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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삼선근,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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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20 년 6 월 [통권 제86호]  /     /  작성일20-06-22 15:45  /   조회70,13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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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성균관대 초빙교수 

 

지난 호부터 11가지 선한 마음작용을 의미하는 선심소善心所를 살펴보고 있다. 이번호에는 ‘세 가지 선한 뿌리’라는 뜻을 가진 삼선근三善根에 대해 논의할 차례다. 불자들이 자주 듣는 낱말 중에 하나가 삼독三毒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삼독은 탐욕[貪], 분노[瞋], 어리석음[癡]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마음이 이 세 가지 작용에 오염되면 몸과 마음을 병들기 때문에 ‘독毒’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마음에 이 세 가지 독소에 오염되면 ‘착한 마음[善心]’은 죽고 악한 마음으로 변하게 된다.

 

삼독심, 수많은 번뇌의 근원

 

탐욕 때문에 박탈감에 허덕이며 물질적 대상을 쫓아 집착하는 불행한 삶이 되고, 치미는 분노 때문에 자비심 없는 포악한 사람이 되어 남에게 해를 입히고,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지혜의 생명이 죽고 잘못된 길로 빠져들게 된다. 물론 이 세 가지 마음작용은 추상적인 문제나 스트레스와 같은 정신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몸과 마음에 모두 영향을 미친다. 내면에서 타오르는 삼독이라는 에너지에 시달리면 선한 마음과 지혜의 생명이 죽는 것은 물론 그로 인해 육신까지 병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 마음작용을 ‘세 가지 독소’라고 이름 붙인 것은 매우 과학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의사에 비유되는 부처님은 삼독의 해악에 대해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말씀하시고 있다. 『법구경』에는 “탐욕처럼 심한 불길도 없고, 분노처럼 무서운 포수도 없으며, 어리석음에 비할 그물도 없다.”고 했다. 부처님은 탐욕의 에너지에 대해 삶을 불태우는 불꽃에 비유했다. 탐욕의 불꽃에 의해 마음이 불타오르고, 몸도 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분노는 생명을 앗아가는 흉포한 포수에 비유했다. 분노 때문에 살생을 하게 되고, 스스로 자신의 삶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끝으로 어리석음은 영혼을 속박하는 그물에 비유했다. 잘못된 생각은 자기 자신을 속박하는 감옥이 되어 스스로 자신의 생각에 갇혀 살기 때문이다.

 

삼독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기 때문에 『별역잡아함경』에 따르면 “만약 착하지 못한 마음을 내어서 간탐·성냄·어리석음을 이룬다면, 이 몸으로 스스로 악한 일을 지어서 도리어 자기를 해치게 된다.”고 했다. 삼독의 마음 때문에 스스로 악한 업을 짓게 되고, 자신이 지은 그 악업 때문에 고통스러운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잡아함경』에서는 “탐욕은 온갖 번뇌를 일으키고, 탐욕은 괴로움을 생기게 하는 근본이다.”라고 했다. 흔히 중생은 팔만사천 가지 번뇌에 시달린다고 하는데 그렇게 무수한 번뇌의 뿌리는 탐진치 삼독이라는 것이다.

 

삼독이 팔만사천 번뇌의 뿌리라면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마땅히 마음에서 삼독을 제거해야 한다. 『잡아함경』에는 “탐욕·성냄·어리석음을 모두 끊으면 그는 곧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했다. 삼독이 제거된 마음은 깨달음의 나무를 생장하게 하고, 지혜의 생명이 자랄 수 있도록 해주는 뿌리와 같다. 그래서 11가지 선심소 가운데 네 번째에서 여섯 번째까지 항목은 삼독을 제거한 마음에 관한 것이다.

 

 중국 조사선을 대성시킨 마조馬祖의 선법을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고 부른다. 마조는 마음을 대지에 비유했기 때문이다. 일체 모든 존재들이 대지 위에 건립되어 존재하듯이 삼라만상은 모두 마음에 의해 생성되고 존재한다는 것이 ‘마음의 땅[心地]’이라는 비유에 담긴 메시지이다. 대지가 생명으로 풍성해 지려면 메마른 토양에 빗물이 촉촉이 스며들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지혜의 생명으로 풍성해 지려면 마음의 땅에 진리의 말씀을 머금어야 한다. 그런 마음이 되어야 수행의 꽃을 피우고, 깨달음이라는 열매를 영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고, 튼실한 열매가 영글기 위해서는 토양에 좋은 뿌리가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땅에도 두 가지 종류의 뿌리가 있다. 삼독이 나쁜 뿌리라면 삼선근은 좋은 뿌리에 해당한다. 좋은 뿌리로부터 지혜의 꽃이 피고, 자비의 열매가 결실을 맺는다. 유식唯識에서는 그런 마음을 ‘세 가지 착한 뿌리’라는 뜻에서 삼선근三善根이라고 이름 붙였다.

 

식물의 종류를 결정하고, 건강하게 자라는데 있어 뿌리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마찬가지로 삼선근은 좋은 마음이 생겨나게 하고, 건강한 마음이 생장하도록 하는 좋은 뿌리라는 것이다. 그 뿌리로부터 자비의 싹이 돋아나고, 지혜의 꽃이 피고, 깨달음의 열매가 영글게 된다. 삼독심이 번뇌와 고통을 싹틔우는 나쁜 뿌리라면 삼선근은 온갖 선善을 자라나게 하는 좋은 뿌리가 된다. 식물의 뿌리가 자양분을 흡수하여 나무를 생장하게 하는 것처럼 삼선근 역시 지혜와 자비의 자양분을 흡수하여 깨달음의 나무를 생장시켜 준다. 그 뿌리가 바로 탐욕이 제거된 마음인 ‘무탐無貪’, 분노가 제거된 마음인 ‘무진無瞋’, 어리석음이 제거된 마음인 ‘무치無癡’이다.

 

『성유식론』에 따르면 이들 세 가지 심소를 삼선근이라고 부르는 이유에 대해 “뿌리는 선善을 잘 생장시키고[根生善勝]고, 세 가지 선하지 않은 뿌리를 다스리기 때문[不善根近對治]”이라고 했다. 무탐, 무진, 무치는 온갖 선량한 것을 키우는 좋은 뿌리이자, 삼독심과 같이 나쁜 씨앗과 열매가 자라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좋은 뿌리에서 좋은 싹이 나듯이 삼선근이라는 좋은 뿌리에서 온갖 선량함이 생장하고, 나쁜 싹은 돋아나지 못하게 한다. 식물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이 말의 뜻에 공감할 수 있다. 어떤 식물이 군집을 이뤄 잘 자라는 곳에는 다른 식물이 세력을 뻗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삼선근이 마음에서 풍성하게 자라나면 삼독심의 씨앗이 자라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삼선근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탐 무진 무치

 

첫째 무탐無貪은 탐욕의 반대로 애착이 사라진 마음이다. 탐욕이 없는 무집착無執着 또는 집착하지 않는 비집착非執着의 마음이 무탐이다. 호법護法의 『성유식론』에 따르면 무탐이란 “윤회의 삶[有]과 그 원인[有具]에 대해서 탐착 없음[無著]을 체성으로 삼고, 탐착을 잘 다스려[對治] 선을 행하게 함을 업으로 한다[作善為業].”고 했다. 무탐이란 윤회의 삶과 윤회의 삶을 초래하는 원인에 대해 탐내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을 본성으로 삼고, 선을 행하게 만드는 작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무진無瞋으로 진에의 반대로 성내지 않는 마음이다. 『성유식론』에는 “고통과 고통의 원인[苦具]에 대해서 성내지 않음을 체성으로 삼고[無恚為性], 성냄을 다스려서 선을 행하게 함을 업으로 삼는다[作善為業].”고 했다. 고통과 고통을 초래하는 원인에 대해 화내지 않는 것이 무진의 근본이고, 선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 무진의 작용[業]이라는 것이다.

 

안혜安慧의 주석에 따르면 무진이란 “악행에 빠지지 않도록[惡行不轉] 의지처가 되는 작용[所依為業]”이라고 했다. 분노하지 않으면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악행을 막을 수 있다. 이 말은 분노란 곧 다른 생명에게 해악을 끼치는 행위임을 알 수 있다. 보통 성내지 않는 마음하면 나무나 바위처럼 무정한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세친의 『대승오온론』에 따르면 무진이란 “자慈를 본질적인 성질로 한다[以慈為性].”고 했다. 단지 화를 내지 않는 건조한 마음이 아니라 ‘자애로운 마음[慈]’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자慈’란 여락與樂, 즉 중생들을 사랑[慈愛]하여 즐거움[樂]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진이란 단지 화를 내지 않는 무덤덤한 마음상태가 아니라 뭇 생명들을 어여삐 여기고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것으로 마치 어머니와 같은 마음임을 알 수 있다.

 

셋째, 무치無癡로 어리석지 않고 지혜로운 마음을 말한다. 『성유식론』에 따르면 “모든 본체[理]와 현상[事]에 대해서 명료하게 이해함을 체성으로 삼고[明解為性], 어리석음을 다스려서 선을 행하게 함을 업으로 삼는다[作善為業].”고 했다. 어리석음이 없음이란 사물의 이치와 현상을 명료하게 아는 것이다. 그와 같은 지혜가 어리석음에 이끌려 악행을 짓는 것을 막고 선행을 실천하도록 하는 힘이 나온다는 것이다. 세친도 무치에 대해서 “이치에 맞게 바르게 행함을 본성으로 삼는다[正行為性]”고 했다. 어리석지 않음이란 단지 바르게 아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바르게 아는 것을 바탕으로 바르게 행동하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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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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