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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및 특별기고]
성철 스님을 보는 시각에 대해2뒤늦게 알게 된 ‘깨달음’과 ‘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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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배  /  2013 년 6 월 [통권 제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8,18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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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불교문화재단은 1995년부터 3년 여 간 계간지 「고경」을 발간한 바 있다. 당시 창간호에서 박성배 교수는 ‘성철 스님을 보는 시각에 대해’라는 주제로 장문의 특별기고를 했었다. 글에서 박 교수는 성철 스님과의 인연과 스님의 사상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불자와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 일으켰던 박 교수의 글을 3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 편집자

 

 

성철 스님이 김용사에 주석할 때 대중들과 함께 한 모습

 

 

사상 체계가 근저로부터 흔들리기 시작하니 마치 지진을 만난 건물처럼 모든 것이 함께 흔들렸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인가를 점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도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적혀 있는 불경을 너무 자기 편리한 대로 읽었던 것 같다. 우리는 화엄경의〈보현행원품〉에 나오는 ‘수순중생(隨順衆生)’이란 말을 가장 좋아했는데, 그 좋은 말이 굉장히 부담스러워졌다. 불경을 문자 그대로 읽을 때의 해독이 나타난 것이다. “일체 중생을 수순한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지금 현재의 이 육체와 정신상태를 가지고 일체중생을 하나도 차별없이 수순하려 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육체에 대한 재해석, 현재의 정신상태에 대한 보다 철저한 분석, 그리고 ‘수순(隨順)’의 의미에 대한 실천적 차원의 재해석이 불가피했다. 이러한 문제들은 모두 다시 깨달음의 문제에 관련되어 있었다. 내가 도달한 깨달음의 경지가 어떤 것인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리 보이고 거기에 따라 나의 능력도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난관과 번민의 와중에서 한 학기를 보냈다.

 

“오직 스님이 되고 싶을 뿐…”

 

그러다가 겨울방학이 되었다. 그땐 방학이 구원이었다. 나는 대학생 수도원생들과 함께 경북 문경에 있는 김용사로 성철스님을 찾아갔다. 성철스님과는 우리들 모두가 퍽 가깝게 느끼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이미 지난해 여름에 3000배를 하고 나서 많은 가르침을 받은 뒤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온 겨울방학을 김용사에서 보냈다. 방학 동안에 우리는 큰스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신심명〉 〈증도가〉 〈돈오입도요문〉 〈육조단경〉을 다 배웠고, 7일간의 철야 용맹정진도 했다. 학생 중에 누군가가 무엇을 잘못했다 하여 그 벌로 모두 함께 3000배를 다시 하기도 했다. 모두가 다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다. 방학이 끝나자 학생들은 모두 서울로 돌아갔다. 그러나 나는 홀로 김용사에 남았다. 힘든 세상에 다시 돌아가기가 싫었다. 대학 교수도 싫고 ‘대학생수도원’의 지도교수 노릇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오직 중이 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내가 하루 3000배를 21일 동안 계속하는 것을 보시고서야 큰스님은 나의 출가를 허락하셨다.

 

내가 머리를 깍은 지 얼마 안 되어 큰스님은 해인사 백련암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물론 우리 제자들도 함께 백련암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큰스님께서 해인총림의 방장이 되시자 우리 역시 모두 큰절 퇴설당으로 자리를 다시 옮겼다. 이때에 해인사에서 큰스님은 저 유명한 ‘백일법문(百日法門)’을 하셨다. 백일법문은 한마디로 말해서 ‘돈오돈수’의 경지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법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 당시의 나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이때부터 나는 ‘깨달음’과 ‘깨침’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깨달음과 깨침이 둘일 수 없지만 초보자들이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는 경지의 심천을 따질 줄 알아야 한다.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에서 말하는 ‘돈오’는 최초의 각이기 때문에 해오(解悟)라 부르고,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에서 말하는 ‘돈오’는 마지막의 구경각이기 때문에 증오(證悟)라 부른다. 최초의 해오는 ‘깨달음’이고, 구경각은 ‘깨침’이다. 해오인 깨달음을 증오인 깨침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수도자는 구경각인 깨침을 목표로 삼아야지 해오인 깨달음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대목에 이르러 많은 의심이 일시에 풀리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봉은사에서 대학생수도원생들을 지도할 때 깨달음과 깨침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간과하고 ‘점수(漸修)’를 한다고 날뛰었으며 일이 제대로 풀릴 수가 없었다는 것을 그때에 깨달았다. 책을 읽다가 조금 밝아진 것을 과연 선종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지 크게 의심스러운 일이지만 조만간 변질되어 버릴 그런 조그만 한 깨달음에 집착하여 매사를 그것으로 요리하려 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다. 이렇게 하여 나는 돈오점수설을 청산하고 돈오돈수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중생상이 진실상

 

큰스님의 ‘백일법문’은 한국근대 불교사에 큰 획을 긋는 사상사적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법문은 매일 오전에 강원 큰 방에서 있었다. 향곡스님을 비롯한 큰스님들이 외지에서 오셨고 해인사의 대소 암자에서도 스님들이 많이 오셔서 항상 장소가 비좁았다. 해박하고 명석한 큰스님의 법문에 우리들 제자들은 큰 감동을 받아 신심이 나서 모두 열심히 정진하였다. 그러나 백일법문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다 큰스님의 법문에 감동된 것 같지는 않았다. 누구라고 이름을 댈 필요는 없지만 뒤에서 빈정대는 듯한 말을 하는 스님들도 있었다. 나와 함께 출가했던 원공스님은 이를 참지 못했다. 나는 그런 일에 대해서 좀 무감각한 편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가 다 아름다웠던 것 같다. 그게 중생상이기 때문이다. 한 명도 빠짐없이 전원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면 그것은 중생상이 아니다. 중생상이 아닌 것은 진실상이 아니다. 중생상을 극복한 듯이 말하면 굉장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사실이 아닌 조작이기 쉽다. 백일법문은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므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좋다. 유태인들이 만든 구약이나 사마천의 사기가 인류의 영원한 고전으로 남는 이유는 사람으로서는 입에 못 담을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모두 정직하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대로!”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이 아닐까. 모든 것을 무심으로 기록하면 되는 것이다. 역사적인 기록에 어떤 인위적인 조작을 가해서는 안 된다. 백일법문은 또한 생명을 지닌 살아있는 역사이다. 생명 현상에는 반드시 바람직하지 못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늙고 병들고 죽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란 말이다.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 생명이다. 이런 부분이 전혀 없다면 그것은 생명이 아니다. 생명을 가장하고 있는 죽음이다. 생화(生花)와 조화(造花)의 차이도 바로 거기에 있다 하지 않던가. 조화(造花)에는 상하거나 병든 부분이 없다. 그러나 생화(生花)에는 상하고 병든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아니면 적어도 병들어 갈 수밖에 없는 약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현상’ 본연의 모습이 아닐까?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한 명도 빠짐없이 전원 감동했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큰스님의 법문에 비판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을 닦아세우려는 원공스님을 말렸다. 있는 그대로가 아름다운 것 아니냐고. 조작하거나 강요하면, 바로 그 순간 생명은 죽는다. 생명이 사라진 곳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조화는 아무리 세련되게 만들어져도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한다. 썩고 상한 부분이 있어도 생화라야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생명의 힘이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은 북한에서 나온 보도나 요즈음 파죽지세로 일어나는 유사종교 단체에서 나온 보도들이다. 지도자가 한마디 하면 단 한 명의 반대자도 없이 전원 일치하는 장면이 눈에 띈다. 이런 보도물을 만든 사람들은 잘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그것이 사실이냐에 있을 것이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런 사실은 뒤에서 누군가가 대중을 조종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불란서의 작가 로망 롤랑(Romain Rolland : 1866-1944)은 인도의 간디를 존경했다. 그래서 그는 인도로 간디를 찾아갔다. 마침 그때 간디의 강연을 듣는 큰 모임이 있었다. 그런데 그 모임의 풍경이 너무나 뜻밖이어서 롤망은 큰 충격을 받았다. 간디의 강연을 듣는 군중들의 태도가 말이 아니었다. 강연은 안 듣고 들락날락하는 사람, 뒤에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사람, 절반쯤 누워 있는 사람, 그는 너무 실망했다고 한다. 천하의 성자(聖者)이신 마하트마 간디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찌 저럴 수가 있을까. 롤랑은 도저히 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도 중생상을 본다. 다시 말하지만 중생상은 진실상이다. 사관학교 학생들의 강의 듣는 모습은 100점일지 모른다. 그에 비해 간디의 강연을 듣는 인도 사람들의 태도는 빵점을 맞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참모습은 간디와 인도인들 사이에 있는 것이지, 사관학교 교관과 생도들 사이에 있지 않다. 나는 조작된 아름다움보다도 아름답지 못할망정 진실한 편을 택하고 싶다. 진실이라야 생명에 가깝고 그래야 거기에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박성배
동국대와 뉴욕주립대 등에서 불교학을 가르쳤다. 성철 스님을 모시고 출가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여러 권의 저서를 통해 한국불교의 핵심 사상을 정리했다. 저서로 『불교의 믿음과 돈오사상』, 『깨침과 깨달음』, 『몸과 몸짓의 논리』, 『재미 불교학 교수의 고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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