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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거사와 배우는 유식]
아치 · 아견 · 아만 · 아애와 함께하는 마음, 말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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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2019 년 5 월 [통권 제73호]  /     /  작성일20-06-23 18:49  /   조회5,82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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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 불교학자 ‧ 유식 

 

저번 호에서 말나식은 언제나 집요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이며, 더러운 마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게다가 가치론적으로 선도 불선[악]도 아닌 무기無記, 특히 유부무기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말나식과 함께 작용하는 ‘심소心所’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마음 따라 작용하는 심소

 

심소란 마음[의식, 말나식, 아뢰야식]이 작용하면 마음과 반드시 동반하여 함께 작용하는 부수적인 마음입니다.(주1) 요즈음 말로 설명하면 부끄러움, 분노, 욕망, 질투, 원한 등 일종의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필자는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중)에 따라 심소를 ‘마음작용’이라고 번역합니다. 여기서는 둘을 혼용하여 사용합니다. 독자들께서는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말나식과 함께 작용하는 심소는 모두 18개입니다. 먼저 어떤 마음이든 활동할 때에는 반드시 작용하는 오변행[촉, 작의, 수, 상, 사]의 심소입니다. 아뢰야식을 설명할 때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만, 이것은 의식이나 말나식뿐 아니라, 아뢰야식이 활동할 때도 함께 작용합니다. 둘째는 별경別境의 혜慧 심소입니다. 이것은 별경 심소에 속하는 것으로 ‘늘 자기중심적으로 선택하고 분류하는’ 마음작용입니다. ‘선택하는 것’이 무엇 때문에 나를 괴롭게 하는지는 별경 심소를 설명할 때 자세하게 기술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대수번뇌大隨煩惱 8개, 즉 도거掉擧 · 혼침惛沈 · 불신不信 · 해태懈怠 · 방일放逸 · 실념失念 · 산란散亂 · 부정지不正知입니다. 유식에서는 번뇌를 근본번뇌와 수번뇌[부수하는 번뇌]로 나눕니다. 수번뇌는 다시 대수번뇌, 중수번뇌, 소수번뇌로 세분합니다. 그 중에 대수번뇌 8개는 말나식과 함께 작용하는 심소입니다.

 

네 번째는 아치我癡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4가지 번뇌입니다. 독자들께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용어들이 갑자기 등장하여 황당하실 줄 압니다만,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여기서는 이중에서 말나식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4가지 번뇌[아치 · 아견 · 아만 · 아애]만 기술하고 나머지 14개 심소[마음작용]에 대해서는 나중에 별도로 설명하겠습니다. 말나식과 늘 함께 작용하는 4가지 번뇌에 대해 세친 보살의 저작인 『유식삼십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四煩惱常俱 사번뇌상구 謂我癡我見 위아치아견 幷我慢我愛 병아만아애

(말나식은) 언제나 사번뇌와 함께 작용한다. (사번뇌란) 아치, 아견, 더불어 아만, 아애이다.

 


<아치>

 

먼저 아치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불교에서는 번뇌 중의 번뇌[근본번뇌]를 탐[탐욕]·진[분노]·치[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삼독이란 독이 사람을 해치듯이 수행자의 수행을 방해하는 최대 방해꾼을 탐 · 진 · 치의 3가지로 비유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이 삼독 중의 하나인 ‘치癡’에 ‘나’를 뜻하는 아我를 첨가하여, ‘자기 자신에 대해 어리석다’라고 아치를 정의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어떤 존재이며, 나의 무엇에 대해 어리석은지, 그리고 자신에 대해 어리석은 것이 왜 괴로운지[번뇌] 살펴봅시다.

 

부처님께서는 본래 ‘나’는 ‘무아=연기=공=무자성’한 존재라고 합니다. 현실에서 엄연히 나는 존재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부처님은 ‘나’를 ‘공’한 존재라고 했을까요? 우선 현재 내 자신은 어떻게 이루어진 존재인지 알아봅시다. 우선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지구가 생기고 나서, 35억년 전에 근원적인 생명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체가 미생물에서 생물 등으로 진화를 거듭하여 어류, 동물, 영장류, 원숭이, 인간으로 진화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의 조상인 단군할아버지에서 출발하여 고구려인 내지 신라인이 되었습니다. 이 분 중에 어느 한 분이 나의 조상이 되어 고조, 증조, 할아버지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만나 내 아버지를 낳았으며,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만나 내 어머니를 낳았습니다. 또한 어떤 인연으로 인하여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 사랑을 나누어 아버지의 정자 20만개 중의 하나가 어머니의 난자와 결합하여 나는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만약 내 조상 중에 한 분이라도 임진왜란 또는 병으로 돌아가셨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 부모의 교육과 학교 교육[선생님, 친구 등]을 받으며 또한 주변 사람들[사회]의 도움으로 생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위 환경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우선 태초에 우주가 생겼고, 우주 안에 태양계, 태양계 안에 지구가 생겼습니다. 이 지구에는 나를 포함해 수많은 사물이 존재합니다. 그 사물들은 우주, 태양계, 지구의 도움으로 존재합니다. 또한 나는 주변의 무수한 사물들의 도움으로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 하고, 책을 보거나 수업을 받기 위해서는 책상과 의자의 도움을 받아야하며, 잠을 자기 위해서는 집 · 침대 · 이불 · 베개 등의 도움을 받으며, 직장이나 볼일을 보기 위해서는 자동차 · 지하철 등의 도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컴퓨터 등의 말할 수 없는 수많은 존재로부터 도움을 받아야합니다.

 

게다가 나는 신장, 신경, 가슴, 근육, 뼈와 60조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갑니다. 이처럼 나는 다른 모든 것의 인연에 의지해서 존재합니다. 나는 단 1초도 다른 것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내 주변이 있는 모든 사물은 인연-간접적인 원인[다연多緣]과 직접적인 원인[일인一因]-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른 것의 도움을 받아 생존하고 존재합니다. 이처럼 내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는 다른 것의 인연에 의해 존재합니다. 잠시 생각해보세요. 다른 것에 의지하여 생존하는 이런 존재에 자성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나는 다른 것에 의해 존재하고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는 연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자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존재[나와 사물]는 연기, 공, 무 자성, 무아라고 하셨던 것입니다.(『왕초보 반야심경 박사되다』, 김명우, 민족사) 그러므로 나는 스스로 ‘살아가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것에 의해 ‘살려지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나는 무아, 연기, 공, 무자성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에게 대해 바르게 알지 못하고, 게다가 이런 나 자신에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운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나식이 움직이면 아치는 늘 함께 작용하여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심소입니다.

 

<아견> 

 

아견이란 ‘자신이 존재한다고 본다’는 의미입니다. 앞에서 설명했습니다만, 나[우리]는 많은 조건에 의해 생겨[인연생기] 유지되며,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즉 연기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런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허위의 자아를 구상하고 고정화하거나 실체화하여 그 자아[자신]에 집착합니다. 이것을 아견我見이라고 합니다. 아견을 자신에 집착한다는 의미에서 아집我執, 신체가 지금 여기에 실재한다는 의미인 유신견(sat[有]-kāya[身]-dṛṣṭi[見]) 또는 유신견을 음사하여 살가야견薩迦耶見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무언가 ‘나’라고 하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존재[타인]와 별개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렇게 사는 것이 내 삶을 유지하는 데도 편리합니다. 그렇지만 『반야심경』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나’라고 하는 실체는 없는 것, 즉 인간은 공한 존재[오온개공]입니다. 이처럼 말나식이 작용하면 ‘아견’의 심소가 늘 작동합니다.

 

<아만>

 

아만은 ‘타인과 비교하여 자신을 높이고 타인을 낮추어 보려는 마음작용’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낫고 더 똑똑하고 더 훌륭하고 더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을 높이고 상대를 낮추는 번뇌입니다. 특히 자존심, 자랑 등이 고만한 것으로 변질되면 상대를 낮추어 보는 아만으로 발전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 만심慢心은 우리들이 좀처럼 자각하기 어려운 번뇌입니다. 왜냐하면 만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심이 없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만심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수행을 통하여 만심을 없애면 이번에는 만심을 제거했다는 또 다른 만심이 생기합니다. 이처럼 만심이 없어지더라도 또 다른 만심이 끊임없이 생깁니다. 그래서 만심은 제거하기 힘든 번뇌입니다. 유식의 논서[『유식삼십송석』·『성유식론술기』]에는 만심을 7종류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 만慢입니다. 만이란 능력 · 재산 등이 자신보다 열등한 자에 대해 자신이 그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거나 능력·재산 등이 동등한 자에 대해 자신이 그와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다시 말해 만이란 자기보다 못한 자와 자기를 비교하여 자기가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자기와 동일한 수준의 사람과 비교하여 자기와 동일하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식에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마음을 번뇌라고 규정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유식에서는 이런 마음을 번뇌라고 할까요? 유식에서는 자신과 상대를 비교하는 것 자체를 번뇌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뛰어나다든지 저 사람과 동일하다든지 하는 것, 즉 상대를 의식하는 것 그 자체가 만심을 일으키는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과만過慢입니다. 과만이란 능력 · 재산 등이 자기와 동등한 자에 대해 다른 측면, 예를 들면 보시 · 계율 · 용기 등은 자기가 뛰어나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집안이나 학문 등이 나보다 뛰어난 사람에 대해 자신은 능력 · 재산 등의 면에서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만과만慢過慢입니다. 만과만이란 만심이 점차로 높아져 능력 · 재산 등이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에 대해 자신이 뛰어나다고 내심內心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보다 뛰어난 자에 대해 말로 표현은 못하고 마음속으로 혼자서 은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필자도 늘 경험하는 번뇌입니다. 

네 번째는 비만卑慢입니다. 비만이란 능력·재산 등이 상대가 월등하게 뛰어나지만, 그 차이는 조금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던 상대를 낮추고 자신을 높이려고 하다보면 이런 번뇌는 늘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아마도 많은 독자들께서도 이런 번뇌를 자주 경험했을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아만我慢입니다. 앞에서 설명했기 때문에 생략합니다.

 

여섯 번째는 증상만增上慢입니다. 증상만이란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이미 얻은 것처럼 상대를 속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상대보다 자신의 덕이 조금 뛰어나지만, 마치 상대보다 자신의 덕이 훨씬 뛰어나다고 하는 번뇌입니다. 증상만은 참선이나 수행할 때 가장 잘 드러나는 번뇌입니다. 예를 들면 아직 화두를 깨치지 못한 사람이 화두를 깨쳤다고 공언한다든지 아니면 수행 도중 아직 깨닫지 못했으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증상만은 수행 중에 나타나는 일종의 허영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는 사만邪慢입니다. 사만이란 자신에게 덕이나 수행력 등이 전혀 없으면서도 자신은 보시도 잘하고 계율을 잘 지키고 뛰어난 덕이 있다고 하는 만심입니다. 사만도 증상만처럼 수행 중에 나타나는 허영심의 일종입니다. 이런 사만은 수행이 깊은 척 포장하고 있는 스님이나 참선한다고 절에 들락거리지만 전혀 수행력이 없는 유한마담들에게 나타나는 대표적인 번뇌입니다.(『마음공부 첫걸음』, 김명우, 민족사) 이와 같이 말나식은 아만과 늘 함께 작용하여 나를 괴롭힙니다.

 

<아애>

 

아애는 ‘자신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마음작용입니다. 다시 말해 아애는 무조건적으로 오로지 자기만을 계속해서 사랑하고 집착하는 마음작용입니다. 아애는 자기만을 사랑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아탐我貪이라고도 합니다. 아애도 늘 말나식이 움직이면 늘 함께 작용하여 나를 힘들게 합니다.

 

모든 번뇌의 근본은 어리석음

 

이상으로 말나식이 움직이면 언제나 함께 작용하는 4가지 번뇌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4가지 번뇌 중에서도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인 ‘나’와 ‘사물’의 도리[공, 연기, 무상, 무아]를 모르는 ‘치癡’가 가장 중심적인 번뇌입니다. 그래서 『유식삼십송』의 주석서인 『성유식론』에서는 “모든 번뇌가 생기할 때 반드시 ‘치’로 말미암는다.”고 주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이 모든 번뇌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본질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아는 인연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허위의 자아상을 구상하여 고정화·실체화하는 아견이 생기합니다. 그리고 아견에 집착하기 때문에 아만이 일어나고, 아치, 아견, 아만이 생기하므로 자기에게 애착愛着하는 아애가 생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나식은 깨어있든 깊은 수면에 빠져있든 착한 일을 하든 나쁜 일을 하든 언제나 집요하게 ‘나’의 본질을 모르게 하여 나를 높이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게 하는 번뇌의 마음이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쉽지 않습니다. 마치 주전자 속에서 끊고 있는 뜨거운 물이 주전자 주둥이에서 부글부글 솟구치는 것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나’라는 생각이 늘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상대와 비교하여 ‘나를 높이는 생각(아만)’, 즉 자기의 본래 모습보다 자신을 높이는 것은 결국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자신을 속이고 나면 나중에 후회와 회한이 몰려와 나를 괴롭게 만들어, 결국 그것은 번뇌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철 스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자기 마음을 속이지 말라[불기자심不欺自心]”는 가르침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수행을 한다고 해서 이기적이고 더러운 마음인 말나식을 완전하게 제거할 수는 없겠지만, “자기 마음을 속이지 말라.”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대로 우리 모두 부단한 노력[정진]을 통해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말나식’을 조금이라도 약화시켜 봅시다.

 

1) 유식에서는 마음을 심왕心王과 심소心所로 나누는데, 심왕이란 마음의 주체[전오식, 의식, 말나식, 아뢰야식]를 마음[心]의 임금王이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심소란 심소유법心所有法의 줄인 말로 ‘마음에 소유된 것’, 즉 심왕에 부수하는 신하와 같은 의미이다. 즉 마음의 주체를 임금, 마음의 주체에 부수하여 작용하는 심소를 신하로 비유한 것이다. 심소는 크게 구별하면 6위(변행5, 별경5, 선11, 번뇌6, 수번뇌20, 부정4), 보다 자세하게 나누면 51개이다. 자세한 것은 ‘심소’ 부분에서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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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암
불교학자. 유식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유식삼십송과 유식불교』·『마음공부 첫걸음』·『왕초보 반야심경 박사되다』·『범어로 반야심경을 해설하다』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마음의 비밀』·『유식불교, 유식이십론을 읽다』·『유식으로 읽는 반야심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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