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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원효 혜능 성철에게 묻고 듣다 ]
새로운 선법으로 깨달아 붓다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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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  2024 년 4 월 [통권 제132호]  /     /  작성일24-04-05 14:17  /   조회31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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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나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와는 관계가 없는 즐거움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라는 자각 다음에는 어떤 노력이 이어졌을까? 기록에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적절한 식사를 통해 단식고행으로 쇠약해진 체력을 회복한 후 네 가지 선정 경험의 변화를 성취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생략 내지 유실된 내용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부분을 추정으로라도 채워 보아야 맥락이 통한다. 

 

연기적 사유로 새로운 선정 수행법을 마련하다

 

‘감관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서 발생하지 않는 즐거움, ‘해로움’과 무관한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과정이 이어졌을 것이다. 달리 말해, 그러한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탐구했을 것이다. 그것은 ‘더 좋은 즐거움’ ‘더 유익한 즐거움’ ‘더 수준 높은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의 탐색이다. <‘어떤 조건’을 선택했더니 ‘어떤 즐거움’이 발생한다. ‘다른 조건’을 선택했더니 ‘그보다 더 좋은/유익한/수준 높은 즐거움’이, 혹은 ‘덜 좋은/덜 유익한/수준 낮은 즐거움’이 발생한다.> 이런 성찰 실험이 이어졌을 것이다.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의 선택과 비교, 성찰의 과정이 한동안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더욱더 좋은/유익한/수준 높은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에 대한 개안과 체험이 계속 향상되었을 것이다. 맥락으로 볼 때 이런 정도의 추정은 무리가 아니다.

 

사진 1. 간다라에서 출토된 좌불상(1〜3세기). 사진: 헌팅턴 기록사진.

 

즐거움이라는 경험은 윤리적 조건들의 선택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경우는 비윤리적 조건들에서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타인을 칭찬하면서 즐거워하기도 하지만, 비방하고 험담함으로써 즐거워하기도 한다. 칭찬하며 즐거워할 때도, 자기 자식만 칭찬해서 즐거운 경우와 남의 자식을 칭찬하면서 즐거워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두 즐거움은 질이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진행했을 <더욱더 좋은/유익한/수준 높은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에 대한 모색·실험·비교·성찰은, 후일 붓다가 되어 설한 법설에 그대로 반영되었을 것이다. 니까야는 그런 설법을 풍부하게 전하고 있다.

 

<더 좋은/유익한/수준 높은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에 대한 일련의 탐구는 마침내 ‘새로운 선정의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의 확보로 이어진 것으로 본다. 정형구로 전해지는 ‘네 가지 부류의 선정 경험[四禪]’의 원형이 이때 확보된 것으로 보인다. 붓다는 이 선정의 즐거움이 감관적 쾌락/행복감보다 수승한 ‘즐거움/행복감’이며, 선정의 즐거움들 가운데서도 수준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즐거움’을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것’으로 보게 되었다. 곧이어 ‘더 좋은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상향적으로 탐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선정의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이때의 선정은 출가 직후에 배우고 체득했던 전통 선정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정의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새로운 조건들을 알게 되었고, 그 새로운 조건들을 확보함에 따라 새로운 내용의 선정 수행법을 확보한 것이다. 전통 선정 수행법과는 차별화되는 붓다의 선禪, 새로운 선법禪法의 기초가 마련되는 순간이다.

 

모든 현상과 조건을 만나면서도 갇히지 않는 능력 - 새로운 선법

 

그런데 이 과정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더 수승한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의 탐구를 ‘멈추지 않고 지속했다’라는 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즐거움이라 부르는 경험현상은 ‘조건에 따라’ 발생한다. 특정한 내용의 즐거움은 그것을 발생시키는 특정한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특정 즐거움에 머물지 않고 더 수승한 즐거움을 탐구했다>라는 것은, 어떤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특정 조건을 붙들어 그것에 머물려고 하지 않았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대개 특정 즐거움에 쉽사리 안주한다. 다시 말해, 특정 즐거움을 발생시킨 ‘어떤 조건들’에 안주하고자 한다. 지금 경험하는 즐거움을 붙들고 그것의 발생 조건들에 머물려는 것이 보통 인간의 본능적 경향이다. 그런 점에서 고타마 싯다르타의 경우는 매우 특별하다.

 

현재 경험하는 특정한 내용의 즐거움에 머물지 않으려면, 그 즐거움 현상과의 밀착을 스스로 거부하고 거리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자발적 거리두기 능력은 두 가지 조건에서 생겨난다. 하나는, 그 즐거움의 속성과 그것을 발생시킨 조건들을 성찰하는 ‘이해능력’이다. 다른 하나는, 그 즐거움과 발생조건들을 붙들지 않는 ‘마음능력’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특정 즐거움에 머물지 않고 더 수승한 즐거움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다시 말해 ‘더 수승한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새로운 조건들’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에서, 이 두 가지 능력에 눈떠 발전시켜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붓다가 된 후의 설법은 이러한 ‘이해능력’과 ‘마음능력’을 열어주는 데 초점을 두었고,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그 내용과 방식이 갈수록 풍요로워졌을 것이다.

 

이 ‘이해’와 ‘마음’의 문제는, 붓다의 모든 법설 뿐만 아니라 붓다 이후 불교의 모든 교학과 수행을 관통하는 요추腰椎라고 생각한다. 니까야/아함을 통해 붓다와 대화하는 작업, 남전南傳과 북전北傳의 대화, 북전 내부의 대화, 붓다의 정학定學과 선종禪宗 선학禪學의 연관을 통섭적通攝的으로 탐구하여 불교 고유의 문제해결력을 확인·발전·구현해 가는 전망도, 결국 이 문제로 수렴되고 이로부터 발산된다. <‘이해능력’과 ‘마음능력’에 의한 거리두기>가 무엇을 의미하며, 삶의 근원적 치유와 행복, 깨달음의 개인적·사회적 구현과 어떤 인과적 연관이 있는지, 그에 대한 관점과 탐구과정을 언어에 담아보는 것이 필자 개인의 최고 관심사이다. 붓다가 알려준 ‘이해능력’과 ‘마음능력’ 그리고 그에 수반하는 ‘행위능력’이야말로, 인간 진화의 궁극, 그 마지막 진화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전의 수행으로는 확보할 수 없었던 새로운 ‘이해능력과 마음능력’에 개안했으며, 그 핵심은 <모든 경험현상과 그것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만나고 보면서도, 그것들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어떤 즐거움도 붙들지 않는 이해와 마음’ ‘어떤 즐거움에도 갇히지 않을 수 있는 이해와 마음’을 포착하여, 그 지평에서 모든 즐거움과 관계 맺는 새로운 국면을 연 것이다. 

 

<어떤 즐거움도 붙들지 않고 어떤 즐거움에도 갇히지 않는다>라는 것은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그 어떤 조건들도 붙들지 않아 그것들에 안주하거나 갇히지 않는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경험/체험과 그 발생조건들을 붙들거나 그것들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지평을 확보하는 것이 선禪 수행이고 해탈 수행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모든 해탈 수행과 선 수행은 특정 현상/경험/체험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마침내 기존의 선정 수행법과 차별화되는 붓다의 선법禪法이 완성되었다. 붓다의 선禪은 <그 어떤 경험/체험과 그 발생조건들에도 갇히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이해와 마음의 지평에서 열어주고 확립시켜 주는 길>이다.

 

연기 깨달음을 완성하여 붓다가 되다

 

수승한 즐거움과 그 발생조건들을 향상적으로 포착하는 동시에, 모든 즐거움과 발생조건들에 갇히지 않는 능력을 확보해 가던 고타마 싯다르타. 그는 그 과정의 정점인 선정의 궁극경지에서 문득 과거생過去生으로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자 과거생의 개별화된 삶들을 관심 가는 대로 추급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숙명통宿命通>. 이어서 수많은 개별 과거생들의 상호 연관으로 관심을 기울이자, 삶의 연속적 전개 사이에 인과적 연관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천안통天眼通>.

 

사진 2.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 간다라(2~3세기), 독일 국립베를린아시아박물관, 사진: 유근자.  

 

그렇게 ‘직접 알게 된 앎[直接知]’으로써 성취한 ‘조건인과적 발생에 대한 통찰’(연기 깨달음)을 현재 실존에 적용하였다. 그러자 ‘삶의 괴로움 및 그것과 맞물려 있는 번뇌라는 현상[苦]’, ‘그 현상을 발생시키는 인과적 조건들[集]’, ‘고통과 번뇌를 발생시키는 인과적 조건들에서 풀려난 지평[滅]’, ‘풀려난 지평을 성립시키는 조건들[道]’이 확연해졌다. 이어서 ‘더 이상 고통과 번뇌의 발생조건들에 매이지 않는 지평(해탈)’이 완벽해졌고, ‘그런 성취가 구현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는 능력[解脫知]’이 밝아졌다<누진통漏盡通>.

 

어릴 적 체험했던 즐거움에 대한 기억을 단서로 삼아 모든 현상을 ‘조건적 발생’으로 보는 관점을 수립하였던 고타마 싯다르타. 그때 성취한 것은, 성찰적 사색을 통해 확보한 ‘이지적理智的 연기 깨달음’이었다. 그 이지적 연기 깨달음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선정 현상을 발생시키는 조건에 눈뜰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조건들의 선택을 통해 확립한 새로운 선정을 토대로 ‘연기 깨달음’을 체득적으로 완성시켰다. 성찰을 통한 ‘이지적 연기 깨달음’에서 출발하여, 선정을 통한 ‘체득적 연기 깨달음’으로 나아간 것이다.

 

다 해결했다. 더 이상 풀어야 할 문제는 없다. 고타마 싯다르타를 혼란과 불안, 고통으로 짓누르던 근원적·궁극적 문제 상황이 완전하게 해소되었다. 붓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세상이 보지 못하는 높이, 세상이 알기 어려운 깊이를 품게 된 이들에게 운명처럼 엄습하는 짙은 고독. 차라리 이대로 끝낼까.

 

조건에 따라 발생한 모든 현상, 모든 경험과 현상을 발생시킨 조건들에, ‘매이지 않고 갇히지 않는 자유의 지평’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그 지평에 서서 ‘빠져들지 않으면서 만나는’ 연기緣起의 세상. - 그 속에는 예전의 자신처럼 혼란과 불안, 고통과 번민의 가시덤불을 어지럽게 헤매는 사람들이 있다. 빠져나온 자의 무관심을 선택할 것인가, 연민을 선택할 것인가.

 

‘무조건적·절대적 자아 및 존재’라는 환각 현상을 발생시키던 조건들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인간은, 세상을 ‘하나처럼’ 경험한다. 절대 자아, 실체 존재라는 환각이 구축했던 격리와 배제가 해체된 세상을 만난다는 의미에서의 ‘하나로 만남’이다. 이 ‘하나 됨’의 경험을 조건으로 삼아 발생하는 ‘제한 없는 연민’, 그 광대한 자애는, 붓다의 운명으로, 붓다의 속성으로 솟구친다. 붓다, 그는 고독을 넘어 만남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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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고려대에서 불교철학으로 석·박사 취득. 울산대 철학과에서 불교, 노자, 장자 강의. 주요 저서로는 『원효전서 번역』, 『대승기신론사상연구』, 『원효, 하나로 만나는 길을 열다』, 『돈점 진리담론』, 『원효의 화쟁철학』, 『원효의 통섭철학』, 『선禪 수행이란 무엇인가?-이해수행과 마음수행』 등이 있다.
twpark@ul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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