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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삼론종 사상을 체계화한 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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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9 년 5 월 [통권 제73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60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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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성균관대 초빙교수

 

용수 보살은 제2의 부처님이자 대승불교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위대한 사상가이다. 이와 같은 위상을 가진 용수의 사상을 중국에 소개한 것은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 삼장이다. 그가 번역한 용수의 저작들을 통해 공사상이 소개되었고, 그것은 중국 종파불교의 사상적 기저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용수 보살은 8종의 공조公祖로 널리 추앙받게 되었다.

 

고구려 승랑 스님과 삼론학 

 

용수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인도 중관파中觀派 사상은 중국에 들어와서는 삼론종三論宗으로 불렸다. 용수의 『중론』과 『십이문론』, 그리고 용수의 제자 제바의 『백론』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학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상적 내용으로 볼 때는 중관종中觀宗, 공종空宗, 무상종無相宗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구마라집은 삼론종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는 논서들을 번역했기 때문에 삼론종의 개조로 추앙받는다. 구마라집과 함께 대승경전과 삼론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삼론에 조예가 깊은 제자들이 양성되었다. 이들에 의해 삼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승예僧叡와 승조僧肇 같은 학자들이 배출되고, 이들이 여러 저술을 편찬하면서 삼론종의 사상적 체계를 잡아갔다.

 


 

 

삼론종이 우리에게 특별한 관심을 끄는 이유 중 하나는 승랑(僧朗, 500년 전후) 스님 때문이다. 고구려 요동 출신인 승랑은 삼론종 사상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삼론종은 고삼론과 신삼론으로 구별되는데 그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승랑이다. 삼론의 계보는 승랑 때부터 법맥이 확실해 지기 시작했는데 그때까지 삼론학은 성실론을 비롯해 소승적 영향으로 본래의 진의眞意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승랑은 이런 한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삼론학의 체계를 수립하여 길장에게 전승함으로써 신삼론의 원조로 평가받게 된다.

 

승랑은 북중국에서 구마라집의 교학을 배웠는데 삼론뿐만 아니라 화엄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공부를 마친 승랑은 남중국 회계산 강산사를 거쳐 초당사 등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이 때 정계에서 은퇴한 관리이자 현학가인 주옹周顒이 승랑에게 삼론학을 배워 「삼종론」을 저술하여 삼론의 기본적 취지를 밝혔다. 

 

나아가 불교에 심취해 불법천자佛法天子로 불리던 양 무제武帝 역시 승랑의 학식을 높이 평가했다. 무제는 승전僧詮 비롯해 열 명의 학승들을 선발해 승랑 문하로 보내 공부하게 할 만큼 스님에 대한 존경심이 깊었다. 만년에는 서하사棲霞寺로 들어가 스승 법도화상法度和尙의 지위를 계승하는 등 승랑의 주요 활동무대는 하서河西지방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그래서 ‘하서대랑河西大朗’ 또는 ‘독보하서獨步河西’라고 불려졌다.

 

승랑 스님이 이와 같이 지식인과 황제의 존경을 두루 받게 된 것은 삼론에 조예가 깊어서 삼론종 성립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승랑에 의해 발전된 삼론학은 양무제가 보낸 열 명의 제자 중 지관사의 승전에게 상승되고, 다시 흥황사 법랑法朗을 거쳐 길장 대에 와서 집대성되면서 독립된 종파로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승랑은 삼론학에 정통한 학승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임종이 다가오자 ‘태어나서 죽으나, 본래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내용을 담은 「사불포론死不怖論」을 지어 생사에 초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스님은 세수 75세의 나이로 결가부좌를 한 채 좌탈입망坐脫立亡할 만큼 수행력도 깊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행적을 미루어볼 때 문자에만 집착하는 교학승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철 스님의 평가이다.

 

삼론종의 집대성자 가상길장 

 

삼론학을 대성시킨 길장(吉藏, 549~623) 스님은 승랑 대사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높았다. 그는 승랑을 ‘섭령 대사攝嶺大師’ 혹은 ‘섭산 대사攝山大師’라고 부르며 존경심을 드러냈다. 자신이 삼론학을 정립함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삼론종은 유식학을 토대로 한 법상종이 대두하면서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럼에도 길장의 삼론학은 한·중·일 삼국으로 전해져 불교학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길장은 어려운 논서를 집필하며 중국에서 활동했지만 그는 중앙아시아 출신이었다. 그의 조부는 안식국安息國에서 중국으로 이주해 온 이민자로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다. 불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난 탓에 어려서부터 불교와 인연이 닿았고, 아버지는 당시 명성이 자자하던 진제 삼장에게 아들을 데려갔고 이 때 길장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구마라집, 현장, 불공과 함께 중국의 4대 역경승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나아가 진제 삼장은 인도 유식파의 무착과 세친의 학설을 번역하고 체계화하여 섭론종攝論宗의 개조로 추앙받기도 했다. 서북인도 출신이었던 진세 삼장은 양 무제의 초청을 받아 남중국으로 건너와 역경 불사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길장 역시 중앙아시아 출신이었고 독실한 불자 집안이었다. 이와 같은 공통분모가 두 사람을 단단하게 이어주는 정신적 고리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교와 인연을 맺은 길장은 불과 12살의 나이로 흥황사에서 법랑의 강의를 듣고 감명을 받아 이듬해에 출가했다. 구족계를 받을 때까지 불교학에 계속 몰두하면서 점차 길장의 명성은 높아져 갔다. 정치적 격변을 거쳐 수隋 나라가 등장하자 길장은 가상사嘉祥寺로 들어가 7~8년간 삼론학을 연구했는데 ‘가상 대사嘉祥大師’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했다. 나중에 수양제의 칙명으로 혜일사와 일엄사에 주석하며 삼론과 『법화경』 연구에 몰두했다. 

 

길장은 중국 제일의 찬술가로 꼽힐 만큼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현존하는 것만도 26부 110권에 달한다. 『삼론현의』, 『중관론소』, 『이십문론소』, 『백론소』, 『이제의』, 『화엄경유의』, 『유마경유의』, 『금강경의소』, 『법화경의소』 등 초기대승 불교와 삼론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일생의 저작을 불태운 길장 스님

 

길장은 삼론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성철 스님은 “문자에만 치중하여 실제로는 마음을 열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며 승랑에 대한 평가와는 사뭇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삼론종의 종지에 있어서 공을 설하고 『중론』을 근본 뜻으로 삼았지만, 『중론』의 깊은 뜻을 바로 보았다고 취급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길장은 천태사상을 집대성한 천태지의를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견해에 확신이 깊었다. 스스로 용수의 근본 뜻을 잘 계승했으며, 자신의 논서를 통해 이를 충분히 피력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자긍심은 천태의 저작을 만나면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그는 ‘불법의 정점에 어느 정도 다가가다 말았을 뿐, 부처님의 근본 뜻을 알지 못했으며, 『중론』을 바로 보지 못했다’고 스스로 인정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된 것이다. 

 

이에 길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저작을 찾아내 불사르며 자신의 오류를 인정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지향하는 선승이라면 몰라도 일평생 문자를 통해 진리를 추구했던 학승이었기에 그의 행동은 매우 이례적이고 시사하는 바가 많다. 우선 깊은 인간적 고뇌와 좌절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중관불교의 진의眞義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일생을 바쳐 연구하고 집필한 내용이 본지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엄청난 자괴감을 불러왔을 것이다. 무엇보다 천태지의 저작을 통해 그의 천재성에 대비되는 자신의 오류를 확인하고 깊은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 좌절과 아픔은 자신의 저작을 용납할 수 없게 만들었 고 급기야 그것들을 모두 불태우는 행동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는 진리를 향한 경건하고 진솔한 태도도 엿볼 수 있다. 일생 삼론을 연구했고, 수많은 저술을 남긴 마당에 자신이 옳다고 고집할 수도 있을 법 했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솔직히 시인함은 물론 잘못된 저작을 불태우는 과감한 실천까지 보여주었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자기가 세운 학설을 철회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일생에 걸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고, 제자들과 자신을 후원해 준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장은 자신이 감당해야할 부끄러움 보다 정법正法의 유통을 더욱 소중한 가치로 생각했다. 그 결과 기꺼이 자신의 명성을 희생하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길장의 그와 같은 태도가 오히려 그를 돋보이게 하고, 후학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길장과 같은 천재도 오류를 범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는 것’임을 이론이 아니라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길장은 자신의 저술을 불태우며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했어도 삼론에 대한 그의 연구는 깊고 진지했다는 평가가 뒤따르고 있다. 

 

중국불교사에서 삼론종은 천태종이나 화엄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다. 그러나 용수 보살이 팔종의 공조로 추앙받고, 공사상이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이므로 용수와 공사상을 탐구하는 삼론학은 큰 의미를 가진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삼론학을 체계화하는 과정에 참여한 인물들이다. 중국 출신은 물론 고구려와 중앙아시아에서 멀리 인도 출신까지 두루 참여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삼론학은 광활한 아시아 대륙의 인재들이 두루 참여해 이룩한 학문적 성과라고 볼 수도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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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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