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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선문정로 ]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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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검(조병활)  /  2021 년 5 월 [통권 제97호]  /     /  작성일21-05-04 13:47  /   조회7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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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선문정로』 12 | 상적상조常寂常照


[원문] 성철 스님 [옮김]  활인검

 

편집자 | 【번호】·【평석】·【강설】은 성철 스님이 직접 쓰고 말씀하신 것이다. 【12-1】은 제12장 제1절이라는 의미다. * 표시가 붙은 것은 보다 쉽게 풀이한 것이다.

 

【12-1】 ①무상無上한 대열반이여, 원융명철圓融明徹하여 항상 적조하는 도다. ①無上大涅槃이여 圓明常寂照로다. (①『壇經』, 『大正藏』 48, p.357a) 

* ①위없고 ‘크나큰 완전한 평화[大涅槃]’여, 모든 것을 원만하게 포섭해 밝게 빛나고 항상 고요하게 관조觀照하는 도다.

 

【평석】 견성 즉 대열반임은 『대열반경』과 『종경록』 등에서 상설詳說되어있다. 확철대오하여 돈견자성頓見自性하면, 내외명철하여 상적상조하는 구경무념의 대열반을 원성圓成한다. 미세뢰야를 투탈透脫하여 말후末後 뇌관牢關을 타파하면 구경무심인 무상열반無上涅槃이 현전하여, 대사대활大死大活하고 상적상조하여 명암이 쌍쌍雙雙이요 정혜定慧가 등등等等하니 즉 견성이며 성불이다. 

 

*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 바로 ‘크고 완전한 평화[大涅槃]’임은 『대반열반경』과 『종경록』 등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분명하게 깨달아 일시에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면 안팎이 환히 밝고, 항상 고요하고 항상 관조하는, 그릇된 생각 없는 궁극의 마음인 크나큰 완전한 평화를 원만하게 성취한다. 아뢰야식을 끝까지 털어내고 ‘최후의 관문[牢關]’마저 타파하면 그릇된 생각 없는 궁극의 마음인 위없는 완전한 평화가 나타나고, 크게 죽었다 크게 살아나며, 항상 고요하고 항상 관조해 밝음과 어둠이 동시에 있고, 지혜와 선정이 균등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자 깨침이다.  

 

【강설】 적조寂照에서 적寂은 짙은 구름 같은 일체 망상이 다 끊어진 모습이다. 그럼 일체 망법妄法과 망상이 소멸하면 아무 것도 없는 단공斷空인가? 아니다. 구름이 걷히면 늘 밝게 떠 있던 해의 광명이 환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 광명이 온 시방세계를 환히 비추니 그런 대 지혜를 조照라 한다.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법당의 이름이 대적광전大寂光殿이다. 적광이나 적조나 구경각을 성취한 부처님의 대열반경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성불한 부처님의 경계는 일체망념이 적멸하므로 적寂이라 하고, 대지혜의 광명이 걸림 없이 비추므로 광光이라고 한다. 이런 적광적조寂光寂照가 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견성이 아니다.

 

【12-2】 ①미세무명을 진파進破하고 묘각위에 득입得入하면 대열반이라 이름 하나니 상적광토常寂光土에 거주하느니라. ①進破微細無明하고 入妙覺位하면 名大涅槃이니 居常寂光土하느니라. (①『天台四敎義』 圓敎, 『大正藏』 46, p.780a) 

* ①미세한 무명을 타파하고 묘각妙覺의 지위에 들어간 것을 ‘크고 완전한 평화[大涅槃]’라 부른다. 항상 고요하고 빛나는 대지에 거주하게 된다. 

 

【평석】 상적광常寂光은 상적조常寂照이다. 『기신론』에서 “원리미세遠離微細하면 득견심성得見心性이니 명구경각名究竟覺”이라 하였으니, 견성 즉 구경각이 상적조常寂照인 대열반이며 묘각이다. 

* 항상 고요하게 빛나는 것은 항상 고요하게 관조하는 것이다. 『기신론』에 “미세한 무명을 완전히 떨쳐낸 것이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며 이를 ‘궁극의 깨달음[究竟覺]’이라 한다.”고 나온다.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 바로 ‘궁극의 깨달음’이며 ‘크고 완전한 평화’이자 묘각이다.   

 

【12-3】 ①장개障盖를 적멸寂滅하지 않음이 없고 사리事理를 통조洞照하지 않음이 없어서 적寂과 조照가 쌍류雙流하면 심성心性을 철견徹見하느니라. ①障無不寂하고 理無不照하야 寂照雙流하면 徹見心性이니라. (①『淸涼鈔』57, 『大正藏』 36, p.449c) 

* ①번뇌를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음이 없고 이치와 현실을 명백하게 파악하지 않음이 없어 고요함과 비춤이 함께 흐르는 것이 참다운 본성을 철저하게 체득한 것이다. 

 

【평석】 상적상조하여 적조가 쌍류雙流하면 견성인 대열반이다.

 

【강설】 적과 조는 함께 흐르는 법이니 구름이 걷혔다는 말은 곧 햇빛이 비친다는 얘기고, 햇빛이 비친다는 말은 곧 구름이 걷혔다는 말이다. 따라서 일체 망상이 다 소멸했다는 말은 지혜 광명이 드러났다는 뜻이고 대지혜가 드러났다는 말은 일체 망념이 다 끊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니 적과 조가 같이 흘러 항상 적정하면서 항상 비추고 항상 비추면서 항상 적정한 것이다. 그래서 육조스님께서도 “무상대열반이여, 원명상적조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 고요하기만 하고 비추지 못한다면 그것은 돌멩이나 나무토막과 같고, 비추기만 하고 고요하지 못하다면 들뜬 상념에 지나지 않는다. 항상 고요하면서 항상 비추지 못한다면 견성이 아니고 대열반이 아니다. 이는 선종뿐만 아니라 교가에서도 한 결 같이 하는 말이다.

 


이경미 작

 

【12-4】 ①선적禪寂은 지조智照가 아니면 그 적정寂定을 궁극窮極할 수 없으며, 지조智照는 선적禪寂이 아니면 그 혜조慧照를 심달深達할 수 없으니, 선적과 지조가 쌍류雙流하면 불과佛果를 성취하느니라. 경에 말하되, 불타는 대승에 자주自住하나니 그 소득所得한 대법大法은 정혜의 공력功力으로 장엄하여 이로써 중생을 제도하느니라. ①禪非智면 無以窮其寂이요 智非禪이면 無以深其照니 故로 寂智雙流하면 方成佛果니라 經에 云 佛自住大乘하나니 如其所得法은 定慧力으로 莊嚴하야 以此度衆生이니라. (①『大華嚴經略策』 止觀雙運, 『大正藏』 36, p.707a) 

 

* ①선정의 고요함은 지혜로 관조하지 않으면 그 고요한 선정의 궁극적인 경지에 다다를 수 없고, 지혜로 관조함은 선정의 고요함이 아니면 깊고 깊은 관조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선정의 고요함과 지혜로 관조함이 함께 이뤄져야 비로소 부처님의 경지, 즉 깨달음을 성취한다. 경전에는 ‘부처님은 스스로 대승에 머무시며 증득한 가르침처럼 선정과 지혜의 힘으로 장엄하여 중생들을 제도 하신다.’고 나온다.   

 

【평석】 적지寂智는 적조寂照다. 적조寂照는 즉 정혜定慧며 지관止觀이니, 적조쌍류寂照雙流하고 정혜균등定慧均等하며 지관止觀이 쌍운雙運하면 오심견성悟心見性이며 구경불과究竟佛果이다. 

* 고요하게 관조하는 지혜가 곧 고요하게 사물의 본성을 비추는 지혜다. 고요하게 사물의 본성을 비추는 지혜는 바로 선정과 지혜가 결합된 것이자 집중[止]과 관찰[觀]이 융합된 것이다. 선정과 관조[비춤]가 함께 움직이고 선정과 지혜가 균등하며 집중과 관찰이 함께 운용되면 마음의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는데 이것이 부처님의 경지인 궁극적인 깨달음이다.  

 

【강설】 육조 스님이 무상대열반은 원명상적조圓明常寂照라 하시고, 또 묘각을 무상대열반이라 하시며, 또 상적조常寂照하면 견성이라 하였다. 따라서 상적조가 곧 묘각이고 대열반인 동시에 구경각이며 견성임을 알 수 있다. 

 

* 육조 스님은 ‘위없는 크고 완전한 평화[無上大涅槃]’를 모든 것을 원만하게 포섭해 항상 고요하게 비추는 것이라고 하셨다. 또 묘각을 ‘위없는 크고 완전한 평화’라 하시며 항상 고요하게 비추면[사물의 본성을 관찰하면]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라 하셨다. 따라서 ‘항상 고요하게 비추는 것[常寂照]’이 바로 묘각이고 동시에 ‘궁극의 깨달음[究竟覺]’이며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見性]’임을 알 수 있다.

 

【12-5】 ①생심生心하면 즉 망이요 생심生心치 않으면 즉 불인지라, 생심生心이라 함은 잡심雜心만 나는 것이 아니요 비록 보리열반과 관심견성觀心見性의 묘심妙心이 나도 또한 생심生心이니 전부 망상이 되느니라. 잡념망상이 영영 적멸하여야 바야흐로 불생不生이라 이름하며 적조寂照가 현전하나니, 어찌 불佛이라고 이름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달마비達磨碑에서 말하였다. 심념心念이 있으면 영겁토록 범부에 체류滯留하고 심념心念이 없으면 찰나에 정각을 성취하는 도다. ①生心卽妄이요 不生卽佛이라 言生心者는 非但生於餘心이요 縱生菩提涅槃과 觀心見性하야도 亦曰生心이니 並爲妄想이라 念想이 都寂하면 方曰不生하야 寂照現前이어니 豈不名佛가 故로 達磨碑에 云 心有也하면 曠劫而滯凡夫요 心無也하면 刹那而登正覺이로다. (①『淸涼鈔』 9, 『大正藏』 36, p.68a) 

 

* ①인위적으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삿된 것이며 작위적인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경지이다. 인위적으로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나머지 마음, 즉 잡심이 일어나는 것 뿐 아니라 설사 깨달음과 ‘완전한 평화[涅槃]’가 생기고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는 것도 포함해 하는 말이며, 이런 마음은 삿된 생각일 뿐이다. ‘잡된 마음[念]’과 ‘그릇된 생각[想]’이 모두 소멸되면 비로소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이것은 고요함과 비춤이 나타난 것으로 이를 어찌 부처님의 경지라 부르지 않겠는가! 그래서 달마 대사의 비에 ‘마음이 있으면 영원히 범부에 머무르고, 마음이 없으면 곧바로 올바른 깨침에 오른다.’고 적혀 있다.    

 

【평석】 유심有心은 중생이요 무심은 불佛이다. 무생무념無生無念의 대적삼매大寂三昧에서 무한 혜광慧光이 항상 발현하니 이것이 적조寂照즉 불지佛地이다. 

* 마음이 생기는 것이 곧 중생이요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경지이다. 그릇된 생각과 잡념 없는 ‘고요하고 크나큰 집중[大寂三昧]’에서 무한한 지혜의 빛이 항상 나오니 이것이 고요한 비춤, 즉 부처님의 경지이다.

 

【강설】 왜 10지·등각도 성불하지 못했다고 말하는가? 아뢰야식의 미세망념이 일어나는 까닭이다. 잡념만 망념이 아니다. ‘보리’, ‘열반’, ‘견성했다’, ‘성불했다’는 생각이 조금만 일어나도 참다운 성불이 아니다. 그래서 10지·등각마저 중생이라 일컫는 것이다. 미세망념을 포함한 일체망념이 다 끊어진 대적삼매에 들어 무한한 지혜광명이 온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는 이것이 견성이고 성불이다.

 

【12-6】 ①공空과 유有를 쌍조雙照하며 내와 외에 주유住留하지 않으니, 공곡空谷이 성음聲音을 대답함과 같아서 심려心慮가 영절永絶하고 명경明鏡이 색상色像을 관조하는 것과 같아 묘담妙湛하고 원명圓明하여 적적寂寂하며 항상 조요照耀하는 도다. ①雙照有空하며 不住內外하니 似谷答聲而絶慮하고 如鏡鑑像而無心하야 妙湛圓明하야 寂而常照로다. (①『宗鏡錄』 65, 『大正藏』 48, p.780a) 

* ①‘텅 빔[空]’과 ‘있음[有]’을 함께 관조하고 안과 밖에 집착하거나 머무르지 않고, 빈 계곡에 울리는 메아리처럼 그릇된 생각이 끊어지고 마치 거울이 물건을 비추듯 잡된 마음이 없어야, 오묘하게 잔잔하고 원만하게 밝아 고요하면서도 항상 비춘다. 

 

【평석】 절려무심絶慮無心하여 원명적조하니 정혜등지定慧等持이다. 

* 그릇되고 삿된 생각이 끊어져 잡념이 없고 원만하게 밝아 고요하면서도 비추니 선정과 지혜가 균등하게 유지된다.

 

【12-7】 ①적寂과 조照가 둘이 없음이 보리의 실상이 되나니 명경과 같아서 무심이 체體가 되며 감조鑑照가 용用이 되어 합하여 그 실상이 되는지라, 또한 선종에서 체體에 즉卽한 용用이 자지自知하며 용用에 즉卽한 체體가 항적恒寂하여 지智와 적寂이 둘이 아님이 진여의 실상이 됨과 같으니라. ①寂照無二가 爲菩提相이니 猶如明鏡하야 無心이 爲體요 鑑照가 爲用하야 合爲其相이라 亦卽禪宗의 卽體之用이 自知하며 卽用之體가 恒寂하야 智寂不二가 爲心相也니라. (①『淸涼鈔』 80 (大正藏36, p.625b) 

 

* ①선정[寂]과 지혜의 작용[照]이 둘이 아니고 함께 깨달음의 모습이 되니 이는 마치 잡된 마음 없는 밝은 거울이 본체가 되고 비춤이 작용이 되어 본체와 작용이 합쳐져 (사물의) 모습이 거울에 비치는 것과 같다. 선종에서는 ‘본체를 체득한 작용[即體之用]’이 스스로 알고 ‘작용을 체득한 본체[即用之體]’는 항상 고요해 지혜와 선정이 둘 아닌 채 마음의 모습을 이룬다.   

 

【평석】 적정무심寂靜無心한 경체鏡體와 조요무애照耀無碍한 경광鏡光이 어찌 둘이리오. 경체鏡體가 즉 경광鏡光이니 적즉조寂卽照며 조즉체照卽體라 진여자성도 이러하다. 

* 텅 비고 고요한 잡념 없는 마음 같은 거울의 본체와 두루 비추어 걸림이 없는 거울의 빛이 어찌 둘이겠는가! 거울의 본체가 바로 거울의 빛이니, 고요함이 바로 비춤이며 비춤이 곧 고요함 자체이다. 참다운 본성도 이와 같다. 

 

【12-8】 ①적寂에 즉卽한 조照가 반야요 조照에 즉卽한 적寂이 해탈이며 적조寂照의 체體가 법신인지라, 일개의 명정明淨한 원주圓珠와 같아서 명明은 즉 반야며 정淨은 즉 해탈이요 원체圓體는 법신이니 용用은 부동不同하나 체體)는 상리相離하지 않느니라. 이 3법三法이 종縱도 아니요 횡橫도 아니며 병並도 아니요 별別도 아니니 비밀장秘密藏이라 이름 하여 대열반이 되느니라. ①卽寂之照는 爲般若요 卽照之寂은 爲解脫이며 寂照之體는 爲法身이라 如一明淨圓珠하야 明卽般若요 淨卽解脫이며 圓體法身이니 約用不同이나 體不相離故니라 此三法이 不縱不橫하며 不並不別하니 名秘密藏하야 大涅槃이니라. (①『淸涼疏』 50, 『大正藏』 35, p.884b)

 

* ①고요함[선정]을 체득한 비춤[지혜]은 반야가 되고, 비춤을 체득한 고요함은 해탈이 되며, 고요함과 비춤의 본체는 바로 진리의 몸이 된다. 마치 하나의 밝고 깨끗한 둥근 구슬에서 밝음은 반야이고 깨끗함은 해탈이며 둥근 본체는 진리의 몸인 것과 같다. 작용의 견지에서 보면 같지 않으나 본체는 서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해탈=고요함, 반야=비춤, 법신=본체]는 세로로 있는 것도 가로로 있는 것도 아니고 나란한 것도 별개의 것도 아니다. 그래서 ‘비밀스런 창고[秘密藏]’라 부르며 바로 ‘크고 완전한 평화[大涅槃]’를 말한다.

 

【평석】 이 대열반의 3덕三德은 자성 중에 원구圓具하니 이를 실증實證하면 견성이며 성불이다. 

* 법신[본체], 반야[비춤], 해탈[고요함]은 자기의 본성 가운데 원만하게 갖춰져 있는데 이를 참답게 증득하는 것[實證]이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는 것[見性]이며 깨달음이다.

 

【12-9】 ①일一은 견성하면 성불이니 진여법신을 자개自開하면 진성眞性이 현전하고, 차次는 무득無得하면 성불이니 진성반야眞性般若를 자개自開하면 불법은 소각所覺이며 보리는 능각能覺 인지라 능能과 소所가 상인相因한 고로 능소를 구부득俱不得이다. 소득所得이 절무絶無한 자는 무상보리를 즉득則得하며, 후後는 이망離妄하면 성불이니 본성해탈本性解脫을 자개自開하면 여여부동如如不動하며 탕탕무주蕩蕩無住하여 망상전도妄想顚倒가 단적斷寂하므로 진정한 해탈이라 이름 하느니라. ①一은 見性成佛이니 自開法身하면 稱性이 應現이요 次偈는 無得成佛이니 自開般若하면 佛法은 所覺이요 菩提는 能覺이라 能所相因故로 俱叵得이니 無所得者는 則得菩提며 後偈는 離妄成佛이니 自開解脫하면 不動無住하야 妄倒斯寂일새 名眞解脫이니라. (①『淸涼疏』 25, 『大正藏』 35, p.694a)

 

* ①첫째는 참다운 본성을 체득함, 즉 깨달음이니 스스로 진리의 몸을 열면 본성에 맞게 나타난다. 둘째는 얻음 없는 깨달음이니 스스로 지혜를 열면 깨달음은 대상[所覺]이 되고 깨침 자체는 주체[能覺]가 된다. 주체와 대상은 서로 원인이 되므로 얻을 수 없다[있을 수 없다]. 얻을 것이 완전히 없는 사람은 ‘깨침[菩提]’을 곧바로 증득한다. 셋째는 삿됨을 벗어남이 깨달음이니 스스로 해탈하면 움직이지 않고 머무르지 않으며, 그릇된 생각이 단절되므로 참다운 해탈이라 부른다. 

 

【평석】 법신과 반야와 해탈은 과상果上 3덕이니 동체이용同體異用이다. 견성하면 무득無得이요 이망離妄하면 견성이니, 3자가 표현은 각이各異하나 내용은 동일하여 불과佛果를 성취한다. 그러므로 견성하면 성불하여 여래의 3덕이 원만구족하여 전도망상을 영리永離하여 구경무소득究竟無所得의 대각해大覺海에 돈입頓入한다. 그리하여 적이상조寂而常照하고 조이상적照而常寂하여 상적상조常寂常照하는 적광정토寂光淨土에 상주하나니 이것이 제불의 무소주無所住의 주처住處이다. 

 

* 법신과 반야와 해탈은 과보를 증득證得하면 나타나는 세 가지 덕성이니 같은 본체에 작용이 다를 뿐이다.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면 ‘얻음 없음[無得]’이요 ‘삿됨을 벗어남[離妄]’이 바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니, 세 가지가 표현은 서로 다르나 내용은 같아 깨달음을 성취한다. 그러므로 참다운 본성을 체득하면 깨달아 부처님의 세 가징 덕성이 원만하게 갖춰져 (마음에) 그릇된 생각이 영원히 사라지고 ‘결국에는 얻을 것 없는[究竟無所得]’ 크나큰 깨침의 바다에 몰록 들어간다. 그리하여 ‘고요하나 항상 비추고[寂而常照]’ ‘비추나 항상 고요해[照而常寂]’져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추는[常寂常照]’ 깨끗한 마음의 경지에 머문다. 이 경지에 모든 부처님이 머무는데, 이는 머무는 바 없이 머무는 것이다.  

 

【12-10】 ①사마타奢摩他인 고로 비록 적멸하나 항상 관조하고, 비파사나毘婆舍那인 고로 비록 관조하나 항상 적멸하며, 우필차優畢叉인 고로 조照도 아니요 적寂도 아니니라. 조照하되 항상 적寂한 고로 속俗을 설하나 곧 진眞이요, 적寂하되 항상 조照하는 고로 진眞을 설하나 곧 속俗이며, 적寂도 아니요 조照도 아닌 고로 비야毘耶에서 두구杜口하였느니라. ①以奢摩他(止・定)故로 雖寂而常照하고 以毘婆那(觀・慧)故로 雖照而常寂이요 以優畢叉(捨・平等)故로 非照而非寂이라 照而常寂故로 說俗而卽眞이요 寂而常照故로 說眞而卽俗이요 非寂非照故로 杜口於毘耶니라. (①『永嘉集』, 『大正藏』 48, p.391b) 

 


금창초: 부산 고심정사 석문숙 불자 제공. 부산 승학산에서 촬영.

 

* ①마음을 한 곳에 집중했기에 비록 텅 비고 고요하나 항상 살피고, 관찰하므로 비록 살펴도 항상 고요[집중]하며, 평등하게 버렸으므로 비춤도 아니고 집중도 아니다. 비추되 항상 고요[집중]하므로 속제를 말하나 바로 진제이며, 고요하나 항상 비추므로 진제를 말해도 속제에 어긋나지 않는다. 고요함도 아니고 비춤도 아니므로 (유마 거사는) 바이샬리에서 입을 닫았느니라.  

 

【평석】 적조동시寂照同時요 적조불립寂照不立하니 대원경大圓鏡 중의 무상열반無上涅槃이요, 상사상활常死常活하고 불사불활不死不活하니 소림문하少林門下의 벽안납승碧眼衲僧이다. 

* 고요함과 비춤이 동시에 이뤄지나 고요함과 비춤이 동시에 성립되지 않으므로 크고 둥근 거울 같은 지혜 속의 위없는 완전한 평화요, 항상 죽고 항상 살며 또 죽지 않고 살지 않으므로 선문의 눈 푸른 수행자이다.  

 

【강설】 “적과 조가 동시이다.”라고 말했지만 저 밖의 돌덩어리처럼 적멸과 관조가 따로 따로 있으면서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적과 조가 동시이면 적과 조는 따로 따로 성립할 수가 없다. ‘고요하다’, ‘비춘다.’는 것마저 다 버려 적과 조가 성립할 수 없는 그곳에서 동시인 것이지, 적멸과 관조가 실재한다면 절대 동시가 될 수 없다. 어둠과 밝음이 실제 존재한다면 어떻게 동시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를 말로 표현하고 설명하자면 복잡하지만 실제로 깨치면 너무도 명확한 것이다. 참으로 죽는 길은 참으로 사는 데 있고 참으로 사는 길은 참으로 죽는 데 있다. 삶과 죽음이 따로 있다고 여기는 것, 그것이 분별망상이다.

 

【12-11】 ①상적常寂하여 상조常照하니 오매가 일치하고 생사가 일여하도다. ①寂而常照하니 寤寐一致요 生死一如로다. (①『勅修淸規』 5 坐禪儀, 『大正藏』 48, p.1143a) 

* ①항상 집중하고 항상 비추며, 자나 깨나 일치하고, 삶과 죽음에서 한결 같다. 

 

【평석】 대적광大寂光 중의 오매일여는 여래무심이다. 

* ‘고요하게 비추는 큰 빛[大寂光]’ 속의 오매일여는 부처님의 마음의 경지이다.

 

【강설】 여기서 거론한 오매일여는 8지 보살의 오매일여가 아니라 구경각인 진여자성에서의 오매일여를 말한다. 참다운 구경의 오매일여, 생사에 자유자재한 참다운 대해탈을 얻으려면 항상 고요하면서 항상 비추는 상적조常寂照를 성취해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결코 생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상적상조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진정한 오매일여가 아니고 대열반이 아니며, 견성도 아니고 돈오도 아니다.

 

【12-12】 ①『영락경』에서 말씀하되, 등각 보살等覺菩薩은 조적照寂이요 묘각세존妙覺世尊은 적조寂照라 하였다. 즉금卽今 8지의 무생도 또한 조적照寂이니, 그런 고로 만약에 적조寂照를 증득하면 불타와 동일한 연고이니라. ①瓔珞에 云 等覺은 照寂이요 妙覺은 寂照라 하니 今八地無生도 亦照寂이니라 故로 若得寂照하면 卽同佛故니라. (①『華嚴鈔』 69, 『大正藏』 36, p.551b) 

* ①『영락경』에 “등각 보살은 고요함을 비추는 조적照寂이고, 부처님은 비춤을 고요하게 하는 적조寂照다.”고 나온다. 지금 제8지 보살의 무생도 역시 고요함을 비추는 조적照寂이다. 만약 적조寂照을 증득하면 부처님의 경지와 같게 된다.  

 

【평석】 8지는 가무생假無生이니 뇌야賴耶의 미세식광微細識光이 미멸未滅한 고로 무분별지가 존속하여 적조寂照가 못된다. 뇌야식광賴耶識光이 소멸하고 무분별지를 돈망頓忘하면 진무생眞無生인 대적광이 현전하여 상적상조常寂常照하니 이것이 묘각妙覺인 견성이다. 그리고 조적照寂은 유심유애有心有碍하여 적이상조寂而常照 조이상적照而常寂하지 못하나 적조寂照는 무심무애無心無碍하여 적이상조寂而常照 조이상적照而常寂 상적상조常寂常照 비적비조非寂非照하여 묘용자재妙用自在하니, 이것이 등각조적等覺照寂과 묘각적조妙覺寂照의 차이이다. 

 

* 제8지는 ‘임시적인 태어남이 없는[假無生]’ 상태다. 아뢰야식의 미세한 분별작용이 소멸되지 않았기에 무분별지가 남아 있어 적조寂照가 되지 못한다. 아뢰야식의 미세한 분별작용이 소멸되고 무분별지마저 완전히 잊어버리면 ‘참다운 태어남이 없는[眞無生]’ 크나큰 고요한 비춤이 나타나,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춘다. 이것이 묘각의 경지인 깨달음이다. 그리고 고요함을 비추는 조적照寂은 마음도 있고 장애도 있어, 고요하나 항상 비추고 비추나 항상 고요하지를 못한다. 적조寂照는 그릇된 마음도 없고 장애도 없어, 고요하나 항상 비추고 비추나 항상 고요하며,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추며, 고요하지 않고 비추지 않는 등 미묘한 작용이 자유롭다. 이것이 등각 보살의 조적과 묘각(부처님)의 적조의 차이이다.    

 

【강설】 조적照寂과 적조寂照의 차이, 등각과 묘각의 차이는 실제로 깊이 깨쳐야 그 경계를 알 수 있는 것이지 쉽게 그 차이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적도 알지 못하는데 적조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12-13】 ①등각의 지위에 있어서는 조적혜照寂慧라 이름 하나니 생멸동상生滅動相을 이탈하지 못한 연고요, 묘각의 불지佛地에 이르러서야 적조혜寂照慧라 이름 하나니, 벌써 진여인 제9식第九識에 귀복歸復하여 구경으로 적정寂靜한 연고이니라. ②앞의 등각 위는 아직 생멸이 있어서 심원心源을 궁진窮盡하지 못하였으므로 제8 아뢰야식에 체재滯在하여 있고, 이제 묘각에 도달하면 생멸망심을 영원히 이탈하여 궁극에 본각本覺인 일심一心의 근원에 귀복歸復한 고로 진여인 제9식 중의 원명청정경圓明淸淨境에 돈입頓入하느니라. ①在等覺位하야는 名照寂慧니 未離生滅動相故요 至妙覺位하야 名寂照慧니 已歸第九識하야 究竟靜故니라. ②前等覺位는 猶有生滅하야 未盡心源故로 在八識이요 今到妙覺하면 永離生滅하야 窮歸本覺一心之源故로 入第九識中明淨이니라. (①元曉, 『金剛三昧經論』 下, 『大正藏』 34, p.995a. ②元曉, 『金剛三昧經論』 下, 『大正藏』 34, p.994c) 

 

* ①등각 보살의 지위에서는 ‘고요함을 비추는 지혜[照寂慧]’라 하는데 이는 태어나고 소멸되고 움직이는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묘각의 경지에 이르면 ‘비춤을 고요하게 하는 지혜[寂照慧]’라 하는데 이는 이미 제9식에 돌아가 궁극의 고요함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②앞의 등각 단계에서는 오히려 태어남과 사라짐이 있어 마음의 근원을 다하지(이르지) 못했기에 제8 아뢰야식이 남아 있다. 이제 묘각 단계에 이르면 태어남과 사라짐에서 영원히 벗어나 ‘본래 깨달음인 한 마음의 근원[本覺一心之源]’에 완전히 돌아갔기에 제9식의 밝고 깨끗함에 몰록 들어간다.   

 

【평석】 조적照寂은 8식 생멸의 등각이요, 적조寂照는 일심진여의 묘각이니 원명상적조圓明常寂照하는 무상대열반은 견성달도인見性達道人의 실증처實證處이다. 진여본성은 제불과 중생이 평등무이平等無異하다. 다만 중생은 6・7식의 추중번뇌麤重煩惱와 제8식의 미세망상이 개복盖覆하여 본성을 부지불견不知不見할 뿐이다.

 

그러므로 근본무명인 제8 뢰야를 멸진하지 않으면 본성이 현현하지 않는다. 제8 미세유주를 영단永斷하여 무심무념의 대원경지가 발현하면, 이는 구경묘각인 무여열반이니 즉 견성이며 성불이다. 설사 6・7식의 추중망상麤重妄想을 멸진하여 일념불생의 가무심假無心인 숙면일여한 자재위에 진입하였어도, 이는 승묘경계勝妙境界며 사료불활死了不活하여 종문宗門의 정안이 아니다. 오직 전후제단前後際斷하여 정나라淨裸裸한 제8 마계第八魔界에서 활연대활豁然大活하여 미세유주인 근본무명을 멸진무여滅盡無餘하여 오매항일寤寐恒一하고 내외명철하며 무심무념하고 상적상조常寂常照하는 궁극심처窮極深處인 대열반을 친증親證하여야 영산적전靈山嫡傳이며 소림정인少林正印이다. 이 구경무심의 대휴헐大休歇 대안온지大安穩地에서 무위무작無爲無作하며 임운자재任運自在하는 대해탈경大解脫境이 오후悟後의 보임이며 이천履踐이다. 그리하여 견성은 돈수원증頓修圓證의 증오證悟임이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이 소소연昭昭然하다. 그러하니 참학고사參學高士는 이 불조정전佛祖正傳의 철칙에 위배되는 여하如何한 이설異說도 단연 배제하고 정전正傳을 표방하여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원만성취하여야 한다.

 

*고요함을 비추는 ‘조적照寂’은 제8 아뢰야식이 남아있어 태어남과 사라짐에 자유롭지 못한 등각이며, 비춤을 고요하게 하는 ‘적조寂照’는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묘각이니 ‘원만하게 밝고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추는 경지’이자 ‘완전한 평화[涅槃]’의 경지이다.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수행자가 실제로 증득한 경지이기도 하다. 참다운 본성은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똑 같이 갖고 있다. 다만 중생은 무거운 번뇌와 미세한 번뇌에 덮여 있어 참다운 본성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근본 무명인 제8 아뢰야식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면 참다운 본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제8 아뢰야식이라는 미세한 번뇌를 영원히 끊어 삿된 생각도 없고 그릇된 잡념도 없는 ‘크고 둥근 거울 같은 지혜[大圓鏡智]’가 나타난 경지가 바로 궁극의 깨달음인 묘각이고 ‘남김 없는 완전한 평화[無餘涅槃]’이며, 참다운 본성을 체득한 것이고, 깨달음이다. 설사 거친 번뇌를 없애고 한 생각도 나지 않는 임시적 무심 상태인 숙면일여의 자재 단계에 진입했어도 이는 ‘뛰어나고 미묘한 경계[勝妙境界]’일 따름이다. 죽었다 다시 살아나지 못하므로 종문의 올바른 깨침은 아니다. 오직 과거와 미래가 모두 끊어지고 죽음 같은 제8 마계에서 크게 살아나야 된다.

 

미세한 번뇌인 근본 무명을 남김없이 없애, 자나 깨나 항상 같고, 안팎이 철저하게 밝으며, 그릇된 생각과 잡념이 없고,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추며, 궁극의 깊은 경계인 ‘크고 완전한 평화[大涅槃]’를 친히 증득해야만 부처님의 올바른 후손이며 달마의 가르침을 제대로 계승했다고 인가 받을 수 있다. 이 궁극의 그릇된 생각 없는 경지가 바로 크게 쉬고, 크게 편안한 경지이며, 인위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도 없고, 작위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도 없으며, 자유롭고 자유로운 큰 해탈의 경계이며, 깨침 후의 보임이자 이천이다. 그리하여 참다운 본성을 체득함은 결함 없이 몰록 깨치고 몰록 닦는 증오임이 밝은 태양처럼 분명하다. 그러하니 수행하는 사람들은 부처님과 조사들이 올바르게 전한 가르침에 어긋나는 어떠한 말도 단연 배제하고 올바르게 전한 위없는 큰 가르침을 원만하게 성취해야 한다. 

 

【강설】 덧붙여 참고로 한마디 하겠다. 종문에서 고금을 통틀어 선지식을 가장 많이 배출한 분으로 마조 스님을 꼽는다. 허나 백장 선사의 법을 이은 황벽 선사는 “마조 대사 문하에서 88명이 세상에 나와 도량에 앉아 스승 노릇을 하였지만 마 대사의 바른 안목을 증득한 사람은 두 세 사람뿐이니 여산廬山 화상이 그 가운데 한 분이다.”고 단언하셨다. 이것이 유명한 황벽 스님의 정안종사에 관한 법문으로서 우리 종문의 생명선과 같은 말씀이다. 이는 대혜 선사도 마찬가지셨다. 대혜 스님 당시에도 종사를 자처하며 법석을 연 이들이 수없이 많았다. 허나 대혜 스님은 그들 모두를 인정하진 않았다. 교충광敎忠光이 찾아와 천하 선지식들이 똑같이 펴는 선법을 묻자 대혜 스님은 “지금 총림에서 선법을 거침없이 말하지만 양기의 정맥을 이어받은 이는 서너 사람뿐이다.”고 말씀하셨다. 교충이 그 말에 처음엔 크게 분노하였으나 결국은 마음을 돌이켜 대혜에게서 도를 얻고 법을 이었다. 원오 극근 선사의 스승인 오조법연 선사도 마찬가지셨다. 당시 황룡 혜남 선사 회하의 많은 제자들이 천하를 호령하고 있었지만 오조 법연 선사는 오직 회당晦堂과 귀종歸宗 두 분만 긍정하고 그 밖에는 아무도 긍정하지 않았다. 천하를 호령하는 수많은 선지식 중 두셋의 참다운 선지식을 알아보고, 옳고 그름과 깊고 얕음을 분명히 가려낼 수 있는 뛰어난 안목을 갖춰야만 참으로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바른 안목을 갖춘 종사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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