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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음미하는 부처님 말씀]
'최선'이라는 말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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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학  /  2018 년 12 월 [통권 제68호]  /     /  작성일20-07-15 15:39  /   조회5,33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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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듣기도 좋고, 하기도 좋은 말입니다. 이 말을 하지 않거나 듣지 않고 살아온 사람은 없을 겁니다. 놓인 상황에 따라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다짐처럼 말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어떤 의미로 쓸까요? 본래 의미를 제대로 인식은 하는 걸까요?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이 사전부터 한번 펼쳐 보겠습니다.

 

최선이란?

 

최선(最善): 「1」 가장 좋고 훌륭함. 또는 그런 일. 「2」 온 정성과 힘.(표준국어대사전)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쉽지도 않습니다. 조금 애매하기도 합니다. 첫 번째 의미, '가장 좋고 훌륭한 일'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대정신이나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장 좋고 훌륭한 일' 정도라면 무난한 이해가 되겠지요. 두 번째 의미, '온 정성과 힘'이라는 것도 '가장 좋고 훌륭한 것'에 수렴됩니다. '온갖 힘을 다하려는 참되고 성실한 마음'이라는 '정성'을 전제하고 있으니까요. 두 의미를 합하여 이해하자면, '가장 좋고 훌륭한 일을 위하여 참되고 성실한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자주 쓰는 것에 비하면 그 의미가 자못 무겁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런 의미로 '최선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최선'이라는 말이 실제로 어떻게 쓰이는지 정직하게 살피려면, '최선'이라는 말이 가장 큰 목소리로 외쳐지는 곳을 찾는 것이 최선(?)일 것 같습니다. 정치판을 가장 먼저 찾아야겠지요. 그 가운데서도 선거 운동 현장이야말로 '최선'의 경연장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저마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차선은커녕 '차악의 선택'을 강요당하는 선거를 자주 경험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량(?)들이 외치는 '최선'이란 과연 어떤 종류의 최선일까요.

 


 

 

스포츠 현장도 최선의 경연장입니다. 강팀과 약팀이 맞붙을 때, 최선의 다하지 않은 강팀이 이기고, 최선을 다한 약팀이 지는 것이 예사입니다. 승리한 강팀에게 비난이, 패배한 약팀에게 찬사가 돌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난 받았던 그 강팀이 최종 우승이라는 결과를 얻었을 때, 예의 비난은 최선의 전략이었다는 찬사로 바뀝니다. 스포츠 현장에서 벌어지는 최선은 또 어떤 종류의 최선일까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 경기에서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가 맞붙었습니다. 전반전이 무승부로 끝난 다음 후반전 6분에 골키퍼와 마라도나가 1:1로 경합하던 상황에서 마라도나는 손을 사용해 골을 넣었습니다. 잉글랜드 팀은 강력히 항의했지만 주심은 정당한 골로 인정했습니다. 결국 이 경기는 2:1로 아르헨티나가 승리했습니다. 경기 후 마라도나는 인터뷰에서 "그 골은 '신의 손'에 맞고 들어간 것"이라고 발언하여 더욱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마라도나의 그 발언은 '최선' 이상의 주장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대회에서 아르헨티나가 우승했고, 당시는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가 영국에 패배한 지 4년 후였으니,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마라도나의 행위는 분명 최선이었을 겁니다. 훗날 마라도나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 골은 손으로 넣은 것이라고 양심(?) 선언을 했습니다. 이 또한 마라도나 입장에서는 최선이었겠지요. 적어도 진실은 밝혔으니까요. 어쩌면 지금까지 언급한 최선 가운데 그마나 최선의 본래 의미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시 물어봅니다. 최선이란 무엇일까요. 간단히 '가장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좋다'는 판단에는 주관이 개입될 수 있으므로, '실질적·도덕적·철학적 의미에 부합하는 가장 좋은 일'이어야 할 것입니다. 

 

불자들에게 최선이란? 

 

불자들에게 최선이란 무엇일까요. 당연히 부처님 가르침이겠지요, 최선의 동기, 최선의 방법, 최선의 결과를 낳게 하는 가르침이니까요.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룬 후 '전도선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들이여, 법을 전하러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에 자비를 베풀기 위하여, 신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둘이서 한 길로 가지 말라. 수행자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뜻과 문장이 훌륭한 법을 설하라. 오로지 깨끗한 삶을 드러내라. 눈에 티끌 없이 태어난 사람도 있지만, 가르침을 듣지 않는다면 그들도 멸망하고 말 것이다. 수행자들이여, 나도 가르침을 펴기 위해 우루벨라의 세나니 마을로 가노라." <잡아함경> 

 

위 경전에서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다'는 구절은 부처님 법의 완전무결함을 뜻하지만, 최선의 의미와도 계합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인간이 현실 속에서 최선을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쟁 기술로 개발된 인터넷이 인류에 엄청난 편익을 안겨 주었지만 폐해도 적지 않습니다.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만 이용한다고 해서 파국의 가능성이 제거되지는 않습니다. 독재의 과실이 아무리 커도 인권 유린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인류 문명과 역사의 양가적 속성이지요. 동기의 선함이 과정과 결과의 선함까지 보장하지 않습니다. 동기와 결과가 좋다고 해서 과정의 허물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최선이란 동기와 과정, 결과가 모두 좋은 일이어야 할 것입니다.

 

현실 속에서 동기와 과정, 결과가 모두 가장 좋은 일만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있다면 그가 바로 성인이겠지요. 누구든 스스로 진정 최선을 다했다고 믿을 수 있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서나 아니면 공동 목적을 가진 집단 내부에서나 할 말이지요. 성인이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지 않듯이 말입니다. 최선은 가치 평가의 언어입니다. 참 무겁습니다. 무시무시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무겁고 어려운 말을 참 쉽게 합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말하는 최선은 사실 최고가 되기 위한 노력을 의미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우리 모두는 최선을 다합니다. 일등하기 위해서, 금메달 따기 위해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 좋은 대학 가기 위해서. 노력도 모자라 '노오력' 하고 삽니다. 그것을 우리는 최선으로 믿고 서로를 격려하고 칭송하기도 합니다. 결과를 떠나서, 그 노력만으로도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위안을 주고받으면서 말입니다. 최고가 되기 위한 노력을 최선으로 착각한 것이지요.

 

최고는 제 아무리 높아도 상대적입니다. 최선은 절대적입니다. 최고가 지향하는 것이 목표라면, 최선이 지향하는 것은 가치입니다. 우리는 최고를 최선으로 착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어떤 최고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비록 결과가 초라할지라도 동기와 과정과 결과가 모두 선한 최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진실을 돌아볼 겨를 없이 살아온 까닭이겠지요. 최고가 되고자 하는 서로의 욕망을 무한 승인하면서 최선의 진정한 의미에 눈을 감아버렸다고 해야겠지요.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최선이라는 말은 진정한 최선과는 거리가 멉니다. 한 가지 예만 더 들어 보겠습니다. (싸잡아서 우리라고 말해서는 안 되지만) 부동산 투기에도 우리는 얼마나 최선을 다했습니까. 진정한 최선을 위해서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감히 말하자면 '실패할 용기'겠지요. 동기와 과정이 옳다면 실패도 감수하겠다는 용기.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사회는 실패에 너무 가혹하다고, 그 흔한 구조적 문제를 변명거리로 들고 나올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 글의 취지를 생각하면 안 될 말이겠지요.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전쟁터의 윤리가 요구되는 오늘입니다. 아득합니다. 그래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살아야겠지요. 정녕 최선을 다해서.

 

『법화경』 「서품」의 한 대목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문수보살이 미륵보살을 비롯한 대중들에게 『법화경』이 설해질 것임을 밝히는 대목입니다. 

 

"선남자들이여, 한량없고 가없는 불가사의한 아승지겁 전 과거에 부처님이 계시었으니, 그 이름은 일월등명여래·응공·정변지·명행족·선서·세간해·무상사·조어장부·천인사·불세존이시었습니다. 바른 법 펴시니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았습니다. 그 뜻 매우 깊고, 순수하여 잡되지 않은, 맑고 깨끗한 수행의 바탕을 두루 갖춘 아름답고 묘한 말씀이었습니다. 성문을 구하는 이에게는 사성제를 설하시어 생로병사 벗어나서 열반에 이르게 하시고, 벽지불을 구하는 이에게는 십이인연을 설하셨으며, 여러 보살을 위해서는 육바라밀을 설하시어, 모두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얻어 일체종지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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