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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우주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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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8 년 12 월 [통권 제68호]  /     /  작성일20-07-24 14:19  /   조회5,08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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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종의 사상은 삼라만상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법계연기설이 핵심을 이룬다. 하늘과 땅이 같은 뿌리이고, 모든 존재들이 한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존재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빈틈없는 관계로 짜여 져 있다면 나는 단지 그와 같은 전체를 구성하는 부품에 불과하고, 세상에는 거대한 전체로서의 우주만 존재하는 것일까?

 

화엄의 연기설을 살펴보면 전체의 관계성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개체를 소외시키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분이 곧 전체이고, 하나의 개체가 곧 전체[一卽一切]라고까지 한다. 따라서 나는 우주를 구성하는 부품 같은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우주의 중심이고, 우주를 움직이는 중심축이라는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내가 있어 전체는 하나로 연결될 수 있고, 거대한 우주의 톱니바퀴는 나로 인해서 비로소 작동하기 때문이다.

 

 


겁외사와 성철 스님상. 

 

 

이렇게 개체가 곧 전체이고, 내가 우주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개체와 전체, 나와 우주가 상호 소통하고 자유롭게 전환되는 작용이 필요하다. 화엄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주는 시공을 넘어 서로 연결되어 있고, 복잡한 연결망으로 상호작용하며 서로 전환된다고 한다. 법장은 존재들이 갖고 있는 그런 상호작용과 전환관계를 ‘모든 존재들이 걸림 없이 소통하는 원리’라는 뜻에서 ‘제법무애도리諸法無碍道理’라고 했다.

 

법장은 『탐현기』에서 ‘연기상유緣起相由’ 즉 서로 조건이 되어 발생하는 존재의 원리를 열 가지 주제로 설명한다. 성철 스님은 이 중에서 이문상입의異門相入義, 이체상즉의異體相卽義, 체용쌍융의體用雙融義라는 세 가지 주제를 선별하여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이들 원리만 제대로 이해해도 존재의 연기적 속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파도가 부셔져 바닷물이 되듯

 

이번 호에 살펴볼 내용은 ‘이체상즉異體相卽’에 관한 것이다. ‘상즉相卽’이란 서로 다른 두 개의 사물이나 현상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체상즉이란 서로 다른 개체들의 몸[體]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화엄에서 ‘상입’이나 ‘상즉’은 하나[一]와 전체[多]의 관계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등장한다. 하나는 전체와 다르지 않고, 전체는 하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개체와 전체가 둘이 아닌 이체상즉에 대한 법장의 설명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모든 연緣이 서로 바라보면서 서로의 모습을 빼앗는 것이다. 모든 존재들은 나와 너로 단절되어 있지 않고 서로의 모습을 박탈한다. 예를 들어 홍시는 토양의 성분을 빼앗아 홍시로 만들고, 토양은 다시 홍시의 형상을 빼앗아 흙으로 변화시킨다. 법장은 파도의 비유를 통해 서로의 모습을 빼앗는 원리를 설명한다. 파랑이 일어나는 바다에는 쉴 새 없이 파도가 친다. 먼저 밀려온 파도와 뒤에 밀려온 파도는 서로 다른 파도다. 하지만 철썩하고 부서지는 순간 이 파도는 저 파도의 형상을 빼앗고, 저 파도는 이 파도의 정체성을 박탈한다.

 

이렇게 각자 상대의 형상을 빼앗아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것이 상즉相卽이다. 이렇게 상즉이 되려면 나는 너라는 형상을 뺏어야 하고, 너는 나라는 특성을 뺏어야 한다. 그리하여 나도 사라지고, 너도 없어지는 ‘서로 빼앗음’ 즉 ‘상탈相奪’이 될 때 이 파도와 저 파도라는 개체의 울타리는 해체되고 바닷물이라는 전체성이 드러난다. 본래 이 파도도 바닷물이고 저 파도도 바닷물이다. 그럼에도 ‘나’라는 상相을 갖고 너를 차별하고, ‘너’라는 상을 갖고 나를 배제하는 것이 중생의 어리석음이다. 상탈은 그와 같은 차별과 변견에 사로잡힌 개별적 형상을 박탈함으로써 독립적 개체라는 허구를 깨고 전체성의 진실을 드러낸다.

 

둘째는 유체有體와 무체無體라는 특성이 있어야 연기가 성립된다는 점이다. 지난 호에서 이문상입을 말할 때는 작용의 관점에서 논했음으로 ‘유력’과 ‘무력’으로 설명했다. 여기서는 체의 관점에서 논하기 때문에 유체와 무체라는 체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파도라는 몸[體]이 있으려면 바닷물이라는 몸은 무無가 되어야 한다. 파도라는 개별성은 성립되고, 전체로서 바다라는 특성은 숨어야 한다. 반면 바닷물이라는 전체성이 드러나려면 파도라는 개별적 형체가 뒤로 숨어야 한다. 하나의 색色이 드러나려면 다른 형상은 공空이 되어 숨고, 공이 드러나려면 색이 숨어야 한다. 색과 공의 이런 조화가 있기 때문에 연기의 법칙이 성립된다.

 

셋째, 하나의 조건이 있기 때문에[得此一緣] 그로 인해 모든 관계가 성립[一切成起]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조건 중에 단 하나의 조건[緣]이라도 빠지면[若闕一緣] 다른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못하고, 그렇게 되면 연기의 원리는 깨지고 만다. 예를 들어 시계는 수많은 부품들이 맞물려 돌아간다.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한 치의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야 시간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런 톱니바퀴에서 하나만 빠져도 시계라는 메커니즘은 작동하지 않는다[餘不成起]. 이처럼 하나의 조건이 제 역할을 다 해야 그것을 기반으로 다른 관계들이 성립하며, 그런 관계가 성립되어야 연기의 원리가 확립된다.

 

나는 부분이자 우주의 중심

 

법장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색과 공의 관계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단 하나의 톱니바퀴[緣]만 빠져도 연기관계는 성립되지 못한다. 법장은 이를 ‘약궐일연若闕一緣’이라고 표현했다. ‘만약 하나의 조건만 빠져도’ 중중무진의 연기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온 우주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전체성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동시에 전체에서 각각의 개체들이 얼마나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 것인지를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법장은 ‘나’라는 개체에 대해 “여럿이 하나를 위하여 이루어지니[多爲一成] 여럿은 무체無體이고, 하나가 능히 여럿이 되니[一能作多] 하나는 유체有體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하나의 연[一緣]은 온 우주의 관계성을 연결 짓는 주체적 톱니바퀴 즉 ‘능기能起’가 된다. 그 외에 무수한 톱니바퀴들[多緣]은 그 하나의 톱니바퀴에 의해 맞물려 돌아가는 객체, 즉 ‘소기所起’가 된다. 이렇게 보면 ‘나’라는 개체는 자동차를 움직이는 엔진의 축과 같이 첫 번째 톱니바퀴가 된다. 나라는 하나의 톱니바퀴, 즉 일연一緣은 단지 하나의 개체에 머물지 않고 온 우주를 돌아가게 하는 주인공[能緣]이 되고, 온 우주의 존재들은 나에 의해 돌아가는 객체[所緣]가 된다. 나라는 개체는 그저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라는 거대한 톱니바퀴를 지탱하는 중심인 것이다. 하나의 개체는 부품이지만 하나로서 내가 없으면 우주가 돌아가지 않는다. 결국 우주는 나라는 작은 톱니바퀴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나’라는 ‘하나의 조건[一緣]’에 의해 우주가 돌아감으로 무수한 존재들은 ‘무체無體’가 되어 숨고, 나는 무수한 존재와 작용을 만들어 냄[一能作多]으로 ‘유체有體’가 되어 전면에 등장한다. 이 때 다른 모든 존재들은 장막 뒤에 숨어 있고 오로지 나 홀로 주인공 노릇을 한다. 하나가 주체가 되고, 여럿이 객체가 될 때는 여럿은 무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라는 하나가 모든 것을 짓고 움직이게 함으로 결국 하나의 개체만이 유일한 유체가 된다. 이렇게 보면 온 우주에서 오직 나 홀로 우뚝 솟아 있으며, 모든 것은 나로 말미암아 존재한다. 하고 많은 존재들은 오로지 나를 위해 존재하며, 우주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것은 나 하나만 우주의 주인공이고, 다른 모든 존재들은 객체이고 절대 무라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물론이고 나 밖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존재들도 모두 나와 같은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나와 남은 주인공인 동시에 손님이고, 손님인 동시에 주인공이다. 그래서 법장은 “여럿 아닌 하나가 없으며[無有不多之一], 하나 아닌 여럿이 없다[無有不一之多].”고 했다. 세상의 모든 하나는 온 우주의 조화와 협력 때문에 존재하고, 온 우주 역시 각각의 개별자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이 조화를 이루려면 온 우주가 오로지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그때는 온 우주가 하나의 개체를 유일한 존재인 듯 돋보이게 하고 다른 존재들은 뒤로 숨는다. 그것이 하나를 의지해 온 우주가 드러나는 이치다.

 

그런데 요즘은 하나를 앞세우고, 나머지가 뒤로 숨으려 하지 않는다. 모두가 다 주인공이 되어 전면에 나서려고만 한다. 하지만 모두가 동시에 주인공이 되려면 아무도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주인공은 전체와의 조화 속에서 전체의 양보와 배려 속에서 탄생한다. 한 사람이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그 주인공을 위해서 어떤 이는 음식을 준비하고, 어떤 이는 차를 몰면서 그가 주인공이 되도록 헌신해야 한다. 물론 그런 과정은 자신의 희생과 소외가 아니라 그런 과정을 통해 그 자신도 우주의 유일한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이처럼 나 스스로 우주의 중심으로 살아가는 동시에 다른 모든 존재들을 우주의 중심으로 섬기는 것이 ‘이체상즉의’에 담긴 의미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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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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