있던 사람들[來華人]이 적지 않았다. 환제 말년엔 월지국에서 수 백여 명이 중국에 왔고 이들은 불교를 믿고 있었다. 이들의 신앙적 요구도 상좌부·대승계 경전이 번역된 이유 중의 하나라고 뤼청은 지적한다.
지루가참이 번역한 경전 가운데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도행반야경』이다. 구마라집과 승조가 흥성시킨 분야가 반야학이기 때문이다. 흔히 구마라집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 중국불교의 반야사상을 연구한다. 179년 지루가참이 『도행반야경』을 옮긴 때부터 구마라집이 장안에 들어온 401년까지를 전기前期, 구마라집으로 부터 길장(吉藏. 549∼623)까지를 후기後期로 볼 수 있다. 후한 영제 광화 2년(179) 지루가참이 옮긴 『도행반야경』 10권; 오나라 손권 황무 7년(228)년 지겸支謙이 역출譯出한 『대명도경大明度經』 6권; 서진 무제 태강 7년(286) 축법호가 번역한 『광찬반야경光讚般若經』 10권; 서진 혜제 원강 원년(291) 무라차·축숙란이 한역한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 20권; 전진 부견 건원 18년(382) 축불념이 번역한 『마하반야초경摩訶般若鈔經』 5권 등이 전기에 모습을 보인 반야계 경전들이다. 전기의 주요한 연구법은 ‘격의格義와 연류連類’였다. 도교나 유교의 술어를 이용해 반야경의 철학을 연구했다. 확립된 불교용어가 없었던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격의라는 말은 『고승전·권4·축법아전』, 연류라는 단어는 『고승전·권6·석혜원전』에 각각 용례가 있다.
“당시 그에게 의지한 문도들이 세간의 학문을 연마했으나 불교의 교리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축법아는 강법랑 등과 함께 경전에 나오는 ‘전문용어·법수 등의 개념[事數]’을 유교·도교 서적에 나오는 말들과 비교해 이해하도록 했다. 이것을 격의格義라 한다.”
“(혜원의)나이 24세 때 강의를 하게 됐다. 강의 하는 곳에 어떤 손님이 있어 설명을 들었으나, 실상實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질문과 답변이 오가도 의혹은 오히려 커져만 갔다. 이에 혜원이 『장자』가 말하는 뜻과 ‘연계시켜 비교해[連類]’ 설명하자 그 손님이 의혹을 환하게 깨달았다. 그 후 도안 스님은 혜원에게 특별히 속가의 책[유교·도교의 서적]들을 없애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했다.”
당나라 원강元康이 쓴 『조론소肇論疏권상卷上·서序』에 따르면, 구마라집이 장안에 도착하기 이전 반야경을 연구하던 그룹이 여럿 있었다. 이들을 육가칠종六家七宗이라 부른다.
“혹은 육가칠종, 상세히 말해 십이가十二家라 한다. 강남본江南本은 모두 육가칠종이라 말한다. 지금 기록과 전하는 것을 찾아보니 육가칠종이 맞다. 양나라의 석보창 스님이 지은 『속법론』(160권)이 말하길 ‘송나라 장엄사의 석담제 스님이 『육가칠종론』을 저술했다. 『육가칠종론』에 육가가 있으나 칠종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본무종本無宗, 두 번째는 본무이종本無異宗, 세 번째는 즉색종卽色宗, 네 번째는 식함종識含宗, 다섯 번째는 환화종幻化宗, 여섯 번째는 심무종心無宗, 일곱 번째는 연회종緣會宗이다. 본래 육가였으나, 첫 번째 본무종이 둘로 나뉘어 칠종이 됐다.’”
원나라 문재文才가 저술한 『조론신소肇論新疏권상卷上』은 육가칠종 가운데 반야경의 본뜻에 비교적 맞게 논의를 전개한 파派는 세 번째인 즉색종卽色宗이라고 지적했다.
“동진시대 지도림 스님이 『즉색유현론』을 지었다. 첫 구절(해석)은 생략한다. 두 번째 구절이 지도림 스님이 생각하는 바다. 지도림 스님이 말한다. ‘청색·황색 등 모습[相]은 능히 물질 자체로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청색·황색이라고 이름 붙였을 따름이다. 만약 마음이 그들을 집착하지 않는다면, 청색·황색등은 모두 공空이다.’ 이것이 바로 반야경이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의미다.”
여기서 초점은 육가칠종 가운데 어느 학파가 맞고 어느 학파가 틀린가가 아니다. 중국인들이 번역된 불교경전을 놓고 나름대로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들은 나름의 방식대로 경전을 해석하고 연찬하며 중국 불교·불학의 내실을 다져갔다. 십육국과 뒤이은 남북조라는 전쟁과 분열이 다반사였던 그 시기에 중국인들은 불교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 땀을 흘렸다. 이런 것들이 쌓여 수나라 당나라 시대의 찬란한 불교전성기가 열렸다. 승조가 공사상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던 이면에도 선학先學들의 공로가 있었다. 구마라집의 가르침이 근본 바탕이지만, 선학들의 학문적 집적集積이 있었기에 ‘비유비무를 정확하게 이해한 중국인’이라는 시들지 않는 사상적 월계관을 승조가 쓸 수 있었다.
서기 401년 장안에 온 구마라집 역시 많은 경전들을 번역했다. 그가 역출해 낸 경전 중에는 반야계도 많다. 『마하반야바라밀경』(『대품반야경』) 27권; 『소품반야바라밀경』 10권; 『금강반야바라밀경』 1권;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 2권;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 1권 등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묘법연화경』 7권; 『유마힐소설경』 3권; 『중론』 4권; 『십이문론』 1권; 『백론』 2권; 『대지도론』 100권; 『십주비바사론』 17권; 『용수보살전』 1권; 『제바보살전』 1권; 『성실론』 16권 등을 중국어로 옮겼다. 이러한 경전 번역에 참여하며 승조는 자연히 공사상을 체득했고, 체득한 학식學識은 『조론』 저술에 중요한 밑거름이 됐을 것이다.
역경과 더불어 중국불교의 전진을 추동한 것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주역인 비한족계非漢族系 군주들이었다. 중원中原의 패권을 놓고 자웅을 겨룬 그들은 불교의 발전과 변화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명멸했던 수많은 나라 가운데 불교와 관련해 기억해야 될 국가는 갈족 석(石)씨의 후조(後趙. 319∼351), 티벳계 저족 부(苻)씨의 전진(前秦. 350∼394), 강족 요(姚)씨의 후진(後秦. 384∼417), 흉노족 저거(沮渠)씨의 북량(北凉. 401∼439) 등이다.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는 말이 있다. 도안이 한 말로 『고승전·권5·석도안전』에 전한다.
“나라의 군주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붓다의 일을 이루기 힘들다. 교화의 기본은 마땅히 가르침을 널리 펴는 것이다.”
도안의 말처럼, 당시는 군주에 의지하지 않으면 불교를 홍포하기가 힘든 시대였다. 중국불교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한족漢族의 출가도 후조의 군주 석호가 허락해 비로소 시작됐다. 불교가 전래된 전한 말 후한 초 이래 사찰은 있었다. 반면 한인漢人 출가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며 주사행朱士行·엄불조嚴佛調 등 개별적으로 출가한 한인은 생겼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출가를 허락한 적은 없었다. 그 금제禁制를 후조 제3대 군주 석호(石虎. 295∼334∼349)가 깨트렸다. 관련 기록이 『고승전·권9·축불도징전竺佛圖澄傳』에 남아 있다. 약간 길지만 전부 인용할 필요가 있다.
밀가루로 만든 '달'을 굽고 있는 위구르 사람들. 신이승 불도징의 고향인 중국 신강성 쿠처에서 촬영했다.
“불도징의 덕화德化가 행해지자 많은 백성들이 붓다를 받들고, 모두들 사찰을 건립했다. 서로 다투어 출가해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허물과 과오가 많이 생겼다. 석호가 조칙을 내려 중서령에게 말했다. ‘붓다를 세상에서는 세존이라 부르며, 국가가 받드는 분이다. 동네의 소인으로 벼슬과 직위가 없는 자들이 붓다를 섬겨도 되는가? 출가자란 당연히 고결하고 곧고 바른 사람으로 능히 정심하게 수행을 거듭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정한 출가자가 될 수 있다. 지금 출가자들이 많아졌지만, 간사하고 악독한 자가 세금을 피하기 위한 경우도 있다. 그런 자들은 진정한 출가자가 아니다. 자세히 조사해 진짜와 가짜를 정확하게 구별함이 마땅하다.’
중서저작랑 왕도王度가 상주하여 아뢰었다. ‘무릇 왕이란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고, 여러 신들을 제사로 섬긴다는 것이 법식法式을 정리해 놓은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법에 따르면, 하늘 땅 그리고 여러 신들은 마땅히 제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부처는 서역 출신으로 외국의 신이라 공덕이 중국 백성들에게 베풀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천자와 중국의 백성들이 마땅히 제사 드리고 모셔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과거 한나라 명제가 부처에 관한 꿈을 꾼 뒤 가르침이 처음 전해졌습니다. 당시 서역 사람들만이 도읍에 사찰을 세울 수 있었고, 그들만이 부처의 가르침을 믿고 제사 드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한나라 백성들은 모두 출가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위나라도 그 제도를 이어받아 한나라 법식에 준해 부처의 일에 관한 사안을 처리했습니다. 지금 우리 대조(大趙. 후조를 말함. 존속기간 319∼351)가 하늘의 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마땅히 옛 법식을 쫓아 중국인과 서역인의 제도가 같지 않고, 중국인과 서역 사람들이 서로 다른 부류이고, 섬기는 신 또한 동일하지 않고, 외부와 내부가 서로 구별되며, 신에게 제사 드리고 흠향케 하는 법이 다름을 드러내어 중국인들의 복식과 제사법에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 백성들이 사찰을 찾아 예배드리고 향을 사르지 못하고 옛 제도와 예법을 따르도록 폐하께서 조칙을 내려 명령하셔야 합니다. 위로는 공경대부로부터 아래로는 평민·노예에 이르기까지 옛날의 법으로 이를 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켜야 합니다. 혹 어기는 자가 있으면 그릇된 제사[음사淫祀]를 지내는 사람과 같은 죄로 처벌해야 합니다. 무릇 조나라 백성으로 출가한 사람은 일률적으로 환속시켜 세속의 복식을 입도록 해야 합니다.’ 중서령 왕파 역시 같은 내용을 담은 표문을 올렸다.
이에 대해 석호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부처는 외국의 신이기에 천자와 중국인이 존경하고 모셔야 될 신이 아니라고 왕도는 말했다. 짐은 변방에서 태어나 천명을 받아 지금 중국 천하를 다스리고 있으니 당연히 나 자신의 본래 풍속을 따라야 함이 맞다. 부처는 이국의 신이기에 내가 마땅히 제사를 올려야 할 대상이다. 나라의 제도라는 것은 윗사람이 행하면 영원한 준칙準則이 되는 법이다. 만약 제도가 합당해 어긋남이 없다면 굳이 전대의 제도를 그대로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가? 조나라 사람이든 외국 사람이든 혹은 변방 민족 그 누구라도 잘못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즐거이 부처를 모시고 싶어 하면 원하는 대로 출가해 도를 구하게 하라.’ 조칙이 내려지자 계율에 신경 쓰지 않는 무리들이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엄격하게 지켰다.”
석호가 파천황破天荒 같은 조칙을 내린 것은 불도징(232∼348)이라는 신이승神異僧의 교화敎化 때문이다. 젊은 날 출가한 불도징은 “진실로 학문에 힘써, 경전 수백 만 자를 외우고, 의미 또한 잘 이해했다.” 서역 쿠처(庫車. 지금의 중국 신강성에 있음. 구마라집의 고향)에서 태어난 그는 310년 전란에 휩싸인 낙양에 도착했다. 불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신비한 주문에도 능통하고, 귀신을 부릴 수 있었다. 삼씨로 짠 기름을 연지胭脂와 섞어 손바닥에 바르면 천 리 밖에서 일어난 일도 손바닥과 얼굴이 대면한 것처럼 환히 알았다. 낙양에 사찰을 건립하고자 했으나 때마침 유요의 군대가 낙양에 침입했기에 절을 세울 수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 숨어 지내며 변화를 관망했다. 그러다 곽흑략이라는 장군을 통해 후조의 창건자 석륵을 알게 됐다.
후조가 전조 유요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길 것임을 정확히 예측한 불도징에 감탄한 석륵은 그를 가까이 했다. 석륵은 점차 불교도로 변해 갔다. 자신의 전생을 알고, 죽을 날짜를 예견하며, 발우에서 푸른 연꽃을 피워내고, 가슴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내장을 밖으로 꺼냈다 넣었다 하는 불도징에 대한 존경과 두려움이 주된 이유였다. 석륵에 이어 석호 역시 그를 존경했다. 불도징이 신이新異를 펼친 것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교를 널리 퍼트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불도징은 도술과 지혜로 백성들의 고통도 들어주었다. 글자를 모르는 일반 대중에게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불교를 알렸다. 이런 점에서 그는 참으로 위대한 포교사이자 전도자였다.
신이를 통한 전도傳道를 통해 불도징은 후조의 수도 업鄴을 중심으로 한 화북 지역에 893개의 사찰을 건립했다. 이전에 불교를 접한 적이 없는 여러 민족들도 불교로 인도했다. 일만 여명의 제자도 길렀다. 한족인 도안·축법아, 인도 출신인 불조佛調, 소그드(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 태생의 수보리須菩提 등이 그의 제자다. 그래서 “석륵·석호의 지독한 학정과 그릇됨을, 만약 불도징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감히 말할 수 없었으리라. 백성들은 날마다 이익과 은혜를 입으면서도 몰랐을 따름”이라며 “불교를 성대하게 포교함에 있어 그와 비교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불도징을 높이 평가한 『고승전·권9·축불도징전竺佛圖澄傳』의 기록은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 외국에서 중국에 온 출가자들이 처음부터 반야학이나 선법禪法으로 불교 홍포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개 어느 정도 신이적新異的인 풍도風度를 지니고 있었다.
“(안세고는)학문을 좋아하여 외국의 전적, 별들의 운행에 관한 학문[七曜], 오행, 의술, 이술異術과 날짐승 들짐승의 소리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중천축국 출신 담가가라는)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깨달음에 뛰어났다. 자질과 외모도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책을 한 번 읽기만 해도 글의 의미를 완전히 알았다. 4베다론, 자연지리[風雲], 별자리 학문[星宿], 도참[圖讖], 운명의 흐름[運變] 등에 대해 두루 알았다. 천하의 모든 이치가 다 내 몸 안에 있다고 스스로 말했다.”
“(강승회는)사람됨이 관대하고 올바르며 학식과 도량이 있었고, 진실로 배우기를 좋아했다. 삼장을 통달했고, 육경을 널리 연구했으며, 천문天文과 도참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없었다. 사물의 중요한 부분과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분명히 구별했으며, 글쓰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안세고 담가가라 강승회 등은 의술·별자리·도참 등에도 통달하고 있었다. 외국에서 온 출가자들의 뛰어난 학식도 불교가 중국적 변용을 달성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특히 운명을 미리 내다보는 그들의 능력은 220년부터 589년까지 이어진 분열과 혼란에 시달리던 중국인들을 매료시키고도 남았다.
알다시피 십육국 시대 당시 양자강 이북은 분열과 전쟁·전쟁과 분열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하나의 나라가 세워지고 멸망할 때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라가 이러한 데 개인의 생명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지속적인 전쟁이 일상日常인 시대에 태어난 대중의 생활이란 항상 불안에 시달리는 삶 바로 그것이다. 지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사회적 동요에 휩쓸려야 하고, 개인적 불안을 겪어야 한다. 높은 관직에 있다고 목숨이 위태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억만금이 목숨을 보장해주고 연장해주는 부적符籍도 아니다. 어제는 한 나라의 재상宰相이었다 오늘은 노비로 전락하는 급락急落과 죄인이었다 한 나라의 고관으로 출세하는 급등急騰의 삶을 혼란·분열·전쟁 속에서 생생히 목도한 백성들은 운명과 행운을 믿게 되었다. 당시 최대의 행운을 가져다 줄 신은 옥황상제玉皇上帝나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아니었다. 그들의 신력은 이미 바닥이 난 상태였다.
믿을 곳이 불교 이외에는 없었다. 특히 승복을 입은 신이승神異僧들은 살아있는 붓다로 대중들의 열렬한 귀의처가 됐다. 군주들에게는 전쟁의 승패를 예견해주고, 백성들에게는 안심安心과 행운을 가져다준 불도징·담무참 같은 신이승들은 역경을 지원하고 불교를 후원했던 십육국의 군주들과 함께 불교가 중국을 정복하는 과정에 중요하고도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혼란의 시대를 맞아 불안으로 흔들리던 백성들을 안심시켜 불교의 자항선慈航船에 태운 사람들이다. 이들로 말미암아 불교의 내포內包는 깊어졌고, 외연外延은 넓어졌다.
중국 신강성 투루판에 있는 화염산. 소설 <서유기>의 무대 가운데 하나다.
역경과 외국 출가자들의 노력 못지않게 중국불교 발전을 견인한 것은 중국인들(출가자·재가자)의 노력이었다. 불교를 위해 목숨을 버린 이도 있었다. 주사행朱士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영천穎川에서 태어난 그는 출가해 수계를 받은 최초의 한인漢人이다. 국가가 공인한 것은 아니었다. 불교 홍포에 뜻을 둔 그는 오로지 경전 연구에만 몰두했다. 낙양에서 『도행반야경』(『소품小品』)을 강의하다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고 뜻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음을 알았다. “이 경은 대승의 요체다. 번역이 이치를 다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맹세코 뜻을 세워 목숨을 버리더라도 멀리 가서 대품을 구할 필요가 있겠다.” 마침내 위나라 감로 5년(260) 옹주(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영제永濟)를 출발해 타클라마칸 사막의 유사流沙를 넘어 우전(지금의 신강성 허텐和田)에 도착했다. 20여 년 동안의 고생한 끝에 마침내 산스크리트어로 된 정본正本 90장章을 구했다.
몇 년 뒤인 서진 태강 3년(282) 제자 불여단不如檀에게 범본梵本을 줘 낙양에 돌아가게 했다. 불여단이 경전을 갖고 가지 못하도록 우전국 사람들이 왕에게 참소했다. 주사행이 불교 홍포 이외 다른 뜻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타오르는 장작불에 경전을 던졌다. “한지漢地에 대승의 가르침이 유통되고자 한다면 경전은 당연히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만약 가피가 없다면 운명이니 그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서원을 마치고 불에 던졌다. 글자가 한 자도 타지 않았다. 표지도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신이를 직접 본 우전국 왕과 사람들은 감복했다. 경전을 하남성 진류陳留로 가져갈 수 있었다. 291년 그곳의 수남사水南寺라는 절에서 거사 축숙란과 서역에서 온 스님 무라차가 함께 번역했다. 이것이 『방광반야경』(20권)이다. 그러나 주사행은 돌아오지 못하고 우전에서 입적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80세. 다비했으나 몸이 불타지 않고 온전했다. “만약 참으로 도를 얻었다면 법法대로 무너지리라!” 대중들이 말하자 법체法體가 흩어졌다.
법현法顯 역시 불교를 위해 몸을 던진 사람이다. 3세에 출가해 20세에 비구계를 수지한 그는 항상 율장이 완전하지 못함을 개탄했다. 동진 융안 3년(399) 도반들과 천축을 순례하고 계율 관련 책을 구해오기로 뜻을 모으고 장안(지금의 섬서성 서안)을 나섰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64세. 돈황에서 사막을 건너는데 필요한 물자를 구했다. “위로는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없고, 아래로는 달리는 짐승 한 마리 없는” 타클라마칸 사막 항해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모래! 망망茫茫해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없고, 갈 곳을 알 수가 없는” 죽음의 늪과도 같았다. “오직 죽은 사람의 해골만이 표지가 될 뿐인” 사막을 가로질러 선선 → 오이 → 우전에 도착했다. 우전에서 카라코람 산맥을 넘어 파키스탄 북부에 자리한 도시 길기트, 파키스탄 북부의 탁실라, 파키스탄 서부에 위치한 페샤와르, 아프가니스탄 동부의 잘랄라바드 등을 거쳐 인더스 강 서쪽 연안의 세피드쿠Sefid-Kuh 산맥(슐라이만 산맥의 동북부)에 도착했다. 『고승법현전』(『불국기』라고도 한다)에 나오는 소설산小雪山이 바로 이곳이다.
함께 구법여행에 나선 혜경慧景이 소설산에서 “사납게 기승을 부리는 한풍寒風을 맞아 입에서 흰 거품을 토했다.” “나는 여기서 살아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빨리 갈 수 있을 때 가십시오. 우물쭈물하다 함께 죽어서는 안 됩니다.” 말을 마친 혜경이 입적했다. 법현은 그의 몸을 어루만지며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본래 목적을 이루지도 못했는데 중도에서 입적하니 이 무슨 일이오!” 여유를 갖고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도반의 죽음을 뒤로한 법현은 계속 나아가 마투라를 거쳐 중인도에 위치한 도시 상카시에 도착했다. 404년(69세)이었다. 장안을 출발해 5년 만에 상카시에 다다른 그는 인도에서 6년 정도 머무르며 사위성·왕사성·영취산·대보리사·파트나 등 불교 유적을 두루 탐방하고 범어를 익혔다.
409년 10월경 스리랑카로 가 그곳에서 2년 동안 경經을 필사하며, 미사색부의 율장 등을 구했다. 411년 귀로에 올랐다. 인도네시아를 거쳐 동진 의희 8년(412년 7월) 그의 나이 77세 때 산동성 청주의 뇌산牢山 남쪽 해안에 도착했다. 413년 동진의 수도 건강(남경)으로 간 그는 인도에서 필사하고 구해온 경·율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도량사道場寺에서 『대반니원경』(6권), 『마하승기율』(40권) 등을 불타발타라와 함께 옮겼다. 당시 인도 구법여행의 감회를 적은 글이 『법현전』에 남아있다. “지나간 곳을 돌이켜 보면 나도 모르게 땀이 솟아 흐른다. 몸을 아끼지 않고 위험한 곳을 밟고 험준한 곳을 건넌 이유는 오로지 우직하게 마음먹은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반드시 죽는 곳에 목숨을 던져 만분萬分의 일一의 희망을 달성했다.” 법현의 술회述懷는 중국불교가 왜 발전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중국불교 발전에 끼친 공적으로 보자면 고승이자 명승인 [고승과 명승은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혜교는 『고승전』 권14에서 말했다. “앞선 시대 이래로 전기傳記에는 흔히 ‘명승名僧’이라는 말을 붙였다. 그러나 ‘명名’이라는 것은 본래 본질에 비하면 손님이다. 수행을 실질적으로 닦아도 빛을 감추면 덕과 경지가 높아도 이름난 것은 아니다. 반면 공덕이 적어도 시대에 영합하면 이름은 높아도 (덕·경지가) 높은 것은 아니다. 이름만 알려지고 경지가 높지 않은 이는 본래 (이 책 즉 『고승전』에) 기재될 사람이 아니다. 경지가 높으면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 사람들을 지금 여기 기록해 놓았다. 때문에, ‘명名’자를 없애고 ‘고高’자를 사용해 ‘고승高僧’이라 했다.”] 도안을 빼놓을 수 없다. 불도징의 제자인 그가 중국불교에 기여한 업적은 크게 3가지다. 첫 째는 반야경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대단한 성취를 이뤘다. 그는 『도행반야경』에 정통했다. 게다가 『방광반야경』과 『도행반야경』을 비교 연구해 『집이주集異注』라는 책을 펴냈다. 책은 현존하지 않지만 도안의 실증적인 연구태도를 엿볼 수 있다. 365년부터 379년까지 양양에 머물 때는 매년 두 차례씩 『방광반야경』을 강의했다. 특히 만년에는 『방광반야경』의 산스크리트어본을 찾아내 번역자를 불러 다시 교정하고 번역하도록 했다. 『마하발라야바라밀경초』라고 이름 붙여진 이 책도 산일되고 전해지지는 않는다. 반야경 연구를 통해 도안은 ‘육가칠종’의 수준을 뛰어넘는 독자적인 공空사상을 구축했다.
두 번째는 역경과 경전목록 편찬에 기여했다. 역경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 ‘오실본삼불이五失本三不易’론을 제창했으며, 양양에 머무를 당시 유행하던 번역본을 광범위하게 수집해 『종리중경목록 綜理衆經目錄』이라는 목록집目錄集을 편찬했다. 후대의 경전목록 편찬자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제목·번역자·번역시기를 알 수 있게 제공했다는 점에서 도안의 목록집은 대단한 가치가 있다. 비록 책의 원본은 지금 전해지지 않지만, 승우가 편찬한 『출삼장기집』에 내용이 실려 전한다. 경전을 서분序分·정종분正宗分·유통본流通分의 3분 과목으로 구분한 것도 도안이 처음으로 제안했다.
세 번째는 의궤의 제정·정립에 힘썼다. 향 바치는 법, 경을 강의하기 위해 단상에 오르는 법, 불상에 예배하는 법, 식사하는 법, 한 달에 두 번씩 행하는 포살에 관한 법 등을 정립했다. 동시에 율전 번역에 관심을 가지고 독려했다. 특히 구족계를 받은 출가자들은 모두 석가모니의 제자이므로 성씨를 ‘석釋’씨로 해야 된다고 지적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출가자들은 대개 스승의 성을 따랐다. 도안이 제안한 이후 출가자들은 기본적으로 석씨를 성으로 사용하게 됐다.
역경승·신이승神異僧·중국승中國僧 가운데 중국불교 견인의 일등공신은 누구일까? 혜교(慧皎. 495∼554)는 역경승을 꼽았다. 『고승전·권14』는 말한다.
“후한 명제 영평 10년(67)부터 양나라 천감 18년(519)에 이르는 453년 동안 이 책(『고승전』)에 수록된 257명과 방계 200여 명의 공적을 10개 예例로 나누었다. 역경, 의해義解, 신이神異, 습선習禪, 명률明律, 유신遺身, 송경誦經, 흥복興福, 경사經師, 창도唱導가 그것이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이 동토에 유입된 것은 무릇 번역한 사람들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들은 자기 목숨을 걸고 몸을 잊은 채, 험난한 사막을 넘거나 출렁거리는 드넓은 파도를 배를 타고 건너와, 오로지 가르침의 홍포에 헌신했다. 중국 땅이 밝아진 것은 바로 이런 노력에 의해서였다. 마땅히 그 공덕을 숭상崇尙해야 하기에 책의 첫 머리에 배치했다.”
혜교의 지적과 평가는 정확하다. 후한에서 시작된 한역漢譯은 남북조·수나라·당나라를 거쳐 북송까지 줄기차게 계속됐다. 때로는 국가의 지원으로 활황活況을, 때로는 전쟁 등의 원인으로 불황不況을 맞았다. 그러나 “번역해야 된다”는 그 생각이 사라진 적은 거의 없었다. 집중적으로 이뤄진 시기와 정체된 시기를 종합하면 후한에서 북송까지 대략 900년, 원나라 청나라 때 이뤄진 역경까지 감안하면 대략 1500년 동안 중국인들은 산스크리트어·티벳어로 된 불교관련 전적들을 끊임없이 중국어로 옮겼다. 번역은 20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다. 티벳어에서 중국어로의 불전佛典 번역은 지금도 이뤄지고 있다. 거대한 문화적 사업인 역경이 있었기에 지금의 한역漢譯불교와 이에 기반 한 동아시아불교가 태동·발전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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