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의 비결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월간고경 연재기사

월간고경

[조주록 읽는 일요일]
장수의 비결


페이지 정보

곰글  /  2019 년 5 월 [통권 제7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910회  /   댓글0건

본문

곰글 | 불교작가

 

유명한 사람이나 지체 높은 사람들의 경우 이름과는 별도로 호號를 갖는다. 승려에게도 더러 호가 있다. 법명 앞에 붙이며 법호法號라 한다. 스승이 제자의 지혜와 연륜을 치하하며 하사하거나 제자 스스로 자신에게 선물한다. 아울러 법호를 덧붙이면 법호를 포함해 스님들의 법명은 네 글자가 되는 것이다. 중국의 옛 선사들도 그렇다. 다만 그들의 법호는 자기를 드높이는 수식어의 성질은 아니다. 대개 생전에 본인이 주로 머물면서 수행하고 포교하던 지역이나 사찰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조계혜능은 ‘중국 조계산에 사는 혜능 스님’ 임제의현은 ‘하북성 진주 임제원院에 사는 의현 스님’ 역산유엄은 ‘호남성 약산에 사는 유엄 스님’ 동산양개는 ‘강서성 동산에 사는 양개 스님’이라는 의미다. 조주종심도 마찬가지. 그는 현재 조현趙縣이라 불리는 북경 인근의 마을 조주趙州에서 말년을 보냈다. 종심從詵은 원래의 법명이다. 결국 ‘조주에 사는 종심 스님’인 셈이다. 일견 ‘동네 아는 형’처럼 친근함과 푸근함이 배어난다.

 

『동의보감』은 인간의 최대수명을 120세로 보고 있다. “사람이란 만물의 영장이다. 타고난 수명은 본래 4만3200여 일이다. 그래서 만약 이름난 스승을 만나 비결을 받고 신심을 내어 노력해 구한다면 비록 120살이 되더라도 건강한 상태로 살아갈 수 있다.” 바로 조주의 일생이 한의학이 주목해온 실제 사례다. 어려서 인물사전을 읽는 게 취미였고 그들의 생몰연대를 외우는 게 버릇이었다. 조주종심은 서기 778년에 태어나 897년에 죽었다. 우리 나이로 120세, 그야말로 압도적인 장수長壽다. 본래 종교인들이 오래 살고 스님들도 그러한 편이라지만, 역대 조사들 가운데도 최장기록이다. 게다가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의 인물이고 백신이나 항생제 따윈 구경도 못했을 인물이다. 오늘날의 기대수명을 훌쩍 뛰어넘는 목숨의 길이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티끌은 바깥에서 들어온다”

 

『동의보감』은 장수를 위한 양생養生에는 일곱 가지 방법이 있다고 전한다. △말을 적게 하는 것 △어떤 음식이든 맛있게 먹는 것 △기름기 많은 음식을 피하는 것 △침을 자주 삼킬 것 △사색과 걱정을 적게 하는 것 △애욕을 절제하는 것 △화를 내지 않는 것. 정기精氣를 허비하지 않기 위한 습관들이다. 조주가 이러한 원칙들을 얼마나 잘 지키고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런저런 전거들에 따르면 조주는 분명히 소식小食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신도들에게서 공양供養을 일절 받지 않은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사소한 일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소탈한 성격이었으리라 짐작되기도 한다. 말을 잘했으나 결코 말이 길지는 않았다. 사람을 멀리했다는 사실도 적어두어야겠다.

 

조주가 절 마당을 쓸고 있는데 어떤 승려가 물었다. 

“화상和尙은 대선지식大善知識이신데 어째서 마당을 쓸고 계십니까.”
“티끌은 바깥에서 들어온다.”
“이미 청정한 가람인데 어째서 티끌이 있습니까.”
“티끌이 또 한 점 생겼구나!” - 『오등회원五燈會元』에서

 

조주 선사는 무심히 청소를 하고 있었다. 비질을 한다는 생각도, 비질을 하고 있는 내가 있다는 생각도 없다. 행위와 자아가 일치된 상태다. 그런데 스님 하나가 다가와서 이 평온을 깼다. 대뜸 “화상은 대선지식이신데 어째서 마당을 쓸고 계십니까”라며 돌멩이를 던진다. ‘화상’은 어른 스님을 우러르는 존칭이며, ‘대선지식’은 불교의 큰 뜻을 가르쳐주는 인자한 스님인데 거기다 크기[대]까지 한 스님이라는 극존칭이다. 객승의 발언은 ‘큰스님이라면 웃전에 앉아 아랫사람들에게 손가락이나 까닥해 지시하면 될 일이니, 체면 보존하고 그만두라’는 거다. 얼핏 존경의 마음을 담은 만류 같지만, 듣는 입장에선 ‘지체 높으신 분이 왜 허드렛일 따위나 하고 있느냐’는 조롱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심사가 뒤틀린 조주가 “티끌이 들어왔다”며 넌지시 불쾌감을 드러낼 만하다.

 

불쑥 나타난 스님은 예의가 바른지는 몰라도 눈치가 백치인 건 분명하다. 남의 속도 모르고 자꾸 불에다가 땔감을 밀어 넣는다. “이미 청정한 가람인데 어째서 티끌이 있습니까.” 시력은 멀쩡한데 심안心眼은 형편없다. 조주의 가슴속엔 산불이 났다. ‘큰스님은 청소를 하면 안 된다’는 분별심, ‘그럼에도 청소를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라는 자의식, ‘큰스님인데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모멸감 등등 중생심이 범람하는 중이다. “티끌이 또 한 점 생겼구나!” 불청객이 자리를 뜨지 않는 한 온 사방이 쓰레기더미가 될 참이다.

 

감정노동이란 타인의 감정을 상대하는 노동이다. 흔히 텔레마케터나 백화점에서 일하는 판매직을 떠올리지만, 민원인을 응대해야 하는 하급 공무원도 감정노동자다. 보통의 회사원들도 감정노동을 해야 하는데 상관을 어쩔 수 없이 대면해야 할 때다. 포괄적으로 보면 사람의 얼굴을 맞대야 하는 일이라면 모두 감정노동이다. 끊임없이 환자를 진찰하고 하소연을 들어줘야 하는 의사라는 직업도 감정노동이겠다. 다만 일반적인 감정노동자보다 돈을 훨씬 많이 번다는 것이 차이점일 뿐.

 

감정노동은 억지춘향이다. ‘직장인이 사람을 대하는 업무를 수행할 때에 조직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감정을 자신과 감정과는 무관하게 의무적으로 행하는 노동’을 가리킨다. 쉽게 말하면 울고 싶은데도 웃어야 한다는 것이고, 손님이 아니라 건방을 떨고 막말을 일삼는 ‘손놈’의 감정도 떠받들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생글생글 웃으며 당신에게 인사하는 가게 주인이나 스튜어디스는 정말로 당신이 반가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래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고 사회적 위치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감정노동을 잘해야만 더 이상 감정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기회가 주어질 확률이 높기에, 그들은 오늘도 열심히 감정노동을 한다. 고위직일수록 사람의 감정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이고 그의 감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다.

 

괴로우면 생각이 많아지고 즐거우면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곧 생각은 그가 고통스러운지 아닌지 고통스럽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더욱이 대부분의 생각은 그냥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외부에서 부정적 자극이 올 때 그에 대한 반응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절망에 빠지고 끙끙 앓으며 보복을 다짐한다. 그리고 부당하고 억울한 일은 필시 사람이 가지고 온다. 『동의보감』에 나타난 일곱 가지 양생법은 알고 보면 대부분 ‘인간관계의 축소와 정리’를 가르치고 있다. 침을 자주 삼키고 기름기 적은 음식을 먹으라는 정도만 예외다. 풀이하자면, 사람을 덜 만나야 말을 적게 하는 법이요 원한을 잊 어야 걱정을 적게 하는 법이다. 무례한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기란 어려우며 아름다운 사람에게 흑심을 내지 않기도 어렵다. ‘어떤 음식이든 맛있게 먹는 것’은 얼핏 인간관계와는 무관하게 섭생攝生과만 관련된 항목을 보인다. 그러나 그 맛을 충분히 음미하며 식사를 하려면, 혼자 먹거나 최소한 좋은 사람들과만 먹어야 한다.

 

“기대 없이 … 인내하자”

 

사람을 만나면 흔히 밥을 먹는다. 밥 먹는 입으로 말도 한다. 대화의 절반 이상은 거기에 없는 사람들을 씹는 것이다. 술까지 마시면 더 많이 씹게 된다. 없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이 강할수록 있는 사람들끼리의 유대감은 두터워진다. 우정의 기본은 배타排他이다. 정치의 기본 역시 내 편과 남의 편을 가른 뒤, 내 편을 남의 편보다 1명 더 많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그 중요한 한 명이 되고자 그 누군가도 열심히 정치를 한다. 그렇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기 위해서다. 돈을 벌든 인맥을 쌓든 정을 쌓든 외로움을 해소하든 스트레스를 해소하든 성욕을 해소하든…. 물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했다. 사람 만나는 걸 아예 끊거나 비난할 것은 못 된다. 운명이다. 다만 이용이 잘 안 되니까 실망하는 것이고, 상대방이 마음처럼 안 움직여주니까 상처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술자리가 탐난다면? 사랑하자, 기대 없이. 인내하자, 사심 없이. 나 역시 그들에게 고작 사람일 뿐이니까.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곰글
곰글 1975년생. 연세대 철학과 졸엄.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9권의 불서佛書를 냈다.
곰글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