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소리]
가야산에 흐르는 봄빛을 몇 번이나 보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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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24 년 4 월 [통권 제132호] / / 작성일24-04-05 14:34 / 조회2,666회 / 댓글0건본문
지난 2월 16일 백련암에서 신심 깊은 불자님들의 동참 속에 갑진년 정초 아비라기도 회향식을 봉행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맞이하고, 저마다 간절한 서원 속에 한 해를 밝힐 공덕을 쌓아 갑진년의 원단을 맞이합니다.
해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정초 아비라기도를 마치면 가야산 산빛에는 알 수 없는 봄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봄은 연초록 나뭇잎과 노란 개나리가 채 피기도 전에 잿빛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날마다 생기를 더해 가는 산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주의 섭리가 느껴지는 순간이 봄입니다. 산빛을 통해 비로자나 부처님을 만나고,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통해 팔만사천 법문을 듣는다고 하신 옛 선지식들의 말씀이 가슴 깊은 울림으로 살아나는 계절입니다.
매화 피는 봄은 다시 오고
지난해 소납이 팔순을 맞았습니다. 법회 끝에 케익을 준비해온 불자님들로부터 초촐한 축하인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작년에는 성철대종사 열반 30주기를 맞아 이런저런 기념행사를 준비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다 보니 팔순을 맞는 감회에 젖을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아비라기도를 마치고 돌아보니 팔순 인사를 받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또 다른 봄이 오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보니 청년의 나이에 출가한 후 가야산 능선을 바라보며 봄을 맞이하는 것도 어느덧 50년 풍상을 훌쩍 넘겼습니다. 아침 종성에 나오는 ‘기간송정학두홍幾看松亭鶴頭紅’이라는 게송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소나무 정자 위에 학의 머리 붉어짐을 몇 번이나 보았던가.”라는 구절입니다.
소나무 꼭대기의 둥지에서 부화한 두루미 새끼는 5, 6월이 되면 머리가 붉게 변합니다. 이 게송은 학의 머리가 붉어짐을 통해 얼마나 많은 봄이 광음光陰처럼 지나갔던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큰스님의 법문 한 마디에 출가한 이래 굽이치는 가야산 능선으로 밝아오는 봄빛을 몇 번이나 보았으며, 봄마다 백련암 산비탈을 붉게 물들이던 철쭉은 또 몇 번이나 보았던가 하는 회한에 젖어 들었습니다. 해마다 가야산 능선을 타고 오는 봄을 50번도 넘게 보았다고 생각하니 지나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그 긴 세월 동안 큰스님의 가르침을 그늘 삼아 오로지 한길로 걸어왔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를 일입니다.
산빛에 감도는 봄기운을 보며 회한에 젖어 있는 사이 여기저기서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특히 올해는 문화재청에서 화엄사 각황전 앞의 홍매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는 뉴스까지 더해져 매화 소식이 풍요롭습니다. 봄마다 수많은 매화가 피지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매화는 단 네 그루뿐입니다. 순천 선암사의 선암매,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 구례 화엄사의 들매화가 그것입니다. 올해는 여기에 더해 화엄사 각황전 앞의 홍매가 ‘구례 화엄사 화엄매’라는 이름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각황전 앞의 홍매는 다른 매화와 달리 검붉은 꽃을 피우는 유일한 매화라서 흑매黑梅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 매화는 조선 숙종 때 임진왜란으로 불탄 각황전을 중건하면서 계파선사桂波禪師가 불사를 기념하기 위해 심었다고 합니다. 불사를 마치고 한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은 고인의 깊은 마음을 다시 헤아려 보게 됩니다.
각황전은 세월이 갈수록 화려한 단청 빛이 퇴색해 가지만 매화는 해마다 봄이 오면 검붉은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3백 년에 걸쳐 봄마다 피는 화엄매 덕에 각황전은 해마다 생기를 더해 왔습니다. 그 매력에 이끌려 상춘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생명의 불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야산 능선을 타고 흐르는 무채색 산빛을 통해서도 봄을 느낄 수 있지만 이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5대 매화를 보며 유채색 봄을 맞아야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동안거 마친 일지 수좌
‘강남일지춘江南一枝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강남에서 매화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 봄소식을 전한다는 말입니다. 남쪽 곳곳에서 매화가 핀다는 소식을 듣고, 업무차 서울로 갔습니다. 3시간 남짓이면 도착하는 곳이지만 서울은 공기가 사뭇 다릅니다. 나라가 좁다고 하지만 꽃피는 계절이 되면 서울과 부산은 딴 세상입니다. 남쪽에서는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 갔지만 서울은 꽃은커녕 여전히 바람이 차갑습니다. 그래서 ‘남지락북지개南枝落北枝開’라는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남쪽 가지에서는 꽃이 떨어지는데 북쪽 가지에서는 이제 꽃이 피어난다는 비유를 실감하는 계절입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사무실에 당도하여 쉬고 있으니 상좌 일지 수좌가 찾아왔습니다. 동안거를 마치고 인사차 찾아온 것입니다. 단정히 가사를 수하고 사무실 바닥에 엎드려 삼배를 올립니다. 오대산 맑은 도량에서 정진한 덕분인지 안부를 묻는 수좌의 얼굴에서 청량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안거를 나면서 부족한 것도 많았을 터인데 홍삼을 챙겨와 보는 앞에서 드시라며 건네줍니다. 겨울 한철 화두와 씨름한 수좌가 건네는 것이기에 그 정성이 기특하여 못 이긴 채 받아 마셨습니다.
일지 수좌는 결재철마다 제방의 선방을 두루 다니며 안거를 나는 수행자입니다. 지난 겨울에는 오대산 상원사에서 동안거를 났는데 이번 겨울에는 유래 없이 눈이 많이 내렸다고 합니다. 결재 기간 동안 서른 번이나 눈을 쓰느라고 진을 뺐다고 고충을 토로합니다. 오대산 깊은 골짜기에 켜켜이 내려앉은 눈을 치우느라 수많은 수좌들이 한겨울에 비지땀을 흘렸나 봅니다.
깊은 산중에 내려앉는 눈발은 번뇌인듯 쌓여 가고, 납자들은 겨우내 그 눈을 치우고 또 치웠을 모습이 선하게 그려집니다. 그렇게 열심히 눈을 치웠으니 온갖 번뇌는 봄눈 녹듯 사라지고, 그 마음은 성성적적惺惺寂寂해졌을 것입니다.
『유교와 불교의 대화』 출간 기자간담회
일지 수좌의 인사를 받고 장경각에서 출간한 『유교와 불교의 대화』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책은 코로나가 한창이던 지난 2021년 11월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와 성철사상연구원이 공동으로 개최한 학술세미나의 결과를 보완하여 한 권의 책으로 출간한 매우 뜻깊은 성과물입니다.
이 책은 5개의 분야에 걸쳐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이 참여하여 집필한 결과물이 담겨 있습니다. 내용도 풍성하고, 주제도 다양하지만 이 책의 발간 취지는 제목에 나와 있듯이 ‘대화’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은 제자들과 둘러앉아 진리에 대해 묻고 답하는 대화를 통해 탄생했습니다. 나아가 간화선 수행의 핵심인 화두 역시 스승과 제자의 문답을 통해 탄생한 것입니다. 도道에 대해 묻고 답하는 대화를 통해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 것입니다.
작금에 우리 사회는 그와 같은 대화가 실종되었습니다. 무수한 말이 오고 가지만 마음이 소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대립과 갈등은 오히려 첨예해지고 있습니다. 이념, 종교, 세대, 지역, 젠더 등 대립과 갈등은 전방위적으로 퍼져 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불안과 고통은 증폭되고 사회적 비용 또한 천문학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종교의 역할은 이와 같은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고, 마음을 평화롭게 하고, 세상을 조화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고민을 하던 차에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장 김도일 교수님께서 ‘유교와 불교의 대화’를 제안해 주셔서 뜻깊은 행사가 성사되었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도 뼈대 있는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유학을 공부하셨기에 큰스님의 법문에서는 유불 융합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불교와 유교라는 두 전통은 2천 년에 걸친 세월 동안 치열한 갈등과 대립 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 속에서도 사상적 접점을 찾고,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법을 모색해 왔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얼핏 보면 갈등과 대립만 도드라져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깊이 있는 대화도 오고 갔던 것입니다. 선인들이 보여주었던 그런 정신을 되살린다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대립과 갈등, 분열과 투쟁이라는 병을 치유하는 데 양약이 될 지혜를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이 탄생하기까지 중추적인 역할을 하셨던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장 김도일 교수님도 “서로 비판하고 잘못된 것은 지적하더라도 그 밑바닥에서는 상호 간에 이해하고 융합하여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멜팅팟(melting pot)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 싶다.”며 출간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불교는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수많은 억압과 피해를 당했습니다. 많은 스님들이 유생들의 모함과 핍박을 받았으며, 심지어 유배지에서 맞아 죽는 뼈아픈 역사도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두 종교의 역사는 이런 아픈 과거를 안고 있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와 같은 아픈 역사를 가진 불교와 유교가 서로 배척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다시 대화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갈등과 대립을 풀 수 있는 영감을 주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무쪼록 이 책이 화합과 공존의 지혜를 찾는 데 작은 밀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남쪽에서 매화 향기를 머금고 북쪽에 가서 동안거를 마친 제자를 만나고 대화를 모색하는 한 권의 책을 출간하고 나니 비로소 매화 향기가 가슴에 퍼지는 것 같습니다. 잿빛 속에 느끼던 봄빛이 비로소 홍매의 색감으로 채색됨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계파선사가 심은 한 그루의 홍매가 화엄사의 봄을 해마다 새롭게 하듯이, 도처에서 정진하는 수행자들의 구도심과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의 성과가 우리의 미래를 꽃피게 할 것이라 믿습니다. 매향만리梅香萬里라, 도처에 매향 가득한 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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