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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
조선시대부터 이름을 떨친 청암사 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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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  2023 년 4 월 [통권 제120호]  /     /  작성일23-04-05 10:44  /   조회1,25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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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심우소요居然尋牛逍遙 30 |청암사·수도암②

 

천왕문에는 안쪽에 사천왕을 그린 그림이 양쪽으로 마주보며 세워져 있다.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고 다시 세우기를 반복하면서 현재는 사천왕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는데, 어느 땐가는 나무로 조성한 사천왕상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천왕은 불교에서 동서남북의 4방위로 붓다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형상화되어 있는데, 그 옛날 인도의 힌두Hindu에서 동서남북으로 네 마리 동물들이 쉬바Shiva신을 지키는 관념에서 변형되어 온 것으로 본다. 

 

청암사를 지켜온 단월들의 공덕

 

천왕문을 지나면 산에서 내려오는 석간수石間水가 솟아나는 우비천牛鼻泉을 만난다. 이상한 이야기이지만 풍수지리로 볼 때 청암사의 지형이 소가 왼쪽으로 누워 있는 와우형臥牛形의 명당이고, 이곳이 누운 소의 코에 해당하여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고 한다. 샘물이 마르느냐에 따라 청암사의 성쇠도 달라진다고 한다. 샘에 물이 차도 문제고 물이 말라도 문제가 된 모양이다. 명당 같은 이야기에 현혹되지 말고 부디 감로수甘露水 한 잔 마시고 붓다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 지혜가 밝아지고 진리를 얻기를 기원해 본다(사진 1).

 

사진 1. 대웅전으로 가는 길.

 

바로 앞에는 깊은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가 없던 옛날에는 이 계곡을 건너다니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계곡 양쪽에 수문장처럼 우람하게 서 있는 높은 암벽에는 글귀와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중 행서로 쓴 ‘호계虎溪’라는 글자가 있는데, 누군가 이 골짜기를 동진東晋시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의 혜원慧遠(334~416) 선사같이 고종시考終時까지 계곡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결심을 하고 새겼을지도 모른다(사진 2). 

 

사진 2. 글씨들이 새겨진 바위.

 

많은 이름 가운데 ‘최송설당崔松雪堂’이라는 큰 글씨가 눈에 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김천 출신의 여성 최송설당(1855~1939)은 남편과 사별한 후 불교에 귀의하고 후일 영친왕英親王(1897~1970)의 보모상궁이 되었다. 고종高宗(1863~1907)으로부터 ‘송설당’이라는 호를 하사받은 그는 임금과 영친왕의 친모인 엄비嚴妃(1854~1911)의 지원 하에 엄청난 재산을 모았는데, 후에 어려운 사람들의 구제와 교육사업에도 진력하여 김천고등보통학교도 설립하였다.

 

사진 3. 최송설당 각자 바위.

 

증산면 출신의 대운병택大雲丙澤(1868~1936) 화상이 쌍계사로 출가한 후 1897년부터 청암사 주지를 맡아 중건하며 당우를 보수하고 극락전과 보광전을 신축할 때 궁녀들의 시주를 모으는 등 대대적으로 후원을 하였고, 화재 후 1912년 다시 청암사를 복원할 때에도 거액의 재산을 내놓았다. 그 공덕의 흔적이 바위에 남아 있다(사진 3). 

 

청암사의 가람 배치

 

청암사의 가람 배치는 중건을 거듭하면서 당우들이 들어서는 바람에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도 일직선이 아니고, 천왕문을 지나면 다시 방향을 바꿔 계곡을 지나게 되는데, 계곡을 건너면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새로 지어진 극락교極樂橋로 향하게 된다(사진 4). 

 

사진 4. 극락교에서 본 정법루와 육화료 등 청암사 전각.

 

계곡의 물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흐르는 극락교를 걸어 지나면 정법루正法樓로 향하게 된다. 2층으로 된 정법루는 아래 공간과 위층을 모두 문을 달아 사용하고 있어 그 밑으로는 통과하지 못하고, 정법루 옆으로 돌아가면 대웅전大雄殿의 앞마당으로 들어서게 된다. 1940년에 건립된 정법루의 뒤쪽에는 성당惺堂 선생이 행서로 쓴 ‘정법루正法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사진 5). 

 

사진 5. 김돈희 서 정법루 현판.

 

정법루를 등 뒤로 하고 대웅전을 바라보면 대웅전을 중심에 놓고 왼쪽으로는 육화료六和寮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진영각眞影閣이 있다. 모두 ‘ㄱ’자와 ‘ㄴ’자를 서로 붙여 놓은 꺾임이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앞마당에는 다층석탑이 서 있다. 1912년에 지은 육화료는 청암사 내에서 가장 큰 전각인데, 육화六和는 ‘육화경법六和敬法’에서 나온 여섯 가지 법으로 신身, 구口, 의意, 계戒, 견見, 이利를 지칭하는 승가의 실천 규범을 뜻한다. 현재 이 건물은 승가대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청암사는 1711년경부터 정혜대사에 의하여 강원講院으로 명성을 날린 사찰인데, 지금도 니승尼僧들이 공부하는 승가대학으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사진 6).

 

사진 6. 청암사 육화료.

 

역시 같은 해에 지은 진영각에는 22위의 조사들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직지사直指寺 성보박물관에 옮겨져 보관하고 있다. 원래는 회당대사의 진영을 모시는 회당영각晦堂影閣으로 지어진 것인데, 청암사가 소실된 후 후일 대운화상이 중건할 때 그 자리에 육화료와 마주하여 현재의 진영각을 새로 지었다.

 

해서로 쓴 대웅전의 현판도 그렇지만 육화료와 진영각의 현판도 성당선생이 해행체楷行體를 구사하여 강건하고 활달한 필치筆致로 썼다. 이 현판들은 성당선생이 쓴 현판 글씨 가운데 수려하고 뛰어난 격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사진 7, 8). 

 

사진 7. 김돈희 서 진영각 현판. 

 

사진 8. 김돈희 서 육화료 현판.

 

이원조의 「청암사중수기」

 

대운화상이 청암사의 주지를 맡아 절을 대대적으로 중건하기 전에도 청암사는 중수한 적이 있었는데, 1854년에 유학자인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 선생이 이의 전말을 담은 「청암사중수기靑岩寺重修記」를 지었다.

 

이원조 선생은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한 후 사헌부 등에 봉직하고, 강릉부사, 제주목사, 자산慈山부사, 경주부윤, 대사간, 공조판서 등을 지내며 이세離世할 때까지 나라에 오래 봉사를 하였다.

 

60세에 고향인 성주로 낙향했을 때는 포천구곡布川九曲을 경영하고 만귀정晩歸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여 많은 학문적 성과도 이루어 낸 동시에 조정의 부름에 나아감과 물러남을 반복하였다. 서예나 서화에도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서예에 뛰어났다. 제주목사로 지내던 시절에 제주에 유배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선생을 만나 깊은 교류를 가졌으니 서예에 관해서도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으리라 짐작된다(사진 9). 

 

사진 9. 응와 이원조 글씨.

 

그는 제주에서 그 옛날 유배된 대학자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 선생의 유적도 정비하고 스스로 「동계선생대정적려유허비명桐溪先生大靜謫廬遺墟碑銘」을 짓고 뛰어난 솜씨로 직접 글씨를 써서 비를 세웠다. 조선시대 말에 학문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에서도 중심을 이룬 ‘한주학파寒洲學派’를 형성한 거유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 선생과 그의 아들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1847~1916) 선생도 이 집안사람들이다. 나는 어릴 때 대계선생이 지은 『정몽유어正蒙類語』로 글자를 배웠다.

 

경북 성주시 ‘한개마을’에는 이들이 남겨 놓은 역사적 발자취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원조 선생이 잠시 성주로 낙향했던 시절에 성주목에 속해 있던 청암사의 중수기를 지은 셈인데, 거기에는 필시 어떤 연고가 있었으리라 짐작된다(사진 10). 

 

사진 10. 응와 이원조 고택.

 

대웅전에 올라서면 성당선생이 해서로 쓴 ‘대웅전大雄殿’ 현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기둥에는 주련柱聯을 나무에 새겨 거는 대신에 기둥에 바로 칠을 하고 글씨를 써 놓았다. 현재의 대웅전 건물은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과 중건을 반복한 끝에 1912년 주지를 맡은 선교양종대교사禪敎兩宗大敎師였던 대운화상에 의해 건립된 것이다(사진 11). 

 

사진 11. 청암사 대웅전.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모니불상은 1912년 대운화상이 중국 항주 영은사靈隱寺로 가서 조성해 와 봉안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청나라 말기 중국불상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불상은 중국에서 조성된 것이지만 후불탱화後拂幀畵는 당대 불화로 유명했던 화승 이혜고李慧杲, 김계은金繼恩, 홍한곡洪漢曲이 그린 것인데, 나머지 산신탱화, 신중탱화, 칠성탱화, 독성탱화도 모두 이들이 그린 것이다(사진 12). 

 

사진 12. 청암사 대웅전의 불상과 탱화.

 

대웅전 앞 중정에는 다층석탑이 서 있는데, 2층의 기단基壇 위에 4층으로 된 탑신을 올려놓았다. 보통 석탑의 기단은 아래층이 낮고 위층이 높은데, 이것은 아래층과 위층의 기단의 높이가 비슷하고, 기단에 비하여 탑신도 가늘고, 옥개석은 탑신에 비하여 커서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은 느낌을 준다. 탑신의 가장 아래 돌에는 4면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원래 여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성주시 의 어느 논에 있던 것을 여기로 옮겨놓은 것이라는 말도 있다. 정법루와 대웅전은 직선상에 있는데, 이 석탑은 옆으로 비껴 있어 그 위치도 이상하다

(사진 13).

 

사진 13. 다층석탑.

 

청암사를 빛낸 강맥

 

청암사의 원래 당우들은 잦은 재난으로 완전히 소실되었고, 현재 있는 건물은 근대에 들어와 지은 것들이다. 1900년대 초에 극락전과 보광전을 건립하였고, 1940년대에 정법루가 세워졌고, 1976년에 천왕문이 건립되었다. 근래에 지은 중현당重玄堂은 율학승가대학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비구니 스님들이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 젊은 나이에 속세와 인연을 끊고 불법을 찾아 나선 모습들을 상상해 보기만 해도 눈부시다.

 

조선시대 청암사가 불교강원으로서 명성을 얻은 것은 1711년경 당대 화엄학에 정통한 대강백 정혜대사가 선원과 강원을 설립하고 강론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당시 청암사에서 공부한 학인들 은 300여 명에 달했고, 강원으로서의 명성은 지속되어 일제식민지시기에 강백으로 유명했던 박한영朴漢永(1870~1948) 화상이 주석했을 때에도 200명이 넘는 학인들로 넘쳐났으며, 그 맥은 강고봉姜高峰(1901~1967)화상에게로까지 이어졌다. 1987년 의정지형義淨志炯 스님이 비구니승가대학을 설립하면서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는 도량으로서 옛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청암사 이외에 청도 운문사雲門寺, 울주 석남사石南寺, 울진 불영사佛靈寺 등이 니승의 수행사찰로 유명하다.

 

수행자가 불교연구가들과 같을 수는 없고 또 불교연구가들이 수행자로서의 길을 가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불교의 수행에 있어서는 먼저 불교연구가들의 연구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선불교라고 해도 교학불교의 탄탄한 바탕이 없이 ‘종교로서의 불교’를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보인다. 오늘날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를 공부하여 불교의 원래 모습에 가능한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도 보이는데, 텍스트의 비판을 통하여 불교에 관한 논의상의 오류를 바로잡고 국내외의 복잡한 논의들을 평가·정리하는 일부터 해야 불교의 참모습을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책상물림의 생각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청암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그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고, 현재의 당우들도 근대에 신축된 것들이지만, 고승들의 부도들이 있는 부도림에 정혜대사와 제자인 용암채청龍巖彩晴(1692~1754) 화상 등의 부도와 석종형의 부도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적지 않은 고승들이 주석한 사찰임을 짐작할 수 있고, 유학자들의 발걸음도 드문 곳은 아니었던 것 같다.

 

숭정처사 배상룡 선생

 

정구선생과 그의 제자 서사원徐思遠(1550~1615) 선생, 송원기宋遠器(1548~1615)선생, 배상룡裵尙龍(1574~1655) 선생 같은 유학자들도 이 수도산을 즐겨 방문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성주 적산사赤山寺에서 책을 읽고 학문에 정진한 배상룡 선생은 노년에 황폐해진 적산사와 청암사도 자주 찾으며 시를 남기기도 했다. 눈 온 뒤 청암사를 방문했을 때 선계에 온 듯한 시정을 읊기도 했다. 궁극의 진리는 유가, 불가, 도가가 다를 수가 없는 것이었으리라.

 

욕배고민방선산 欲排孤悶訪仙山

의구봉만총호안 依舊峯巒摠好顔

석사신시금운담 石瀉新澌琴韻淡

학장청설옥호한 壑藏晴雪玉壺寒

제천예파향유설 諸天禮罷香猶爇

복지연다흥미란 福地緣多興未闌 

일국파원류세월 一局巴園留歲月

인간차막괴지환 人間且莫怪遲還

 

외롭고 답답한 마음 달래려고 신선 사는 산을 찾아드니

변치 않은 산봉우리마다 좋은 얼굴로 맞아 주네.

바위에 쏟아지는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같이 맑고

골짜기 가득 채운 깨끗한 눈은 옥병처럼 차다.

천신들께 예를 마쳤어도 향은 아직 피어오르고

복된 땅에 많은 인연으로 흥함은 아직 막히지 않았네.

한바탕 신선세계에서 세월 보내고 있으니

사람 세상에 늦게 돌아옴을 괴이하게 생각 마시게.

 

배상룡 선생은 임진왜란 때 68세의 고령에 의병장으로 나서 성주성을 수복한 할아버지 배덕문裵德文(1525~1602), 경상우수사인 아버지 배설裵楔(1551~1599) 등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여 왜군과 싸우기도 했고,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때에도 의병을 일으켜 참전하였다. 65세에 수도산으로 들어와 평생 ‘숭정처사崇禎處士’로 살았다.

 

배덕문 선생의 제자이자 일가인 배현복裵玄福(1552~1592) 선생도 창의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는데, 그때 함께 항전했던 그의 딸도 포로로 잡힌 몸이지만 왜적에게 치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결의로 예동마을 길가 우물에 몸을 던졌다. 성주읍 예산3리 예동노인회관 앞에 지금도 있는 ‘배씨정裵氏井’이라는 우물은 그 비장하던 시절의 일들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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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전 행정자치부 장관. <헌법학 원론> 등 논저 다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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