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및 특별기고]
성철 스님을 보는 시각에 대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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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배 / 2013 년 7 월 [통권 제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7,337회 / 댓글0건본문
성철 스님을 보는 시각도 다양해야 한다
백련불교문화재단은 1995년부터 3년 여 간 계간지 「고경」을 발간한 바 있다. 당시 창간호에서 박성배 교수는 ‘성철 스님을 보는 시각에 대해’라는 주제로 장문의 특별기고를 했었다. 글에서 박 교수는 성철 스님과의 인연과 스님의 사상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불자와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박 교수의 글을 3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 편집자
큰스님의 ‘백일법문’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선승(禪僧)이 왜 저렇게 말이 많으냐”는 것이었다. 말이 적어야 선승이라는 발상은 어디서 나왔을까. 불교를 처음 시작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은 참으로 말을 많이 하셨다.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팔만대장경을 보면 이를 금방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몇백 년 동안 불교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소위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초기에 실질적인 기초작업을 튼튼히 한 분이 다름 아닌 나가르주나(Nagarjuna, 150~250 A.D.) 즉 용수 보살이었다. 그 분 또한 많은 말을 하셨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을 비롯한 그의 많은 저술들을 보면 이를 곧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대승불교 운동을 성공리에 완성시키기 위하여 많은 보살들이 출현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다. 이런 사실은 모두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이런 일은 중국, 한국, 일본은 물론 세계의 어디서나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논지는 결코 말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안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입을 열지 아니한 성자들도 무수히 많다, 문제는 말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왜 말을 했으며, 또 무슨 말을 했는지를 똑바로 아는 일일 것이다.
같은 점이 더 많은 보조와 성철
그 때에 왜 ‘백일법문’이 필요했는지 그리고 ‘백일법문’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그것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시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고, 사회가 병들어 가고 있고, 사람들이 갈팡질팡 어디로 가야 할 줄 모르고 있는데, 눈 밝은 사람들이 어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일단 입을 연 이상 그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바닥을 볼 때까지, 줄기차게 밝힐 것을 밝히며 그리고 한번 밝히기로 작성한 이상, 말은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명료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잘 알아들어 의심 없이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견(正見)과 정언(正言)과 정업(正業)의 길을 걷는 불제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부처님과 용수보살이 그 좋은 모델인 것이다. 불법을 투철하게 깨달아 지혜와 자비를 함께 갖춘 도인이라고 존경받는 선지식 스님들이 이렇게 하지 않고 어떻게 달리 세상을 살다가 갈 수 있을 것인가? 바른 말이 필요한 때에 소위 선승이 되기 위해서 말하지 않는 것만을 장기로 삼는다면 그런 맹목적 선승은 어디에다 써먹을 선승이며, 그런 선승들이 많을 때 그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말을 많이 하면 선승이 아니라든지, 선승이 되기 위하여 말을 않는다는 사고방식은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잘 나타내고 있다. 불행히도 이 사고방식이 지금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다.
“선승은 모름지기 주장자 법문을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한국불교계에 널리 퍼져 있는 고질병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법상에 올라가 대중들에게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태연히 하고 있는 선승들이 많다. 이러한 폐풍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유능한 젊은이들이 지금 불교계를 떠나고 있으며, 또한 불교계에 들어오기를 꺼리고 있는지를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다. 오대산 월정사에 계셨던 탄허 스님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사람들이 보조 스님의 어록을 읽고 “본분종사(本分宗師)의 법문은 아닌 것 같다”고 평하는 데 대해서 탄허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보조법어에 주장자 법문이 없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의 이러한 보조평은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을 듣고 “선승이 왜 저렇게 말이 많아” 하는 평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는 것 같다.
요즘 학자들이 보조 스님과 성철 스님을 도식적으로 대조시킬 때도 역시 비슷한 사고방식이 발견된다. “한 분은 돈오점수요, 또 한 분은 돈오돈수니까 두 분은 완전히 다르다”고들 말한다. 이러한 대조는 매우 피상적인 관찰에서 나온 말이다. 사실 두 분은 다른 점보다는 같은 점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첫째, 우리는 두 분이 모두 다 주장자 법문만을 장기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둘째로 두 분은 모두 시대와 사회를 그 나름대로 걱정하신 분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간혹 불교를 모르는 사람들은 스님들이 삭발하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사회를 외면하면서 산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매우 피상적인 관찰일 뿐이다. 사실 많은 스님들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하여 걱정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저술을 읽어보면 곧 알 수 있다. 세속에서 살아야 세속을 더 잘 알고 세속을 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일종의 우상일 것이다. 셋째로 지적되어야 할 것은 두 분이 다 당신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무척 노력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들의 사상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계속해서 글을 쓰는 자세에서 곧 엿볼 수 있다. 그래서 두 분이 선을 강조하면서도 주장자 법문에 안주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같은 병인데도 양의의 진단과 한의의 그것이 다르듯이, 시대와 사회의 병에 대한 지도자들의 처방도 그 입장에 따라 또는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다. 나 역시 어떤 종교적인 문제를 가지고 나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나의 체계에 입각한 나의 판단을 가지고 나의 처방을 쓰지, 보조 스님이나 성철 스님의 처방을 그대로 쓰지 않는다. 이것은 부단히 변하는 세상을 사는 사람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큰스님들은 체(體)를 주로 말씀하셨다면 나는 지금 용(用)을 말하고 있으며, 큰스님들이 불변(不變)의 면을 강조하신다면 나는 수연(隨緣)의 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러한 태도가 조금도 큰스님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님을, 좀 더 깊이 생각하는 독자라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불교는 앞으로 “좀 더 깊이 생각하는 불교, 좀 더 정확히 자신을 표현하는 불교”로 탈바꿈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정사(正思), 정언(正言)이 사라진 불교가 지금의 한국불교라고 말하면 오진(誤診)일까.
선승은 주장자 법문만 해야 한다?
주장자 법문만을 최고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본심은 무엇일까? 깨침? 그러나 불교인치고 깨침을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주장자 선객들은 깨침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본분종사인 척하지만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이들 중 상당수는 학적인 것에 대한 강한 반발을 종지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문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올바로 생각하고 올바로 말하고 올바로 실천하자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고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니까 이를 바로잡자는 것이 학문의 근본 사명이다. 한국불교는 오랫동안 선과 교라는 도식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오류에 빠져 있었다. 다시 말하면, 한국 불교인들은 보조 스님이나 성철 스님처럼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 사상적으로 문제를 밝혀보려는 노력을 높이 살 줄 몰랐다. 부처님을 비롯하여 역사적으로 큰일을 하신 역대의 큰스님들이 모두 그랬건만 한국의 주장자 법문 신봉자들은 이런 가치를 알아볼 줄 몰랐다. 보조 스님도 성철 스님도 모두 붓을 들었다 하면 항상 말이 되게끔 말씀하셨다. 모두 학문적인 감각이 있으셨던 것이다. 말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는 학문의 보편적인 원칙을 지킬 줄 알았다. 모두 학문적인 자질이 탁월하신 분들이었다. 이런 공통점들 때문에 지금 두 분의 사상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두 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어느 분의 어느 학설에 동의하고 동의하지 않고에 앞서서, 올바로 생각하고, 올바로 말하고, 올바로 행동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말이 되게끔 말씀하신다는 말은, 중생이 알아듣게끔 말씀하신다는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다. 중생이 알아듣지 못하고서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 두 분 모두 요즘의 보통 주장자 법문 신봉자들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백일법문’이 있은 지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에 대한 학적인 평가는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백일법문’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앞으로 철저한 학적인 분석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큰스님에 대한 맹목적인 미화가 아니라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큰스님의 사상에 대한 다양한 시각에서의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큰스님의 사상은 역사 속에 살아남을 수 있다. 획일적인 숭배만 있어서는 안 된다. 스위스에 칼 발트(Karl Barth, 1886~1968)라는 신학자가 있었다. 그 분의 신학체계는 비교적 보수적인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은 각양각색이었다. 저런 사람이 어찌 발트의 제자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유롭고 혁명적인 제자도 있었고 때로는 반 발트적인 신학이론을 전개한 제자도 있었다. 이런 현상을 보고 사람들은 평한다. 발트라는 인물이 컸기 때문이라고. 사람됨이 크지 않고서는 자기와 다른 인물을 키워낼 수 없을 것이라고. 불교를 가리켜 큰 종교라고 말하는 까닭도 불교가 사람사람이 지닌 차이를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부처님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불교가 가는 곳마다 “인연 따라 일어난다”는 연기설(緣起說)이 계속 문제되었고, 대승불교권에서는 “모듣 것을 다 포용하고 모든 것을 다 생성케 한다”는 공(空)의 이론이 주목을 끌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연기적인 존재이고 공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원래는 큰 인물 아닌 사람이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인간관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간관이 아닌가 생각한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각양각색의 여러 가지 면을 다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부처님도 그렇고, 부처님 법을 이으신 역대 조사들도 그렇고, 한국의 모든 고승들이 다 그렇고, 우리 성철 큰스님도 그렇다. 내가 만나 뵌 성철 큰스님은 적어도 그런 분이었다. 보조 스님을 보는 시각이 다양한 만큼 성철 스님을 보는 시각도 다양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것이 중생상이고 또 진실상이기 때문이다.
끝
박성배
동국대와 뉴욕주립대 등에서 불교학을 가르쳤다. 성철 스님을 모시고 출가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여러 권의 저서를 통해 한국불교의 핵심 사상을 정리했다. 저서로 『불교의 믿음과 돈오사상』, 『깨침과 깨달음』, 『몸과 몸짓의 논리』, 『재미 불교학 교수의 고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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