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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글  /  2019 년 3 월 [통권 제7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66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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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글 | 불교작가

 

 


 

몇 년 만 더 지나가면 오십 줄이다. 불교계에서 장기근속하고 있다. 박봉인 편이지만 그럭저럭 안정적인 직장이다. 주로 글을 써서 먹고 산다. 적당히 노동하고 적당히 인내하다 보면 하루가 저문다. 약속이 있으면 밖에서 한잔하고 없으면 집에서 한잔한다. 한번은 유력 일간지에서 근무하는 아는 기자와 낮술을 했다. 그들의 업종에선 으레 ‘정치’ ‘경제’ ‘산업’ ‘사회’ 순으로 출입처를 선호한댔다. 아무리 ‘적폐청산’입네 ‘포용국가’입네 해도, 천하의 보배는 오랫동안 권력과 자본이었다. 상대적으로 돈 될 일이 적고 ‘배지’ 달기도 힘든 문화부部가 제일 인기가 없고, ‘종교’는 그 가운데서도 최하위로 분류된다.

 

“우물안 개구리와 뱀”

 

알다시피 우리 사회의 경우 개신교가 종교의 주류이며 불교는 아무래도 변두리다. 더구나 개인적으로 스님도 교수도 아니다. 일개 재가불자로서 조용하고 한미하게 살아간다. 이른바 ‘우물 안 개구리’라고 손가락질당하기 딱 좋은 처지다. 자기 회사의 명성을 은근히 자랑하는 그의 말투가 딱 이 꼴이다. 열 살 터울의 한참 손윗사람인지라, 대들지 못하고 언짢은 티를 애써 감추었다. 그냥 속으로만 말한다. ‘우물 안 개구리가 굶어죽을 수는 있을지언정 뱀에게 잡아먹힐 일은 없단다.’ 

 

‘예상수명 계산기’라는 게 인터넷에 떠돈다. 유전과 과거병력, 식습관과 생활습관 등을 토대로 향후 언제까지 생존할 수 있을지 추정해보는 테스트다. 선진국의 대명사인 미국의 보험회사에서 실제로 활용하는 검사란다. 심심풀이로 해봤는데 71세가 나왔다. 서구인들은 만滿 나이를 쓰니, 우리 나이로 환산하면 대략 72~73세일 거다. 한국인 평균수명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얼추 30년은 더 살겠구나…, 솔직히 안도했다. 한숨은 돌렸지만 지락至樂까지는 아니었다. 20대엔 20대만의 고민이 있었고, 30대엔 30대만의 고충이 있었고, 40대엔 40대만의 원한이 있었다. 인생에 크게 바라는 것은 없다. 바라기도 어려운 나이이고, 바랄 수도 없는 신분이다. 강요된 안빈낙도安貧樂道랄까. 실패한 인생이라고 손가락질한다면 그냥 받아들이겠다. 그저 곱게 죽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견습생 시절, 어떤 어른이 장래 희망을 물었을 때 ‘무위도식’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인생의 팔할은 면벽面壁이었다. 달마대사는 서기 5세기 초반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선종禪宗을 일으켰다. 이란 또는 스리랑카 출신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외국생활 초창기에 좀체 적응하지 못했다. 거칠고 이물스럽게 생긴데다가 특히 현지인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가史家들은 “달마가 하루 종일 말없이 벽만 바라보고 앉아있었다”며 “사람들은 그를 ‘벽관壁觀’ 바라문이라고 불렀다(『경덕전등록』)”고 기록했다. 단순히 별명만 지어줬을까. 뒤에서 키득거리며 흉을 봤을 것이다.

 

그리고 홀로 생각하기 좋아하고 그들과 섞이고 싶지도 않았던 달마 입장에선 두문불출한 채 잠자코 지내는 게 최선의 처세였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벽관은 ‘종교적 수행’이라기보다 ‘현실적 자기방어’였을 공산이 크다. 딴에는 열심히 달리고 있지만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학교에서나 군대에서나 나는 특이한 꿈을 꾸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스스로는 불편하고 남들은 비웃게 마련이다. 돌아보면 은근히 힘겨운 삶이었다. 나는 세상이 미워서 세상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있다.

 

 


 

 

다만 버티기에는 꽤 자신이 있는 편이다. 아직까지 무너지거나 배를 곯지는 않는 삶이 그 명백한 증거다. 끝끝내 정년停年 언저리까지는 버티자는 게 아침마다의 소망이다. 어물쩍 은퇴하면 이런저런 연금 받아먹으며 연명하다가, 예상수명 근처의 나이에서 목숨이 끊어지리라는 게 나름의 미래설계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불민한 기대라는 게 최근에 판명됐다. CT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던 의사는 겁을 주었다. 27년을 가까이한 담배 비로소 일을 낼 모양이다. 지난 두어 달은 암이 아니라 항암 때문에 죽고 암이 아니라 암 선고 때문에 아프다는 세설世說을 실감한 시절이다.

 

불심佛心이 깊은 이들은 일정한 기간을 두고 수행정진을 한다. 제일 짧게는 7일부터 21일 100일 1000일까지 다양하다. 절에서는 야심차게 만일결사萬日結社를 벌이기도 하는데, 그게 대략 27년쯤 걸린다. 누군가 1만일 동안 자신이나 세상을 위해 기도를 할 때, 나는 만일동안 나를 조금씩 죽여 온 셈이다. 의사들이 나를 가운데에 놓고 둥글게 서서 호되게 꾸짖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그만큼 심적으로 힘들지 않았겠느냐’, ‘그냥 피우기만 한 건 아니고 그거에 기대서 이거저거 많이 썼다.’ ‘끊어보려고 무진장 노력하기는 했다’… 계속 항변하지만 소용없다. 하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어차피 입이 서너 개쯤 있다고 해서, 목숨이 한두 개쯤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남의 잘못에만 끙끙 앓다가 내 잘못은 쉽게 지나쳐버렸다.

 

끝내는 폐결핵인 것으로 확진이 났다. 수술을 할 필요는 없고 대략 6개월 정도 약을 먹으면 낫는단다. 무리한 체중감량, 하루도 빼먹지 않은 폭음, 극심한 스트레스가 질병의 원인으로 보인다. 여하튼 삶에 특별한 미련은 없는데, 막상 얼마 못 가 죽을 수도 있다 하니 이게 또 마장魔障이다. 공포와 절망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당장은 죽을병이 아니라니 한결 차분해지긴 했다. 짐짓 초연해지기도 한다. 이승을 의미하는 사바沙婆 세계는 산스크리트 ‘사하Saha’에서 발음을 따왔다. 의역하면 감인토堪忍土. 곧 견디고 참아야 하는 땅이라는 뜻이다. 사바 위에서는 누구나 탐진치 삼독三毒의 번뇌를 견뎌야 하고 오온五蘊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참으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사바세계란 본질적으로 복이 아니라 벌을 받으러 오는 곳이다. 나무가 뭘 잘못해서 비바람에 시달리는 건 아니다. 그냥 거기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적 직장인이다”

 

윌 듀런트Will Durant가 쓴 『철학이야기』를 고2 때 읽었다. 철학과에 가야겠다는 막연하고 무모한 결심에 제법 영향을 준 책이다. 듀런트 사후 30년이 지나서 『노년에 대하여』라는 유작이 출간됐다. “사람은 정점에 서 있을 때 죽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는 구절로 시작된다. 내 인생에 정점이 언제 올는지, 아예 안 올는지, 이미 왔었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어쩌면 노년조차 기대하지 못할 운명일 수 있다.


10년 전에 낸 책의 서문에 “너무 오래 살았다는 생각. 술은 원 없이 마셔봤고 세상일은 전부 우습다.”고 썼었다. 지금의 병고는 그때의 젊음을 방만하게 흘려보낸 업보이리라. 과거에는 치기 어린 마음으로 죽음을 상상했다면, 이제는 약간이나마 진지해진 마음으로 죽음을 사고하고 있다. 코앞까지 왔던 죽음은 크게 힘을 잃었으나 그리 멀리 가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화병과 따돌림을 자초하면서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던 존재론이다. 억지로 주어진 인생 또 다시 언젠가 강제로 빼앗기게 될 것이라면, 개평이라도 최대한 받아내야겠다. 내게는 글줄깨나 바득바득 써내면서 어설프든 강렬하든 인생의 의미에 대한 공감을 끌어내는 일이 그렇다. 일천한 나에게도, 육신은 유한하되 법신法身은 영원한 것이다. 쇠똥구리가 그저 똥 냄새나 맡자고 그토록 힘들게 똥을 굴리겠는가. 나는 철학적 직장인이다.

 

나다니기도 싫어하고 연애와도 거리가 먼 낫살이다. 그래서인지 영화관에 가지 않은지 10년이 됐다. 케이블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면 가끔 유익한 영화가 얻어걸리기도 하는데, 근자에는 ‘루시(2014)’가 퍽 인상 깊었다. 보통 인간이 10%만 쓰고 죽는다는 뇌를 100% 쓸 수 있게 된 여성의 초인적인 무용담을 줄거리로 삼았다. 작품의 결론에서 감독이 전하려던 교훈은 생명의 궁극적 목표는 ‘전승傳承’이라는 것이었다. 세포분열을 하든 암수교미를 하든, 모든 개체는 자신이 획득한 지식과 경험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려는 본능을 갖는다는 것.

 

그리하여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덜 괴롭고 덜 방황하도록 만들어주고 싶어 한다는 것. 이 와중에 『조주록』을 꺼낸다. 마음 다스리는 데는 최강이다. 조주는 생사의 무거운 굴레를 무슨 시골의 물레방아쯤으로 여길줄 알던 인물이었다. 여하튼 살아가는 동안은, 어떻게든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다만 한 줄 읽고 한 줄 쓰면서 조금은 더 단단해지고 초연해지기를. 언제든 죽어도 좋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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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글
곰글 1975년생. 연세대 철학과 졸엄.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9권의 불서佛書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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