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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큰스님 추모 사업은 지금부터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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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4 년 1 월 [통권 제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46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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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택 스님

 

 


 

 

사람들이 원택 스님(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을 칭하는 ‘별명’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을 꼽자면 ‘시봉(侍奉)의 아이콘’이다. 여기에는 ‘부처님과 아난’과 같은 ‘성철과 원택’의 이미지가 있다. 출가 이후 평생 동안 스승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는 공통점이 있는 조합이다.  

 

2011년부터 3년 일정으로 진행했던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과 열반 20주기 추모사업이 마무리 된 최근 원택 스님을 만났다. 해인사 백련암과 부산 고심정사, 서울 백련불교문화재단 사무실을 오가는 일정 속에서 어렵게 자리를 마련했다.  

 

스님은 지난 12월 4일 서울에서 열린 명사초청 강연회를 끝으로 추모사업을 마무리 한 뒤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긴 휴식을 위한 쉼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숨고르기였다. 

 

‘감사함’과 ‘아쉬움’ 사이

 

먼저 지난 3년 동안의 사업 진행에 대한 소감이 궁금했다.

“3년간의 크고 작은 행사에 참여해 주신 많은 국민들과 불자님들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부족한 행사에 오셔서 때로는 관객이 되어 주시고 또 때로는 직접 참여해 주셔서 각종 행사와 사업들이 더 빛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성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은 문도스님들도 고맙습니다.

 

이렇게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도 제 개인적으로는 아쉬움도 큽니다.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진행 과정 속에서 여러 가지로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성철 큰스님 선양사업을 마무리 한다 생각하고 지난 3년을 달려왔지만 막상 일을 하면서는 앞으로 할 일이 더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날들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경전을 보고 있는 원택 스님

 

‘회향(回向)’을 염두에 둔 질문이었지만 원택 스님은 오히려 “이제 시작”이라고 밝혔다. 질문 의도와 다른 대답에 잠시 당황할 틈도 없이 원택 스님은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처음 큰스님 탄신 100주년 행사를 생각한 계기는 청담 큰스님 탄신 100주년 행사를 보면서 부터였습니다. 그러니까 2002년경이라고 할 수 있죠. 당시 서울 도선사와 수원 봉녕사가 주축이 돼 청담 큰스님 탄신 100주년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성철 큰스님과 ‘물도 새지 않는 사이’였다고 하는 청담 큰스님 탄신 행사여서 더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종단의 종정을 지낸 어른들을 잘 모시는 것도 우리 후학들이 챙겨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원택 스님은 그때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스님 주변에서는 시큰둥한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 동안 불교계에서 없었던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부작용(?)을 걱정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근현대 한국불교 역사 속에서 선지식(善知識)들에 대한 선양사업은 고작해야 문도가 중심이 돼 추모다례를 지내는 일이 사실상 전부였기 때문이다. 종단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추모 사업을 한 전례가 없었다.  

 

“성철 큰스님도 그렇지만 역대 종정스님들이나 선지식들에 대한 종단차원의 예우가 많이 부족합니다. 한국불교계에 훌륭한 어른들이 많이 계셨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일은 오히려 종단에서 해야 합니다. 또 내부적으로 볼 때도 역대 큰스님들을 조계종도들이 먼저 존경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어느 누가 존경하겠어요? 올해 탄허 큰스님 탄신 100주년 행사도 문도 중심으로 끝난 것 같아 아쉽습니다.”  

 

그래도 스님은 문도스님들과 마음을 모아 일을 추진했다. 본격적으로 기획을 하면서 스님이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은 성철 스님의 사상을 재정립하는 것.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았다.

 


선림고경총서와 성철 스님 법어집 일부

 

“큰스님께서 세상에 남기셨던 법어집이나 <선림고경총서>를 다시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자료들을 검토하고 학자들과 머리를 맞대 연구도 했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어요. 재정도 열악했고요. 사업을 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니 큰스님의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 ‘돈오돈수(頓悟頓修)’를 말씀하신 게 1940년 깨달음을 얻고 난 뒤부터였어요. 60여 년 전 파계사 성전암에서 10년 동안 동구불출(洞口不出) 하실 때에도 찾아오는 납자(衲子)들에게 계속 돈오돈수를 강조하셨어요. 또 1967년 해인사에서의 ‘백일법문’과 1981년 『선문정로』 발간을 통해 공식화하셨지만 이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원택 스님은 “큰스님께서 돈오돈수를 말씀하시면서 시작된 돈점논쟁에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보조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6~70여명에 이른다. 그러나 <보조전서>에 대한 일자색인집이 아직도 없는 상태다. 재작년 학술회의에 초청한 울산대 박태원 교수님이 훌륭한 논문을 발표해 주셨는데 그 논문으로 작년에 ‘대정학술상’을 수상했다. 그러고 보면 보조 사상 연구의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성철 큰스님의 돈오돈수도 더욱 가치를 발휘하는 상생의 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선학 발전과 선 수행의 진일보한 내일이 있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학자가 많지 않다는 현실적 제약 속에서도 원택 스님은 2011년부터 3년간 총 10여 차례의 학술포럼을 진행했다. 스님은 “열반 20주기가 되는 2013년에는 존경받는 대학자들을 모시고 성철 선사상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특히 돈점(頓漸)문제가 역사의 숙제로 남겨지게 된 것이 가장 아쉽다.”고 심경을 밝혔다.  

 

학술포럼 외에 본격적으로 사업들이 진행되면서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 추모전시회, 추모다례, 삼천배 정진과 같은 행사는 물론 불교텔레비전과 불교신문 등을 통한 법문 방송과 수행도량 취재를 이어 나갔다. 또 불교인재원과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전국에 있는 성철 스님 수행도량을 순례하기도 했다. 그 결과 『성철 스님이 들려준 이야기1,2』, 『성철 스님 행장』, 『이 길의 끝에서 자유에 이르기를』, 『참선 잘 하그래이』 등의 책이 나오기도 했다.  

 


사회 명사들이 성철 스님을 추모 하며 쓴 책, <참선 잘 하그래이>

 

“그래도 가장 좋았던 일은 불교텔레비전에서 2011년 4월부터 11개월간 큰스님의 ‘백일법문’과 ‘대학생 수련법회 법문’을 풀어서 방송한 것입니다. 큰스님 생전 화면이 많지 않아 다양한 사진자료를 넣어 영상을 구성하고 또 말씀이 워낙 빨라 법문을 자막으로 풀어서 전체적인 내용을 만들었는데, 많은 불자님들이 감명 깊게 봤다고 말씀해주셔서 저도 정말 기뻤습니다. 특히 50여 년 전에 ‘백일법문’을 통해 성철 큰스님께서 너무도 현대적인 법문을 하셨다는 것을 알았다며 고맙다고 하시는 분들을 만나서는 제가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하하.

 

또 지난 10월 19일과 20일 양일간 해인사 사리탑전에서 1200명이 넘는 불자들이 ‘모든 중생의 행복을 기원하는 삼천배 정진’을 함께 한 뒤 ‘한 생명 살리기 기금’ 3000만원을 조성해 동국대병원에 전달한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큰스님 탄신 100주년 다례를 조계사 대웅전 마당에서 많은 분들이 참석한 가운데 여법하게 봉행한 것도 적지 않은 성과였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고은 시인께서 ‘선시(禪詩)에서의 성철 게송(偈頌)’을 주제로 특별강연을 해주셨고 박세일, 공종원 선생님께서도 각각 좋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너무나 정성스럽게 강의해 주셨던 선생님들께도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연구 중심의 새로운 추모사업 전개할 터”

 

앞서 밝혔듯이 원택 스님은 오래 전부터 성철 스님을 시봉해왔다. 세간에서 말하듯이 성철 스님 생전 20년과 열반 후 20년 등 40년간 스승을 모셔온 셈이다. 

“제가 백련암에서 했던 시봉은 사실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 사형(師兄)과 사제(師弟)스님들이 함께 큰스님을 모셨으니까요.” 

 

그렇다면 원택 스님은 언제부터를 ‘성철 스님 시봉’이라고 생각할까?

“1980년 가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큰스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원고 한 뭉치를 주셨습니다. 『선문정로』의 초고였어요. 큰스님께서는 저에게 원고를 들고 순천 송광사 불일암에 가 법정 스님에게 윤문을 부탁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에도 법정 스님의 글이 최고였으니까요. 말씀에 따라 저는 바랑에 원고를 담아 불일암으로 갔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봉을 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 일이 계기가 돼 1981년 10월 『선문정로』를 발간하고 1982년 12월에 『본지풍광』을 낸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시봉의 시초였다는 것이다. 이후 성철 스님 법어집 11권과 <선림고경총서> 37권을 발간했다. 이어 1998년 성철 스님 열반 5주기에 맞춰 사리탑 불사를 마무리하고 불필 스님과 함께 2001년 3월 겁외사를 창건한 뒤 곧바로 <중앙일보>에 성철 스님 시봉이야기인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7개월간 연재했다.  

 

원택 스님은 특히 <선림고경총서> 발간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라고 회고했다.

“1980년대 후반 『선문정로』를 좀 더 쉽게 평석(評釋)할 수 있는 학자를 찾다가 우연히 동국대의 모 교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해 가을에 동국대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그 교수님이 『선문정로』에 대한 발표를 했어요. 저도 그 자리에 함께 했는데 그 교수님께서 발표를 하고 나니 질문공세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정작 발표 내용에 대한 질문은 없고 큰스님에 대한 비판만 계속됐습니다. 그 교수님은 쟁쟁한 선배 불교학자들의 질문에 아주 쩔쩔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는 큰 충격을 받았어요. 큰스님께서 돈오돈수를 평생 설파해 오셨지만 아직도 해인사 일주문 밖을 나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세미나가 끝나고 백련암으로 돌아와서 큰스님께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 말씀을 묵묵히 듣고 계시던 큰스님께서 제 뺨을 때리시며 큰소리로 ‘니 지금 인재 양성이라켔나? 이놈아, 나는 평생 무슨 할 일 없어 인재양성이 뭔지 모르고 살았나? 이놈아! 키울 사람이 없는 걸 어쩌란 말이냐?’ 하시며 못내 아쉬운 듯 했습니다. 

 

며칠이 지난 뒤 다시 큰스님을 찾아뵙고 ‘사람 키우기는 큰스님 말씀과 같이 욕심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때를 기다리기로 하시고, 그러면 역대 조사스님들의 어록 중에서 돈오돈수와 맥락을 같이하는 책을 번역하면 큰스님의 울타리가 되지 않겠습니까?’하고 말씀드리니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은 방법이겠네’라고 하시면서 곧 책 목록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말씀이 없으셔서 제가 30권 정도의 목록을 작성해 큰스님께 드렸습니다. 한 일주일 쯤 뒤에 저를 부르시더니 몇 권은 빼고 몇 권은 추가해 주시며 ‘이 책들을 잘 번역해 보라’고 당부하시는데 그것이 <선림고경총서> 37권의 탄생 배경이 되었습니다. 1993년 10월에 <선림고경총서>를 완간했는데 한 달 뒤에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셔서 아쉬움이 컸습니다.”  

 

원택 스님은 “큰스님께서 일일이 감수를 해주시지는 못했지만 돈오돈수 사상의 핵심이 되는 어록들을 번역해 책으로 낼 수 있었던 것을 그나마 큰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전하기도 했다.  

 

원택 스님은 그간의 일들을 뒤로하고 또 다른 ‘시봉’을 준비하고 있다. 먼저 2015년 완공을 목표로 산청 겁외사에 ‘성철 스님 추모관’ 불사를 진행하고 있다. 추모관에서는 불자들이 직접 실참(實參)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구성할 예정이다. 또 성철 스님의 가르침과 선(禪)의 골수를 전하기 위해 2013년 5월부터 월간 잡지 「고경」을 발행하고 있다.  

 

“선(禪)에 대한 큰스님의 애정은 지극했습니다. 또 그 누구보다 선의 대중화를 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일반인들이 큰스님의 법어집을 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2014년 상반기 중으로 『백일법문』 증보판을 발간합니다. ‘백일법문’ 당시 누락된 부분을 좀 더 보완하고 또 주석을 붙여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선문정로』의 주석서를 출간하는 것도 큰스님께서 내리신 큰 숙제입니다. 

 

그동안의 선양사업이 굵직굵직한 행사 중심이었다면 앞으로는 돈오돈수를 널리 확산시킬 수 있는 출판과 연구사업에 매진할 계획입니다. 큰스님과 인연 있는 불자들과 불교에 관심 있는 국민들을 추모회원으로 모셔 현재 있는 성철선사상연구원을 확대 개편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큰스님의 사상을 연구할 수 있는 학자들을 양성하는 것이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못다한 선서(禪書) 번역을 계속할 예정입니다. 일반인들이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요. 신도님들도 선에 대한 관심을 높여야 할 것입니다.”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 선양사업과 관련한 생각들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있다. 스님이 ‘시봉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것도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스승을 모셨기 때문일 것이다. 2014년부터 전개될 원택 스님의 시봉 ‘시즌2’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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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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