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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신해혁명 시기 대표적 불교 사상가이자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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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2 년 2 월 [통권 제106호]  /     /  작성일22-02-04 09:16  /   조회3,30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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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중국의 불교학자들 14 | 장병린章炳麟 1868-1936

 

장병린章炳麟은 중국 근대시기의 대표적인 불교 사상가이자 혁명가이다. 그의 제자인 노신魯迅(1881~1936)이 그를 혁명 성향의 학자가 아니라 ‘학문적인 혁명가’라고 하였을만큼 장병린은 정치적 실천에 앞장선 혁명지사인 동시에 학문적 깊이를 가진 철학자였다. 그리고 이 학문은 불교를 중심으로 하였기에 그는 근대시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불교 사상가였다. 

 

청대 고증학 계승

 

장태염은 1868년 항주 북쪽에 위치한 위항이란 곳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원래 학승學乘이었는데 후에 ‘병린’으로 개명하였다. 고염무顧炎武를 존경하여 호를 태염太炎이라고 하였고, 더 자주 장태염章太炎으로 불리운다. 1883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건강상 이유로 불발되었다. 

 

 

사진 1. 태염太炎 장병린章炳麟. 

 

1890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항주로 이사하였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중국 학술의 중심인 고경정사詁經精舍에 입학하였다. 고경정사는 1801년 청대 고증학자 완원阮元이 설립한 청대 고증학의 산실로서 강남 최고의 서원이었다. 장태염은 고경정사에서 공부를 시작하였고, 7년 동안 매우 엄격한 경학 공부에 전념하였으며, 학문적 두각을 나타냈다. 

 

고경정사를 만든 완원이 청대 고증학의 맥을 이었던 만큼 그 역시 송대 주자학에 비판적 태도를 나타냈고, 유학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바로 초기 유학을 대하였다. 고경정사에서의 이 학문적 엄격성에 대한 훈련과 몰입을 통해 그는 나중에 ‘국학대사’라는 호칭까지 들을 정도로 학문적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그는 평생 이러한 학문적 엄격성을 유지하였고, 중국 고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학설을 뒷받침하였다.

 

나이 28세 때인 1895년, 장태염은 고경정사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고 있으면서도 현실 개혁에 대한 욕구와 청나라에 대해 반감이 있었다. 그러한 연유로 상해에서 강유위가 설립하였던 ‘강학회’에 가입하였다. 1896년 양계초 등의 개혁 인사들이 상해에서 잡지 『시무보時務報』를 창간하였는데, 장태염에게 편집을 부탁하였다. 장태염은 그 부탁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가르쳐 온 스승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경정사를 그만두었다.

 

 

사진 2. 장태염이 공부했던 고경정사.  

 

고경정사에서는 정치적 입장이 다르기도 했지만, 학문이 뛰어난 장태염이 정치가가 되기보다는 학자로 남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역시 계몽잡지 『시무보』 편집으로 현실 참여의 길에 들어섰지만, 유학을 종교로, 공자를 교조로 받아들이는 강유위의 사상적 입장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얼마가지않아 그만두었다. 이후 고경정사의 동료인 송서宋恕(1862~1910)와 『경세보』를 창간하고, 절강 지역의 사회운동을 이끌었다. 양인산의 제자로서 독실한 불교 거사였던 송서를 통해 장태염은 『열반경』,  『유마경』 등의 불경을 읽었다. 

 

투옥, 그리고 유식불교와의 만남

 

장태염 나이 30세인 1898년에 무술변법 개혁이 있었고, 서태후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반동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송서의 친구인 담사동譚嗣同은 형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대만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오는 등 어려운 시기를 넘겨야만 하였다.

 

이후 1903년 상해에서 채원배, 종앙 등과 ‘애국학사’를 설립해서 다시 사회운동에 나섰다. 이때 소보사건이 일어났는데, 청나라를 정면으로 비판한 장태염의 글이 잡지 『소보』에 발표되자 체포되어 3년 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3년의 옥살이가 장태염을 불교사상에 눈뜨게 하고 이후 그의 혁명사상의 밑바탕이 되어 주었다. 나중에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상해 감옥에 갇힌 3년 동안 오직 미륵과 세친의 저술만 공부하였다. 학문의 방식이 내가 평생 공부한 고증학과 유사하여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를 알고 대승불교의 심오한 경지를 깨달았다.”

 

그는 미륵, 세친의 유식불교를 접하고서 이전에 『열반경』, 『유마경』 등을 읽었을 때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의 진리를 깨달았던 것 같다. 옥살이를 하며 그는 『유가사지론』, 『섭대승론』 등 유식불교 서적들을 읽었고, 유식불교의 그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특성에 감복하였던 것이다. 1906년 장태염은 만기 출옥하였고, 일본 도쿄를 방문하였으며 당시 수천명의 유학생들에게도 민족주의의 큰 영향을 끼쳤다.

 

『제물론석齊物論釋』, 장자와 유식불교의 만남

 

장태염은 중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불교에 의거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는 “중국은 본래 불교의 나라이다. 불교만이 도덕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현실을 극복하는 힘은 불교에서만 나올 수 있다고 보았고, 그가 불교를 통해서 가장 강조한 것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는 자립정신이었다. 그는 불교를 통해 사회 변혁, 혁명을 이루고자 하였고, 그에게 불교는 혁명종교이자 혁명도덕이었다.

 

 

사진 3. 장태염이 공부했던 고경정사를 설립한 완원阮元. 

 

1908년 동맹회 기관지 『민보』에 ‘네 가지 미혹’이라는 글에서 공리주의, 사회진화론, 유물론, 자연주의의 네 가지 사상을 비판하였고, 이것이 그의 사회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신해혁명 바로 전해인 1910년 자신의 대표적 저서인 『제물론석齊物論釋』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장자』 「제물론」 편을 유식불교를 통하여 해석한 것으로, 자신의 사회사상과 불교사상이 잘 드러난 중국 근대철학사의 3대 명저에 속한다. 장태염 자신도 “『제물론석』의 논의는 글자 하나가 천금의 가치가 있다.”고 자부할 정도였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멸망하였지만 반봉건· 반외세의 근대국가는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였고, 이에 따라 더 급진적인 정치 흐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사이 장태염은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되어버렸다. 1926년 그는 국민정부가 시도한 북벌전쟁에 반대하였고, 이후에는 정치에서 손을 떼고 학문 영역에서만 활동하였다. 청말 이후 사라져가는 국학 전통의 계승에만 힘을 다하였고, 그 결과 ‘국학대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청대 학술이 장태염을 통해 이어졌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을 끼쳤으나, 1936년 그는 6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혁명사상으로서의 불교사상

 

중국 근대에 불교는 서학동점에 대항한 사회적 변혁을 위한 시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서양문화의 충격에 대한 전통철학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 신유학의 형성에 불교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던 점은 특이한 점이다. 서양문화와 중국 전통문화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불교사상이 동서문화교류의 계합점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현대 신유학 내지 현대 신불교는 유학과 불교, 특히 유식불교와의 결합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 이들 학문이 형성되는 과정을 ‘심식心識의 길’을 갔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때 심心은 유학 심성론의 심을 의미하고, 식識은 유식불교의 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흐름은 무술변법, 신해혁명의 시기에 담사동에서 장태염으로, 그리고 장태염에서 웅십력熊十力(1885~1968)으로 이어지며 철학적 체계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불교의 역할이나 다른 사상과의 결합 양태가 이들 각 사상가들 마다 차이를 보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예컨대 동일하게 불교사상을 활용하였지만, 담사동이 불교사상을 통해 무술변법 시기에 군주변법운동을 옹호하였다면, 장태염은 신해혁명 시기에 군주제 타도를 요구하였다. 장태염이 불교를 혁명의 도구로 활용하려 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사진 4. 1896년 양계초 등이 상해에서 창간한 『시무보時務報』. 장태염은 한 때 이 잡지의 편집을 맡았다. 

 

“오늘 우리는 화엄종, 법상종 두 종파를 이용하여 낡은 법을 개량하려고 한다. 화엄종의 설법은 중생을 널리 구제하고 머릿속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도덕적인 측면에서 가장 이익이다. 법상종의 설법은 만법유심이다. 형체를 가지고 있거나 없거나 모든 현상들이 환상이고, 결코 실재하는 참된 존재가 아니라고 본다. 이러한 신앙이 있어야만 두려움 없이 용맹하게 중지를 모아서 다가올 일을 준비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화엄불교, 법상·유식불교를 활용하여 사회 변혁, 혁명을 이루고자 함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장태염은 특히 도덕의 몰락이 혁명이 실패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극복의 혁명도덕이 필요하며, 이러한 도덕을 불교에서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화엄학은 중생을 널리 구제하겠다는 생각을 제시하는 반면에, 유식불교는 개체 자아가 법상法相의 분석을 통해 해체되는 환상에 불과한 것임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유식불교에 강조점을 두었다. 따라서 장태염 철학에서 유식불교가 차지하는 위상은 클 수밖에 없었으며, 그의 불교사상이 정치·사회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는 점, 즉 혁명과 관련된 정치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음은 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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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철학박사. 현재 고려대학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석·박사 졸업. 같은 대학 철학과에서 강의,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초빙교수를 지냈다. 지곡서당 한문연수과정 수료. 조계종 불학연구소 전문연구원 역임. 『웅십력 철학사상 연구』, 『신유식론』,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별기』 등 다수의 저서 및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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