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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간절한 염원 끝에 만난 ‘바른 선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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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3 년 7 월 [통권 제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6,36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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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정혜사 주지 원당 스님

 

장마를 앞두어서인지 날씨는 보통 변덕스럽지 않았다. 울다가 웃다가 어느새 잠에 빠지는 아기처럼 날씨의 마음을 도통 알 수 없을 것 같던 날 대구로 향했다. 전국에서 제일 더운 곳으로 가는 길이 마냥 좋지는 않았지만 날씨의 변덕 때문인지 오히려 대구는 선선했다.

 

 


대구 정혜사 주지 원당 스님

 

역에서 택시를 타고 달려 도착한 곳은 대구시 남구 대명동 정혜사. 대구에만 3개가 있는 ‘동명삼사(同名三寺)’ 정혜사 중 하나다. 전형적인 도심 주택가에 주택인 듯 절인 듯 조용하게 앉아 있는 정혜사는 소박한 모습이었다.

 

‘남을 위해 기도 합시다’ 세로 현판과 원(圓) 상으로 꾸며진 출입문을 보니 뭔가 모를 성철 스님의 기운이 느껴진다. 3층 건물인 정혜사는 1층 종무소, 2층 공양실, 3층 법당으로 구성돼 있다. 작은 건물이지만 각 층마다 걸린 주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 三界猶如汲井輪 百千萬劫歷微塵 圓覺度量何處 現今生死卽時(역천겁이불고 긍만세이장금 삼계유여급정륜 백천만겁역미진 원각도량하처 현금생사즉시)’, 즉 ‘천겁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요, 만세를 뻗어도 항상 오늘! 삼계는 마치 우물의 두레박처럼 돌고 도는 것 같이 백천만겁의 많은 세월을 지내도다. 깨달음의 도량이 어디메뇨? 지금 이 세상 바로 여기라네!’라는 말이다.
주련의 글씨를 보며 마음을 한 번 쉰 뒤, 정혜사 주지 원당 스님을 만났다.

 

기도로 맺어진 인연

 

원당 스님은 절의 구석구석을 보여준 뒤 대중스님들이 생활하고 있는 고명선원(古明禪院)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규모가 크지 않다보니 요사채는 절 옆에 따로 마련했다고 한다. 자리에 앉아 다시 보니 원당 스님의 표정은 절 만큼이나 소박하고 편안해 보였다. 차를 나누며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했다.
원당 스님은 성철 스님 제자들 중 비교적 막내 그룹에 속한다. 성철 스님 말년에 출가했다는 얘기다. 한창 ‘뜨던’ 다른 스님들도 많았을 때인데 왜 스님은 성철 스님을 은사로 모셨을까? 이것부터가 궁금했다. 그런데 스님의 얘기를 들어보니 답은 간단했다. 답은 바로 ‘간절한 염원’에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불교에 익숙했던 스님은 대학 시절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며 ‘출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뭔가 모를 답답함만 느끼며 좀처럼 풀리지 않던 ‘존재의 문제’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영남 지역 유수의 직장에 다녔지만 행복지수는 더 낮아졌다.

 


대구시 대명동에 위치한 정혜사

 

존재 이유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사상과 종교 등에 관한 각종 책을 보며 공부했지만 허사였다. 그래서 매일 하루 1시간씩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스님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해인사 말사인 함안 원효암에서 부목(負木)으로 살면서 본격적으로 ‘집중기도’를 시작했다. 스님의 기도 내용은 “바른 선지식 만나서 출가하게 해 주소서.”였다.

 

"그렇게 원효암에서 2년 정도 기도하다가 인연이 돼 해인사 큰 절에서 늦깎이로 출가했습니다. 당시 평균 출가연령보다 훨씬 늦게 절에 왔더니 구박(?)이 심해 한 달여간은 터벅머리 행자로 지냈어요. 해인사 보경당 마룻바닥에 좌복을 깔지 않고 3000배를 해낸 후 ‘반야심경’과 ‘해인사 행자 10계’를 외우고 난 뒤에야 겨우 머리를 깎고 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해인사 방장실인 퇴설당에서 행자가 필요하다는 연락이 와 제가 발탁되었습니다. 출가 전에는 그렇게 막혀 있던 제 인생의 인연이 한 순간에 풀렸던 것 같았습니다. 원효암에서의 기도가 마침내 이뤄지는 순간이었죠. 하하.”

 

퇴설당과 행자실은 해인사 경내에 같이 있었지만 심리적 거리는 어마어마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스님은 퇴설당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원당 스님은 “은사스님의 첫인상이 무서웠다.”고 한다. 부리부리한 눈에서 엄청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속가에서는 모시지 못했던 우리 할아버지 대하 듯 모시면 되겠구나.”고 생각했다.

 

“은사스님과의 인연은 기도 가피로 맺어졌기 때문에 은사스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저도 은사스님같이 열심히 정진하며 계율의 울타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승려생활을 하리라 다짐했습니다.”

 

각오는 남달랐지만 역시 초짜는 초짜였다. 총림의 어른을 모시는 것이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선원에서 성철 스님을 시봉하던 원융 스님이 물을 따뜻하게 데워달라며 일을 원당 스님에게 맡겼다. 스님은 “얼른 해야 할 것 같아” 평소보다 일찍 성철 스님이 주석하던 방에 군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물을 끓이는 것도 ‘수동’으로 해야 했던 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이 생겼다. 평소와 똑같은 양의 장작을 지폈지만 방안의 온도가 갑자기 올라가 버리고 만 것이다. 방안에서 열기가 느껴지자 스님은 찬물로 솥을 식히는 등 할 수 있은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결국 퇴설당 방 온도 조절 실패의 책임(?)을 지고 스님은 백련암으로 올려 보내졌다. 다음 날, 성철 스님 역시 ‘찜질방’이 되어 버린 퇴설당에서 백련암으로 잠시 ‘피신’을 왔다. 성철 스님이 백련암에 도착하자 원당 스님은 주차장까지 내려가 인사를 올렸다. 원당 스님을 본 성철 스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피식 웃기만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후 스님은 성철 스님의 시자(侍者)로 복귀(?)했다. 시자로 복귀해서도 실수가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성철 스님은 제자의 허물을 보듬어 주었다.

 

“은사스님께서는 호통을 치실 때는 딱 그때뿐이었습니다.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다시 재론하지 않으셨어요.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는 무언(無言)의 표현이셨죠. 그렇다 보니 시자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더 노력을 했던 것 같습니다.”

 


성철 스님이 말년에 자주 머물렀던 고불원에서 함께한 모습. 뒷줄 가운데가 원당 스님이고 맨 왼쪽은 원인 스님이다.

 

앞서 밝혔듯이 원당 스님은 성철 스님의 말년을 시봉했다. 성철 스님도 여느 사람들처럼 잔병치레가 적지 않았다. 그래도 성철 스님의 비상한 기억력은 녹슬지 않았다.

 

“사람들은 보통 50대 후반을 넘기면 기억력이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그런데 은사스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해인사 퇴설당에 계시다가도 갑자기 백련암 장경각에 있는 경전이나 어록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어요. ‘수많은 책 중 그것을 어떻게 찾나?’라고 생각하며 긴장하고 있으면 스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책은 몇 번째 책장 몇 번째 칸 몇 번째 줄에 있다’고요. 그 말씀을 듣고 장경각에 가면 여지없이 말씀하신 책이 꽂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몇 번 심부름을 하다 보니 은사스님의 기억력은 정말 컴퓨터와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퇴설당에서 원당 스님이 성철 스님을 시봉하던 당시 백련암은 예전의 관음전을 허물고 현재의 큰 법당인 적광전과 관음전의 불사를 하고 있던 시기였다. 당연히 백련암 ‘식구’들은 불사에 동참했다.
“스님들은 백련암 초입부터 불사 현장까지 자갈과 모래, 목재, 시멘트 등을 운송하는 작업을 주로 담당했어요. 거의 막노동에 가까운 생활을 1년 동안이나 했지만 함께 했던 스님들 모두 열심히 일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불사를 돕다 그만 허리디스크를 얻고 말았다. 한 달 여간 한방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예전의 일상으로 복귀한 스님은 하루 1000배의 수행을 계속 이어나갔다.

 

원당 스님은 “출가해 계(戒)를 받고 은사스님이 내려준 경전과 어록을 공부한 뒤 선원에 가 정진하는 백련암의 시스템은 비교적 잘 갖추어진 제도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정작 스님은 백련암의 공부 코스를 반 정도밖에 이행하지 못해 ‘부득이하게’(?) 해인사 강원에 입학해 공부를 더 했다고 한다.
강원을 마치고 스님은 선방에서 정진했다. 약 7년 여간 지리산 칠불암, 하동 쌍계사, 곡성 태안사, 양산 통도사 선원 등에서 ‘삼서근(麻三斤)’ 화두를 들고 정진했다.

 

“선원에서 허리디스크를 가지고 참선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크게 공부의 맛을 보지는 못했어요. 다만 선방의 정진풍토와 승려로서 대중생활의 중요성을 익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스님은 그렇게 선방을 다니다 문도회의 ‘호출’로 정혜사 소임을 맡게 되었다. 

 


고명선원에 모셔진 문수보살상. 양쪽에 성철 스님의 '옴 아비라 훔캄 스바하' 친필 현판이 걸려 있다.

 


“배가 고프면 스스로 밥을 떠먹어야지…”

 

“대구에 살고 있던 백련암 신도님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정혜사의 역사는 약 30년 가까이 됩니다. 정식으로 법당을 개원한 것은 1994년이고 2004년에 원일, 원서, 원인, 원종 스님과 함께 정혜사에 왔습니다. 제가 오기 전까지는 신도님들이 자체적으로 절을 운영해왔고 특별한 법회가 있을 때는 백련암 소임스님들이 법문을 해 주는 식이었습니다.”

 

정혜사와의 인연이 궁금하다는 질문에 스님은 정혜사의 역사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을 자세히 풀어줬다. 스님은 정혜사에 부임해 매일 1000배의 참회수행과 한 달에 한 번 신도들과 함께 3000배를 하기 시작했다. ‘백련암 법’에 맞춰 사찰 운영을 시작한 것이다.
“과거 서울 정안정사나 하남 정심사에서 불자들과 함께 연 4회의 정기 아비라 기도와 매 주말 3000배를 하긴 했었는데, 정혜사에 와서는 소임자로서 불자들에게 기도 방법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 더 열심히 한 것 같습니다.”

 

스님은 허리가 다소 불편해 지금은 하루 600배를 하며 정진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정혜사에서의 기도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진행하는 정기법회와 매월 두 번째 목요일 광명 진언 및 어류 방생, 매월 세 번째 목요일 정기 3000배, 매월 네 번째 목요일 불교 노인복지시설 자원봉사 등으로 체계화 돼 이어지고 있다. 또 매년 아비라 기도 기간에는 백련암에 가지 못하는 신도들을 중심으로 정혜사에서 똑같은 시스템으로 정진한다. 이와 함께 매년 안거 때에는 선방에 대중공양을 올리기도 한다. 인터뷰를 한 다음날 정혜사 스님들과 불자들은 문도사찰이기도 한 함양 남산사 고경선원 순례를 다녀오기도 했다.
스님은 ‘자기 기도는 자기라 하라’고 한 성철 스님의 가르침은 너무도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혜사를 찾은 신도가 성철 스님 진영에 참배하고 있다.

 

“은사스님께서는 우리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내 안에 있는 행복의 종자를 잘 키우면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분명한 도리를 알고도 실천하지 않으면 행복을 추구할 수가 없을 것이고 그저 눈먼 봉사마냥 답답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흔히 깨달음을 출가자의 전유물인양 착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은사스님께서는 재가자들도 분명히 깨달음을 맛볼 수 있다고 가르치시면서 직접 닦을 것을 권하셨습니다. 자기 기도는 자기가 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죠. 배가 고프면 스스로 밥을 떠먹어야지 남이 대신 먹는다고 해서 배고픔이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스님은 이러한 기도방법을 토대로 정혜사가 보현보살의 행원이 이뤄지는 곳이 되기를 서원하고 있다.
“잘 아시다시피 부처님께서는 내 안의 불성(佛性) 종자를 끄집어내 쓰는 방법으로 여러 가지 방편을 제시하셨고 그 길에서 최초로 설하신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은 은사스님께서도 권하실 정도로 훌륭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보현행원품’은 각자가 보현보살의 10대 행원을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그냥 행하기만 하면 바로 부처님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보현보살의 10대 행원이 은사스님께서 말씀하시고 우리 신도들이 행하고 있는 108참회문에 다 녹아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초하루와 보름 법회 때마다 보현행원사상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잘 실천해 보자고 신도님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에만 천착할 것이 아니라 현실 삶 가운데에서도 그 행원을 잘 실천하면 우리가 바로 부처님으로 살 수 있다는 법문을 자주 합니다. 앞으로도 은사스님의 가르침처럼 세간에서 불자들과 더불어 보현행원을 펼치며 살고 싶습니다.”

 

소리 없이 강하게 움직이는 정혜사가 성철 스님의 가르침과 보현보살 10대 행원이 실천되는 도량으로 자리 잡을 날이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그 중심에는 원당 스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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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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