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법문 해설]
반야바라밀의 중도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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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5 년 8 월 [통권 제28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590회 / 댓글0건본문
팔만사천 번뇌와 양변
최근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퀴어축제를 놓고 우리사회가 한바탕 홍역을 앓았다. 옛날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제 동성애도 소수자에 대한 인권문제가 되었고, 존중받아야할 성적 취향이 되었다. 나아가 우리들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사안은 비단 동성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는 갈수록 전통적 가치에서 새로운 가치로, 획일적 사회에서 다양성의 사회로, 일사분란함에서 자유와 개성이 존중되는 열린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수많은 주의와 주장들이 제기되고, 다양한 견해들이 충돌을 빚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 견해에 대한 집착과 그것에 맞서는 타인의 주장이 충돌하면서 사람들은 번뇌에 빠져 들고, 사회는 논쟁과 분열에 휘말리면서 여러 가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불교는 세상의 평화와 중생의 안락을 추구하는 종교인만큼 이런 갈등과 번뇌를 해소할 수 있는 가르침을 제시해야 할 책무가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다양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수많은 주의와 주장에 대해 일일이 파악하고, 다양한 취향과 사안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하는 것일까?
만약 번뇌와 고통을 유발하는 원인이 수없이 다양하다면 그렇게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번뇌와 갈등을 유발하는 근원적인 원인이 따로 있다면 그것을 진단하고 그에 맞는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불교가 해야 할 처방이다.
그렇다면 중생들이 갈등하고 번뇌하는 것은 수십, 수만 가지의 원인에 의해서 생겨난 것일까? 성철 스님은 이 문제에 대해 답하기 위해 『대비바사론』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인용한다. 즉, “모든 나쁜 견해가 비록 많은 종류가 있으나 이 두 가지 종류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중생들은 날마다 수만 가지 이유로 갈등하고, 수만 가지 사안으로 싸우며 괴로워하지만 갈등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 보면 두 가지로 명제로 압축된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 명제에 대해 『대비바사론』은 “세간의 사문과 바라문 등이 의지하는 견해는 모두 두 가지 견해에 들어가나니, 유견(有見)과 무견(無見)이 그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무엇이 ‘있다’는 ‘유견(有見)’과 무엇이 ‘없다’는 ‘무견(無見)’으로 대별되는 두 가지 견해의 대립에서 수만 가지 갈등이 생겨나고, 수만 가지 번뇌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모든 갈등의 뿌리가 되는 유와 무는 ‘모’ 아니면 ‘도’라는 흑백논리이며, 옳고 그름으로 양단하는 이항대립적 사유방식이다. 이와 같은 이분법적 사유방식은 중생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프리즘으로 작동한다. 유・무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 전체는 나와 너로 분리되고, 진보와 보수로 갈등하고, 내 편과 네 편으로 대립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중생들이 겪는 모든 번뇌의 원인은 이원적 사유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대비바사론』의 설명이다.
성철 스님은 이런 관점에 입각하여 “나쁜 견해, 즉 변견이 비록 종류는 많지만 결국은 단견(斷見)이 아니면 상견(常見)이고, 상견이 아니면 단견”이라는 두 가지 극단적 사유패턴으로 압축된다고 설명했다. 중생은 유와 무로 분열되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고, 유와 무라는 분별적 사유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무는 단지 있음과 없음이라는 두 가지 범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분법적 사유를 대표하는 개념으로 확장된다. 이 때문에 『대비바사론』은 모든 분열과 갈등을 넘어서는 처방으로 중도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즉, “모든 외도의 나쁜 견해가 단견과 상견의 종류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無不皆入斷常] 모든 부처님께서 이것을 대치하기 위해 중도를 선언했다.”는 것이다.
비록 중생들이 수많은 견해를 일으켜 갖가지 희론(戱論)을 일삼고, 그로 인해 고통 받고 있지만 그 내용을 뜯어보면 유로 표현되는 상견(常見)과 무론 표현되는 단견(斷見)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들이 앓고 있는 번뇌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유와 무로 분열된 인식을 치유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중도(中道)를 깨닫는 것이다. 유・무로 대립하는 양변을 벗어나는 것이 중도이고, 그와 같은 중도를 바로 알면 불법의 궁극적 이치를 체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중생들의 번뇌가 팔만 사천 가지나 되고, 『중론』에서도 여덟 가지의 대립개념을 열거하고 있지만 “부처님은 중도를 말씀하실 때는 오직 유・무 양변만 가지고 말씀하셨다.”는 것이 성철 스님의 설명이다. 중생들이 다양한 견해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 내용은 유견과 무견이라는 대립의식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중도란 그와 같은 두 가지 극단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회복하는 가르침이다.
양변을 떠난 중도가 반야바라밀
조계종의 소의경전 『금강경』은 반야부를 대표하는 경전이다. 이들 반야부 경전의 이름에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는 단어가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 『금강반야바라밀경』, 『인왕반야바라밀경』, 『대반야바라밀경』,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등이 그것이다. 대승불교의 주요한 사상이자 육바라밀 중에 하나인 반야바라밀은 범어 ‘프라즈냐 파라미타(Prajñā pāramitā)’를 음사한 말이다. 한역으로는 ‘대지도(大智度)’ 또는 ‘지혜도피안(智慧度彼岸)’으로 의역되는데, 그 뜻은 ‘지혜로써 저 언덕으로 건너감’을 의미한다.
여기서 ‘반야’로 표현되는 ‘큰 지혜’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혜란 탐진치 삼독 중에서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치(癡)’에 대응하는 말이다. 초기경전의 가르침에 따르면 어리석음(癡)이란 삼법인과 사상제와 같은 불교의 진리를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반야바라밀에서 말하는 ‘반야’ 역시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는 것을 의미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용수보살이 집필한 반야부 경전의 주석서 『대지도론』에 잘 설명되어 있다.
『대지도론』은 “있다[有]는 견해와 없다[無]는 견해가 남김없이 소멸된 제법실상이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유와 무로 갈라져 대립하는 양변은 중생의 세계이고, 어리석음의 세계이고, 무명의 세계이다. 반면 그와 같은 양변에서 벗어나는 것은 중도실상의 세계이고, 구경의 경지이고, 불법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용수 보살은 “모든 법이 있음이 한 변이고 모든 법이 없음이 한 변이니, 이 양변을 떠나 중도를 행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라고 단언했다. 중생들의 고통은 유・무로 대립되는 양변에서 비롯됨으로 그와 같은 변견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중도정견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처럼 용수보살은 중도를 깨닫는 것이 곧 궁극적 실제를 깨닫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단견과 상견이라는 변견을 떠나 중도를 체득하는 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정의했다. 『대지도론』에 따르면 “항상함도 한 변[常是一邊…]이고 단멸함도 한 변이니[斷滅是一邊…], 이 양변을 떠나 중도를 행함[行中道]이 반야바라밀”이라고 했다. 수만 가지 차별적 견해는 결국 유와 무, 단과 상이라는 두 가지 극단으로 귀결된다. 반야바라밀이란 그와 같은 단견과 상견으로 대별되는 극단적 사유의 늪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반야부의 여러 경전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용수보살의 근본사상은 ‘지혜로써 고해를 건너가는’ 반야바라밀에 있다.
그 반야바라밀에 대해 『대지도론』은 “유(有)를 떠나고 무(無)를 떠나며, 유가 아닌 것도 떠나고 무가 아닌 것도 떠나서 어리석음에 떨어지지 않고 능히 바른 도를 행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다.”라고 설명했다.
결국 반야바라밀에서 지혜로써 건너가야 할 세상은 서방으로 십만 억 국토나 떨어져 있는 서방극락도 아니고, 수만가지 번뇌의 강을 일일이 다 건너가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 모든 번뇌를 건너갈 수 있는 반야의 지혜란 유와 무로 대변되는 양변의 강을 건너가는 것이다.
양변의 강은 단절의 강이며, 이분법적 사유의 강이며, 경쟁과 대립의 강이다. 그로 인해 조국 강토의 허리는 남북으로 갈라졌고, 민족은 천만 이산가족으로 흩어졌으며, 사회는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 척을 지고 살아간다.
따라서 바라밀에서 ‘건너감’이란 광활한 태평양을 건너가거나 십만 억 국토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있음과 없음, 진보와 보수로 갈라진 양변의 강을 건너가는 것이다. 이쪽 언덕[此岸]이 분별과 양변의 언덕이라면 저쪽 언덕[彼岸]은 양변이 사라진 중도의 언덕이다. 있음과 없음으로 대변되는 양변의 강을 건너 중도의 언덕에 이르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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