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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 이야기]
세 가지 성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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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해  /  2018 년 10 월 [통권 제66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91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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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식 불교에는 삼성론三性論이라는 것이 있다. 성품이 세 가지라는 논의이기도 하고, 참된 성품은 세 가지가 아니라는 논의이기도 하다. 세 가지 성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비유를 들어 이해를 도와왔다. 마麻, 노끈, 뱀이 3개의 성품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어둑해진 저녁에 길을 가던 한 사람이 뱀인 듯한 것을 보게 되어 깜짝 놀랐다. 도망치려다가, 멈춰서 지켜보니, 뱀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가까이 다가서서 살펴보니, 그것은 노끈이었다.

 


소설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 일행을 모사한 조각. 중국 신강성 투루판에 있는 베제크릭 석굴 부근에 있다.

 

무서워 도망치려고 한 뱀은 정감情感의 대상이니, 우리가 변별하고, 계산하고, 가지려하거나 피하려고 하면서 집착하는 대상이다. 대상의 이러한 변계되고[遍計] 집착되는[所執] 상태[性]를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고 부른다. 뱀이 아니라고 확인된 노끈은 우리가 가지려고 할 만한 것도 아니고 피하려고 할 만한 것도 아니니, 정감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자 짐을 묶는데 쓰이는 것이니, 사람이나 짐 같은 타자들에 대해 의존하여 생긴 대상이다. 대상의 이러한 타자[他]에 의존[依]하여 생기한[起] 상태[性]를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고 부른다. 생각이 더 깊은 사람은 마麻에서는 노끈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도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마麻로부터는 마승(麻繩, 삼의 껍질로 꼰 노끈)만이 아니라, 마자(麻子, 삼의 씨), 마발(麻勃, 삼의 꽃이나 꽃가루), 마포(麻布, 삼에서 뽑아낸 실로 짠 천), 마자유(麻子油, 삼의 씨를 짜서 만든 기름) 등이 얻어진다. 이렇게 각각으로 분별되어 분화하기 이전의 근원적이고도 원만하게 진실한 상태가 마麻의 상태이다. 마麻의 이러한 원만하게[圓] 진실[實]을 성취하고[成] 있는 상태[性]를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 부른다.

 

2.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마麻도 역시 분별되어 분화된 것이 아닌가? 마麻는 벼와 구별된다. 노끈도 새끼줄과는 구별된다. 마麻는 호마(胡麻, 참깨)와 구별된다. 마자유(麻子油, 삼의 씨를 짜서 만든 기름)도 호마유(胡麻油, 참깨를 원료로 하여 짜낸 기름)와는 구별된다. 그러니 마麻의 상태가 ‘분별되어 분화하기 이전의 근원적이고도 원만하게 진실한 상태’라는 말은 일정한 한계를 지닌 말이 아닌가? 그렇다. 마麻는 벼나 호마와 구별되는 말이니, 이미 분별로부터 얻어진 말이고, 따라서 마의 상태가 원성실성이라는 말은 이미 일정한 한계를 지닌 말이다. 그래서 그 말은 단지 비유일 뿐이고, 비유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일정한 한계를 벗어난, 곧 모든 분별을 떠난 상태를 지칭하는 말은 무엇인가? 마麻도 존재하는 것이고, 벼도 존재하는 것이고, 호마도 존재하는 것이니, 존재나 존재자라는 말이 모든 분별을 떠난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 되지 않을까? 물론 아니다. 사람들은 존재나 존재자가 무와 구별되는 말이고, 그래서 분별로 얻어진 말이라는 것을 이미 넉넉히 알고 있다. 그러면, 존재 대신 무가 모든 분별을 떠난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 아닐까? 물론 아니다. 무가 존재와 구별되는 말이고, 그래서 분별을 통해 얻어진 말이라는 것도 사람들은 이미 넉넉히 안다. 모든 분별을 떠난 상태가 존재의 상태도 아니고, 무의 상태도 아니라면, 그러면 그것은 대체 어떤 상태인가? 이 물음에 이미 답이 있다는 것을 청문(聽聞, 듣고 또 들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차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청문승聽聞乘의 경지에는 도달해 있을 것이다. ‘모든 분별을 떠난 상태는 있다고 여겨지는 상태도 아니고, 없다고 여겨지는 상태도 아니다. 그런 상태를 다른 말로 공空이라고 한다.’ 모든 분별을 떠난 상태는 그렇다면 공空의 상태이다.

 

3. 그런데 청문승의 경지를 이미 넘어선 사람이라면 미소를 지으며 내심 말할 것이다. ‘공도 역시 존재나 무와 구별되는 말이니, 분별로 생긴 말입니다. 공空도 공해야空 합니다.’ 지당한 말씀이다. 공空이라는 말도 역시 모든 분별을 떠난 상태에 대한 비유일 뿐, 이 상태 자체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청문승은 연각(緣覺, 인연에 따른 생주이멸의 깨우침)을 시도할 것이다. 인연에 따른 생성[生]과 소멸[滅]이 바로 공空이라는 것을, 또한 인연에 따른 머묾[住]과 변화[異]가 바로 공空이라는 것을, 곧 생주이멸이 모두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상태라는 것을 체험으로 확인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확인을 위해 말을 참고 침묵을 행할 것이다.

 

하지만 글 쓰는 사람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을 통해 말하지 않으면 글 쓰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연을 통한 생주이멸의 상태가 의타기성이다. 생주이멸의 상태이기에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상태가 원성실성이다. 현재에 있는 것에 가질만한 것이나 피할만한 것이 있는 상태가, 또 미래에 있는 것에 고대할만한 것이 있거나 과거에 있는 것에 한탄할만한 것이 있는 상태가 변계소집성이다.

 

4. 이쯤 되면, 다시 한 가지 의문이 더 생겨날 수도 있다. 3성이 세 가지 상태라면, 대체 누구의 상태이고 무엇의 상태란 말인가? 3성은 서양 철학의 언어로 말하면 존재자들이 갖는 상이한 세 가지 존재방식을 말한다. 그런데 그 세 가지 존재방식은 세 가지 이해방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이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세 가지 이해방식은 곧 인간의 세 가지 존재방식이 된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자가 이해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물(존재자)에 대한 세 가지 이해방식이 곧 사물이 얻게 되는 세 가지 존재방식이 된다. 결국 인간에게서나 사물에게서나 이해방식들과 존재방식들은 같은 것인데, 하이데거는 이 같은 것들을 본래성, 진정성, 비본래성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자세히 논할 수는 없자만, 그것들은 일정한 정도로 유식이 말하는 세 가지 성품이 상응한다. 이해방식이 곧 존재방식이라는 하이데거의 생각을 듣는 사람들은 불교의 유심론을 떠올리면서 그 의미를 단박에 알아차릴 것이다. ‘옳거니, 나의 마음의 상태가 곧 사물의 상태이니, 사물이 얻고 있는 성품은 내가 유지하고 있는 마음의 성품과 다른 것이 아니니라.’ 3성론은 마음의 성품만을 말한 것도 아니고, 사물의 성품만을 말한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의 성품을 말한 것이다.

 

5. 유식은 번뇌와 무명에서 벗어나 열반과 지혜에 도달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그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분별지無分別智를 거듭하여 닦고 익힘으로 말미암아, 근본식 중의 두 가지 무거운 장애를 단절함으로써, 능히 의타기依他起 상의 변계소집遍計所執을 버리고, 능히 의타기 상의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얻는다. 번뇌장[번뇌의 장애]을 전환하여 대열반을 얻고, 소지장[지식의 장애]을 전환하여 대지혜를 증득한다.”(주1)

여기서는 무분별지無分別智를 거듭하여 닦고 익힘으로 말미암아 원성실성을 얻는다고 하였다. 또한 의타기성(연기성) 위에 놓인 변계소집성(계산집착성)을 버리는 것이 원성실성을 얻는 방안이자 두 장애에서 벗어나 대열반과 대지혜를 얻는 방안이라고 하였다.

 

 

지혜와 성품의 이행 단계

이해방식

분별지

무분별지

후득(분별)

존재방식

변계소집성

원성실성

의타기성

조사들의

비유

이것은 물이고, 저것은 산이다.”

이것은 물이 아니고, 저것은 산이 아니다.”

이것은 물이 아니면서 물이고, 저것은 산이 아니면서 산이다.”


 

그런데 ‘의타기성 위에 놓인 변계소집성’을 버린다는 말은 의타기성만을 남겨서 이 의타기성을 얻는다는 말이 아닌가? 아니다. 표현상으로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치상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다. ‘의타기성 위에 놓인 변계소집성’을 버린다는 말은 (분별지를 버리고 무분별지를 얻듯이) 변계소집성을 버리고 원성실성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의타기성은 후득분별지에 상응하기 때문에) 분별지로부터 후득분별지로의 직접적 이행이 절차상 불가능하듯이, 변계소집성으로부터 의타기성으로의 직접적 이행도 절차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분별지 이후에나 후득분별지를 얻게 되듯이, 원성실성을 얻은 이후에나 의타기성을 얻게 된다. 변계소집성에서 곧바로 의타기성으로 이행해 갈 수는 없는 것이다.

 

변계소집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자아와 대상이다. 이것들은 연기된 것이므로 의타기성을 지닌 것이지만, 정감에 의해 의타기성을 상실하고 변계소집성만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변계소집된 자아와 대상이 모두 ‘생주이멸의 상태에 있으므로 공’(원성실성)이라는 것을 체득하게 되면, 자아와 대상은 공에 토대를 둔 분별된 성품(의타기성)을 지닐 수 있게 된다. 원성실성에는 변계소집성의 특징인 아집이나 법집이 더 이상 없고 제법의 진실성만이 있다.(주2) 의타기성에는 분별된 성품이 있되 변계소집된 성품은 없다.

 

아집과 법집을 버리는 것이 수행이 지향하는 것인데, 앞서 언급한 서양 철학자는 그의 문화권에 맞게, 그것이 양심의 소리를 듣고 죽음을 선취하는 일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세속에서 벗어나라는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이 법집을 버림의 방안이고, 죽음을 선취하여 자아의 지속에 대한 욕망을 버리는 것이 아집을 버림의 방안이라는 것이다. 그가 비록 서양철학의 거장일지라도, 아공과 법공에 대해 사유하고 있는 이상, 그를 서양의 수도승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주)
(주1) 『成唯識論』, T1585_.31.0051a05-a08: 由數修習無分別智斷本識中二障麤重故能轉捨依他起上遍計所執及能轉得依他起中圓成實性. 由轉煩惱得大涅槃. 轉所知障證無上覺. 『성유식론 외』, 김묘주 역주, 동국역경원, 2008, pp.379∼380.
(주2) 『成唯識論』, T1585_.31.0046b10: 二空[我空과 法空]所顯圓滿成就諸法實性名圓成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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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해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철학박사, 성균관대 철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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