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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도  /  2019 년 9 월 [통권 제7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37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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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도 | 자유기고가

 

어느 날 위산·오봉·운암, 셋이 백장 화상을 모시고 서 있었다. 백장 화상이 위산에게 물었다. “목과 입을 제거한 채(쓰지 않고) 도를 말할 수 있겠느냐?” 위산은 “스님께서 먼저 말씀해 주시지요.”하고 받았다. 그러자 백장 화상이 “내가 말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법이 쇠衰할까 두렵다.”고 말했다.
擧潙山五峰雲巖, 同侍立百丈. 百丈問潙山, 倂卻咽喉脣吻, 作麽生道. 潙山云: “卻請和尙道.” 丈云: “我不辭向汝道, 恐已後喪我兒孫.” 『벽암록』 제70칙

 

말은 입으로 나오지만 입이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입은 단지 말을 토해내는 경로經路에 불과하다. 진정성이 있는 말이어야 사람들은 그의 말을 신뢰한다. 비슷한 예로 훌륭한 가수들은 배로 노래할 것을 주문한다. 비록 입으로 노래를 부르지만 배에서 나오는 소리라야 깊은 울림이 있다는 것이다. 노래를 입으로 소화하는 립싱크 가수들은 그래서 외면당한다. 사람들은 저 깊은 울림을 토해내는 뱃속의 노래를 듣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심금心琴을 울리는 말도 마찬가지다. ‘립 서비스’는 당장의 위로와 칭찬이 될 수는 있어도 영원히 가지는 못한다. 내 가슴을 먼저 울리고 나오는 말이라야 진정성이 있다. 이러한 말이 상대방을 감동시키고 나를 신뢰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가슴으로 말하는 방법은 다름 아닌 ‘듣기’에 있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 가슴으로 말할 수 있는 법을 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말을 잘 하는 사람보다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왜 그럴까? 정서적인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끼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면 슬픔이 위로가 되고 분노감이 해소된다. 나의 말을 경청해주는 그 누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기 존재에 대해서도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듣기와 관련해 꼭 주의해야 할 대목이 있다. 가슴이 아닌 입으로 하는 말 가운데 나에게 듣기 좋은 말은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채근담菜根譚』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자신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고, 마음에 항상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사람마다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게 되므로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높여주는 구실을 한다. 그러나 만일 들리는 말마다 항상 자신을 기쁘게 하고, 하는 일마다 마음을 상쾌하게 해준다면 이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해롭게 만든다. 이의 이해를 돕는 우화寓話도 전해주고 있다. 어느 날 여우가 길을 가다가 까마귀가 고깃덩이를 입에 물고 날아가는 것을 발견했다.

 

잔꾀의 대가 여우는 까마귀가 물고 있는 고깃덩이가 탐났다. 여우는 재빨리 까마귀가 있는 길 옆 나무로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까마귀님의 그 까만 외투는 정말 아름다워요.” 여우는 아첨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까마귀님의 까만 외투도 아름답지만 노랫소리는 더욱 아름다워요. 난 언제나 까마귀님의 노랫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몹시 즐거워진답니다.” 까마귀는 계속 치근대는 여우가 밉기도 했지만 노래를 잘한다는 칭찬에 잠시 우쭐함이 앞섰다. 노래를 들려달라는 여우의 재촉에 우쭐해진 까마귀는 입을 크게 벌려 노래를 시작했다. 그 순간 입에 물려있던 고깃덩어리가 땅으로 떨어졌다. 여우는 고깃덩어리를 주워 물고는 곧장 쏜살같이 달아났다.

 

현명한 사람은 입으로만 대화 안해

 

말 한마디에 금방 히죽 웃고 화내고 우쭐댄다면 까마귀와 다를 바 없다. 현명한 사람들은 그래서 입으로 대화하지 않는다. 따뜻한 가슴으로 교유交遊하고 대화한다. 가슴으로 나누는 대화는 이간질이나 아첨이나 유혹 따위가 통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상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게 되는 경지에까지 이른다. 부처님과 아난 존자의 관계가 이른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이러한 경지다. 사랑으로 사는 부부는 그래서 입이 아니라 가슴으로 대화를 나눈다. 눈빛만 봐도 상대의 진의眞意가 어디에 있는지 진정한 우정은 알고 있다. 때문에 이들에게 말꼬리 잡기란 없다. 가슴으로 말하는 법, 그리하여 사람을 얻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진정성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선사는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의 으뜸가는 제자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는 제자였다. 선사의 성은 왕씨王氏며, 15세에 출가하여 삼장三藏을 두루 익혀 통달하였다고 전해진다.


중국선종사에서 백장선사가 특별한 인물로 기록되는 이유는 선종사원의 독립과 선원청규禪院淸規의 제정에 있다. 이전에는 선승이 따로 절을 갖지 않고 율종律宗 절에 의지하여 별실別室을 세우고 거처해 왔었다. 백장선사는 이로부터 선찰을 독립시켜 새로이 제정한 선원청규에 따라 선림禪林을 운영했으니 그의 명성이 더욱 드높았다. 중국에서 선종의 기틀이 확립된 시기를 백장선사에 두는 것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이 공안에 등장하고 있는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63)는 백장선사의 제자다. 중국선을 육조혜능이 창출하였다고 한다면 이를 완성한 사람이 백장이고 또 이를 최초로 실천한 사람이 위산과 위산의 제자 앙산혜적(仰山慧寂, 803-887)이라 할 수 있다. 오가칠종五家七宗의 하나인 위앙종潙仰宗은 위산과 앙산의 앞 자를 각각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즉 위산과 앙산이 위앙종의 개산조開山祖인 것이다.

 

백장선사는 대중을 제접提接할 때 항상 간곡함이 배어 있었다. 때로는 그래서 친절했으며 때로는 근엄했다. 이러한 선사의 태도는 제자들에게 진정성으로 다가섰다.

 

위산이 오도悟道를 하는 장면을 살펴보면 선사의 가르침이 얼마나 간곡하고 진정성이 있었는지를 느끼게 한다. 어느 날 백장이 위산에게 화로火爐에 불씨가 남아있는지 확인하도록 했다. 위산은 화로를 열심히 헤쳐 본 후 ‘불씨가 없다.’고 말했다. 백장이 직접 화로를 뒤적거려 재 속 깊숙이 희미하나마 살아있는 불씨를 발견했다. “이게 불씨가 아니고 무엇인고?” 백장이 크게 호통을 치자 위산이 순간 크게 깨우쳤다. 위산이 깨친 소견을 낱낱이 백장에게 아뢰자 백장이 엄숙하게 일렀다.

 

“너의 소견은 잠시의 기로일 뿐, 경에 이르기를 ‘불성을 보려 하거든 마땅히 시절인연을 관하라’했다. 시절이 이르면 미혹했던 이가 문든 깨달은 것과 같고, 한번 잊은 것을 영영 기억함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는 원래 자기 물건이지 다른 이에게서 얻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니라. 그러므로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깨달음은 깨닫지 못함과 같나니 본래 마음도 없고 법도 없음이라’하셨다. 이렇듯 허망한 범성凡聖 등의 마음이 없는 본래심법本來心法이 원래 스스로 갖추어 구족해 있는 것이니, 이제 네가 그러한 터이니 스스로 잘 호지護持하거라.”

 

백장은 제자 위산의 깨침을 이렇게 인가함과 아울러 더 큰 깨침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했다. 그리곤 훗날 명산으로 일컬어지던 대위산大潙山에 산문을 열도록 위산을 추천했다. 위산은 얼마가지 않아 명성을 듣고 찾아 온 납자들로 대총림을 이루었다.

 

유창한 말이 신뢰를 주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 소개한 공안은 이러한 두 선사의 문답이다. 백장이 “목과 입을 쓰지 않고 도를 말할 수 있느냐?”고 묻는데 대해 위산이 거꾸로 스승이 답해보라고 말한다. 이에 백장이 “내가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법이 쇠할까 두렵다”고 응대한다. 원문에 따르면 ‘공이후상아아손恐已後喪我兒孫’으로 ‘나의 법손을 잃을까 두렵다’는 것이다. 즉 법이 쇠한다, 또는 단절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백장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앞서 위산의 깨침에 대응했던 것처럼 백장은 입으로 도를 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목과 입이 없이 도를 말할 수 있는 경지는 언어도단言語道斷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지다. 이것이 선의 경지다. 선의 경지는 구경究竟마저 뛰어넘는다. 백장은 따라서 입과 목으로 말하는 언어 대신에 실참실수實參實修의 경지에서 진리를 습득하도록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그릇되지 않고 오롯이 진리를 전수할 수 있다.


세속사회도 마찬가지다. 입으로만 내뱉는 말은 진정성을 갖지 못한다. 다시 말하지만 현명한 사람들은 입으로 대화하지 않는다. 가슴으로 교유하고 가슴으로 소통한다. 우리는 말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가슴을 움직이는 말을 접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입으로 말하기보다 가슴으로 우러나오는 진실한 말이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하나의 입과 두 개의 귀가 달린 것은 말하기보다 듣는 것을 중시하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이는 진정성과 연관된다. 진정성이 있는 대화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물론 말 잘하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경우도 많다. 멋진 말솜씨로 대중을 압도하고 상대방을 설득한다. 그러나 유창한 말이 신뢰와 연결되진 않는다. 말은 비록 어눌할지라도 그의 말과 태도에서 진정성이 느껴지면 신뢰가 가기 마련이다. 우리가 가슴으로 대화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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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도
선시 읽는 법을 소개한 『마음의 밭에 달빛을 채우다』를 펴내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오도송에 나타난 네 가지 특징」·「호국불교의 반성적 고찰」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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