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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일본불교 계율연구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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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  2022 년 4 월 [통권 제108호]  /     /  작성일22-04-04 09:27  /   조회2,88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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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일본의 불교학자들 15 | 이시다 미즈마로石田瑞麿  

 

계율은 불교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지만, 전후戰後의 일본불교 연구에 있어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분야는 아니었다. 여기에는 메이지 이후 일본에서 계율이 종교상의 의미를 거의 상실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메이지 이후 계율 경시 풍조 

 

1872년(메이지 5), 육식대처령肉食帶妻令 포고 이후 각 종단에서는 육식과 대처가 일반화되었다. 일찍이 대처를 제도화한 정토진종이 여타의 종파보다 빨리 근대화에 성공했고, 이에 자극을 받은 다른 종단들이 재가주의적 신불교 세력을 확장한 것 역시 계율에 대한 무관심을 심화시켰다.

 

더해서 메이지 이후 서양의 불교학이 유입되면서 일본불교는 일본 이외의 불교권에 대한 실태를 파악할 수 있었지만 이를 통해 계율의 중요성 혹은 계율로 복귀하자는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번잡한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정신성을 중요시한 일본불교야말로 대승불교의 진의를 발휘하는 것이라는 입장이 대세였다. 이러한 불교계의 입장을 당시의 연구자들이 함께 공유했고, 그 결과 전후의 일본불교 연구에서도 계율 경시가 재강화되었다. 그 유명한 부파불교 교단과는 별도로 재가를 기원으로 하는 대승불교 교단이 성립했다는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 설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

 

이시다 미즈마로石田瑞麿(1917~1999, 이하 이시다)는 굳이 분류하자면 2차세계대전 이후의 계율 연구자에 포함된다. 이시다 이전에도 계율연구는 진행되었다. 물론 앞에서 메이지 이후 계율이 경시되었다고 언급했지만 이는 연구의 질이 아닌 연구자층이 얇았다는 의미가 크다. 우에다 텐즈이上 田天瑞의 『계율 사상사』(1940)나 에타니 류카이惠谷隆戒의 『원돈계 개론圓頓戒槪論』(1937) 등은 계율을 통시적 관점에서 저술한 대표적 연구서이다. 이들은 고대부터 혹은 중국 천태종에서부터 일본 근세에 이르기까지의 대승계를 서술했다.

 

특히 우에다와 에타니는 일본의 대승계를 서술할 때 사이초最澄와 감진鑑眞을 공통적으로 언급해 일본불교가 인도-중국-일본으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각은 정토진종의 시마지 모쿠라이島地黙雷 이래 일본불교의 정통성을 인도-일본으로 본 관점과 유사하면서도 그 결은 다소 차이가 있다.

 

전후 계율 연구자 이시다

 

전후의 계율 연구자인 이시다 미즈마로는 독특한 지점을 가진 연구자이다. 그는 자신의 자전적인 글에서 “연구 생활을 돌이켜보면 세속적이고 괴로운 외적인 상처와 중압감이 있는가 하면 내적인 우려와 고뇌도 생각이 난다.”(「내가 걸어온 길わたしの歩い た道」, 1996)고 언급하면서도 구체적으로는 밝히지 않거나 자신의 사망 소식과 장례식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한 연구자이다. 더해서 그는 제자나 학문적 후계자도 남기지 않았고, 연구 업적을 기리는 기념논문집 또한 간행하지 않았다. 

 

사진 1. 이시다 미즈마로. 法藏館 출판물 사진 재사용. 

 

그의 이러한 독특함 때문인지 이시다는 단순히 계율 연구만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이들은 이시다를 정토교 연구나 신란親鸞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연구자로 기억한다. 필자가 이시다의 저서 중에서 흥미롭고 독특한 시각을 느낀 『일본인과 지옥』(1998) 역시 정토교를 기반으로 한 지옥 연작 중 하나이다. 하지만 전후의 계율 연구사를 논할 때 이시다 미즈마로를 제외하고 계율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시다는 처음부터 계율 연구에 깊은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저서, 『일본불교의 계율 연구日本仏教における戒律の研究』(1963) 서문에는 계율 연구를 시작한 계기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계율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부터이다. 혼란한 세상이 일본불교의 계율에 대해 생각할 시점을 준 것처럼 보이지만, 직접적으로는 일본불교에서 사회복지사업의 자취를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생각은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시작되었고, 하나야마 신쇼花山信勝 선생님께 배웠다고 생각한다.” 

 

사진 2. 저서 『일본인과 지옥』(1998).  

 

계율 연구의 시작에 대해, “교키行基와 보살정신이란 논문을 쓰던 중 대승의 보살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역대 천황제와 신앙」, 1946)나, “나카무라 하지메 선생님의 권유로 불교의 사회구제사업의 초문을 쓰면서부터이다. 교키와 에이손叡尊 연구는 일본의 계율 연구의 방향성을 찾는데 결정적이었다.”(「내 가 걸어온 길」) 등에서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교키에서 신란까지, 일본불교의 계율 연구

 

종합해 보면 이시다의 계율 연구 시작점은 사회복지사업, 교키, 에이손 등으로 압축된다. 이것들이 잘 드러난 논문이 「자비와 구제-승속일체의 자각과 실천」(1954)으로, 이시다는 『대세계』에 5회에 걸쳐 논문을 게재했다. 논문의 핵심은 사회와 승단의 관계 규명으로 정리할 수 있다. 출가와 재가의 구별이 존재하는 한, “사회는 경제적 원조나 법제적 규제를, 교단은 포교와 구제라는 상호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지적에 대해, 이시다는 일본에서 승속의 이념과 존재, 승단과 사회의 관계는 “그러한 언급과는 다른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선을 그었다. 그 예로 교키·사이쵸·구야空也·신란·에이손 등의 실천 활동을 일례로 들었다.

 

 

사진 3. 『일본의 불교』(1996). 「내가 걸어온 길」이 수록되어 있다.  

 

이시다는 쇼도쿠태자聖德太子의 ‘승속일체무차별 이념’이 승니령과 사분률에 의거한 수계로 인해 사라졌다고 보았다. 이를 교키·사이쵸·구야가 승속일체의 보살정신을 발휘했고, 신란에 이르러 승속 차별이 완전히 부정되었다고 기술했다. 반면, 에이손은 승僧의 위치를 고집해 승속 일체에 이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이시다는 계율 연구 초기에 일본불교의 특색을 ‘진속일관眞俗一貫’에 있다고 보았는데 진속일관은 쇼도쿠태자에서 사이쵸로 이어지고, 신란이 비승비속非僧非俗을 실천해 명료화시켰다고 정리했다. 출가와 재가의 구별을 부정하는 이시다의 관점은 향후 그의 계율 연구의 근간이 되었다. 다만 이시다 본인이 스스로 하나야마 신쇼에게 배웠다고 말한 것처럼 계율연구 초기의 시각은 하나야마와 거의 유사하다.

 

사진 4. 『일본불교의 계율 연구』(1964).

 

 

『일본불교의 계율 연구』(1963)는 이시다의 계율 연구를 총정리한 연구서이다. 책은 이시다가 발표한 계율 관련 논문 20여 편, 1958년에 발표한 『감진鑑眞의 사상과 생애』 등을 엮어 박사학위 청구논문으로 집필한 것이다. 1, 2장은 1958년 발표본을 거의 요약한 것으로 감진 이전의 계율과 감진의 계율로 구별해 기술했다. 감진 이전의 계율(교키의 실천 활동)은 『범망경』을, 감진의 계율은 『법화경』을 기반으로 한다고 했다. 다만 교키의 실천 활동을 이전에 발표한 「자비와 구제」에서는 유가계瑜伽戒에 근간을 두었다고 언급한 지점과는 대비된다. 여기에는 이시다가 자기비판을 토대로 학설을 발전시킨 것인지, 혹은 감진의 계율도 유가계에 기반한다는 도키와 다이죠常盤大定의 주장을 반박한 것인지는 좀 더 고심할 필요가 있다.

 

3, 4장을 구성하는 사이쵸의 계율은 이시다가 가장 공을 들인 부분으로 이전 발표 원고가 아닌 새로 집필한 부분이다. 사이쵸가 주장한 원계圓戒의 전개 양상과 변질, 가마쿠라시대 정토교의 계율 이해까지 폭넓게 다루었다. 특히, 사이쵸가 도선道璿의 영향을 받았다는 도키와 다이죠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승강제도로부터 이탈해 독자적 교단을 만든 것 등으로 미루어 교키의 영향을 받았다는 자신만의 설을 정립시켰다. 

사진 5. 『신란 전집』(1985-1987). 

 

『일본불교의 계율 연구』 발간은, 혹은 이시다의 새로운 학설은 당시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쯔치하시 슈고土橋秀高는 『불교학연구』(1964)를 통해 이시다 설을 실질적으로 반박했다. 쯔치하시의 반박을 요약하면, 첫째, 사이쵸의 계율을 『화엄경』의 영향으로 보았으나 사이쵸의 계율관에는 화엄사상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둘째, 사이쵸가 주창한 원계圓戒의 독자성이 충분히 설명되고 있지 않다. 셋째, 전수염불과 계율이 통일되지 못한 설명이 부족한 점을 지적했다. 

 

이외에도 요시다 야스오吉田靖雄는 이시다가 주장한 교키와  『범망경』을 재검토하는 등의 이시다 설에 대한 활발한 논의들이 진행되었다. 이시다의 계율 연구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미완으로 끝났다’이다. 이러한 평가는 그의 연구 스탠스에서 추정할 수 있다. 자신의 주요 연구 분야인 신란과 계율 연구를 철저히 분리해 신란 연구에서는 계율을 일절 언급하지 않고, 계율 연구에서는 신란을 배제했다. 이는 두 분야가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시다에게 있어 신란의 계율은 중요한 문제였던 것 같다. 

 

‘미완의 계율 연구’는 이시다의 긴 숙고와 위의 문제들을 언급하지 못한 채 삶이 마감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한다. 미완임에도 불구하고 이시다의 계율 연구는 이전 세대의 계율 연구의 틀에서 일보 전진한, 비승비속의 실천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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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령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서 일본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인천대와 동국대 등에 출강했다. 현재 아시아 종교문화 교류에 관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ikemire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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