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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꼰대와 설청전수說聽全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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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9 년 3 월 [통권 제7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45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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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불교학자

 

요즘 젊은이들이 잘 쓰는 말 중에 꼰대라는 말이 있다. 지위가 높거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잔소리하고 가르치려 드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비하하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이 말에는 사회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꼰대라는 말은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 가르치는 사람과 따라야할 사람이라는 차별적 인식이 낳은 폐단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꼰대의 차별과 설청전수의 평등

 

그렇다면 정말 나이가 많은 것만으로 지혜롭고 젊은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아마 농경사회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지혜는 어른들의 경험과 지혜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지식기반 사회에서는 나이와 연륜이 곧 풍부한 지식이나 지혜로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대에 와서는 나이 든 사람들은 세상을 움직이는 첨단의 지식과 시대적 흐름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더 많다.

 

 

캄보디아 바이욘 사원의 관세음보살상

 

 

세상이 이렇게 달라졌는데도 나이가 많다거나 지위가 높다는 이유로 훈계하고, 권위를 세우려는 사람에게 젊은이들이 붙인 꼬리표가 꼰대라는 말이다. 소위 꼰대로 불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더 많은 경륜과 지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이 많고 지위가 높으면 훈계할 수 있는 사람, 젊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순종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비단 꼰대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꼰대의 역할을 하는 설자說者는 종교지도자가 될 수 있고, 누군가를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주로 설자說者의 역할을 맡는다. 반면 듣는 자는 설법이나 강론을 듣는 평신도, 가르침을 받는 학생 등 설자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이 든 사람과 젊은이, 종교 지도자와 신도,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불가역적으로 고정된 것은 아니다. 특정 영역에 있어서는 가르치는 자가 우월할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가르치는 자가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

 

따라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라는 구별은 고정불변의 관계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보면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는 동등하며, 이 둘의 관계가 오히려 역전되기도 한다. 이처럼 설자와 청자의 권위적 관계를 해체하고 존재의 평등성을 설파하는 교설이 화엄의 ‘설청전수說聽全收’라는 가르침이다. 모든 경전에서 설하는 주체는 마땅히 부처님이고, 듣는 객체는 중생이다. 그런 관계를 놓고 본다면 불교에서 설자는 부처님이고 청자는 중생이다. 여기서 설자에게 모든 권위와 무게가 실리고 청자는 수동적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런데 설청전수는 ‘설하는 자와 듣는 자를 모두 거두어 들인다’고 한다.

 

‘설함[설說]’과 ‘들음[청聽]’이라는 행위에서 설함이란 주체적 행위자인 능能을 말하고, 들음이란 수동적 행위자인 소所를 의미한다. 따라서 능能은 곧 본체[체體]가 되고, 소所는 작용[용用]이라는 관계가 성립된다. 결국 ‘설함과 들음을 모두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설과 청, 체와 용, 능과 소가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즉상입相卽相入하고 상호 전환되는 관계임을 말하는 것이다. 현수법장은 설청전수의 이런 이치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네 가지 범주로 설명한다.

 

첫째 삼라만상은 모두 부처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부처님의 마음이므로 ‘부처님의 마음을 떠나 밖에서 교화할 중생이란 없다[이불심외離佛心外 무소화중생無所化衆生].’ 교화할 중생이 따로 없기 때문에 설할 가르침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화엄의 눈으로 보면 일체 모든 것은 부처님의 마음이 드러난 것[불심소현佛心所現]이다. 무엇 하나 부처님의 마음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부처님의 마음이라면 그 모든 것들은 부처와 중생이라는 이원적 차별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부처님의 마음 밖에 교화해야할 중생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은 중생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생의 눈에 비친 차별상일 뿐이다. 설청전수의 가르침은 그와 같은 차별상을 넘어서 본질을 꿰뚫는 안목이다.

 

부처님의 마음과 중생의 마음이 다르지 않다

 

부처님의 마음 밖에 중생이 따로 없으므로 모든 중생은 부처님의 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진리를 설하는 부처님이 따로 있고, 진리를 듣는 중생이 따로 존재하는 이원적 차별상은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진리를 설하는 부처와 진리를 듣는 중생이라는 상하관계는 해체된다. 설하는 것도 부처님의 마음이고, 듣는 것도 부처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태생이 선생님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학생의 신분으로 있을 때 배움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선생이 탄생한다. 따라서 배우는 학생이 없다면 가르치는 선생도 없고, 학생의 배움이 없다면 선생도 없다. 나아가 배움은 선생님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음으로 선생님과 학생은 둘이 될 수 없다.

 

둘째, 중생을 완전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모든 것이 부처님의 마음이 드러난 것이라면 중생은 더 이상 중생이 아니다. 그래서 법장은 “중생의 마음을 떠나서 달리 부처님의 덕이 없다[이중생심離衆生心 무별불덕無別佛德]. 일체 만법은 중생의 마음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중생심중衆生心中].”고 했다. 첫 번째에서는 모든 것은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했지만 여기서는 모든 것이 중생의 마음 가운데 있다고 한다. 선생과 학생의 관계에서 보면 어떻게 될까? 세상의 모든 선생은 사실 학생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선생님은 없었기 때문이다. 학생의 마음, 학생의 배움에 의해 선생님이라는 자질이 육성되고, 학생의 배움을 통해 선생님의 덕성이 갖추어졌다. 이렇게 보면 배우고자 하는 학생의 마음[衆生心]에 의해 모든 배움은 완성되고, 학생의 마음에 의해 모든 선생님의 덕성이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학생의 마음을 떠나서 선생의 자질과 덕성은 탄생할 수 없다.

 

셋째, 부처와 중생을 모두 긍정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첫 번째는 모든 것이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했고, 두 번째는 전체가 중생의 마음이라고 했다. 서로 모순되는 두 진술 중에 어느 것이 참일까? 설청전수의 세 번째 명제는 그 둘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선언함으로써 모두를 긍정한다. 중생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므로 중생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이 다를 수 없다. 그래서 법장은 “중생의 마음 안에 있는 부처님[중생심내불衆生心內佛]이 부처님의 마음 안에 있는 중생[불심중중생佛心中衆生]을 위하여 설법하고, 부처님의 마음 안에 있는 중생[불심중중생佛心中衆生]이 중생의 마음 안에 있는 부처님[중생심불衆生心佛]의 설법을 듣는다.”고 했다.

 

중생의 마음 안에 있는 부처님이 부처님의 마음 안에 있는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고, 부처님의 마음 안에 있는 중생이 중생의 마음 안에 있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겉모습이 부처이니까 무슨 소리를 해도 다 거룩한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겉모습이 중생이라고 해서 무슨 소리를 해도 다 번뇌에 오염된 잡소리는 아니다. 비록 겉모습이 부처일지라도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소리를 한다면 중생일 뿐이다. 반대로 겉모습이 중생일지라도 바른 진리를 말한다면 그것이 곧 부처님의 설법이다. 따라서 겉모습이 부처냐 중생이냐가 아니라 그 마음이 부처냐 중생이냐에 따라 부처와 중생이 결정되며, 설하는 내용에 따라서 부처와 중생이 결정된다. ‘자성에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고, 자성을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라는 『단경』의 가르침도 이런 맥락의 가르침이다.

 

모두 긍정하고 모두 부정하기

 

마찬가지로 지체 높고, 많이 배운 교수나 선생이 하는 말이라고 해서 다 참은 아니다. 그들의 마음이 오염되어 있다면 그 말이 아무리 품위 있고 고상해도 사악한 언어일 뿐이다. 반대로 비록 못 배우고, 허드렛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순수하고 바르다면 그 표현이 거칠고 말이 어눌해도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따라 부처와 중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마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금강경』에도 32상이라는 외형적 특성으로 부처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겉으로 드러난 형상으로 부처를 보고자 하거나, 품위 있고 세련된 목소리로 부처를 찾는다면 오히려 삿된 도를 신봉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난 차별상을 전복함으로써 부처와 중생을 평등하게 긍정하는 것이 설청전수의 세 번째 가르침이다.

 

넷째, 부처와 중생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부처라는 모습을 떠나 있고, 중생이 중생이라는 상을 떠나 있다면 부처님은 부처가 아니며, 중생도 더 이상 중생이 아니다. 그래서 법장은 “부처님의 마음을 가진 중생[불심중생佛心衆生]이어서 설법을 듣는 자가 없기 때문이며, 중생의 마음을 가진 부처님[중생심불衆生心佛]이어서 설법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성스러운 가르침에는 부처와 중생이라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다[구비이심俱非二心]. 따라서 부처는 부처의 특성이 박탈되고, 중생은 중생이라는 특성이 박탈된다. 이렇게 부처와 중생이라는 분별적 형상이 사라지면 부처는 더 이상 부처가 아니고, 중생도 더 이상 중생이 아니다. 결국 부처와 중생이라는 차별상은 사라지고 만다. 중생이라지만 부처님의 마음[중생심불佛心衆生]을 가진 중생이므로 굳이 다른 부처에게 법을 들을 것이 없다. 여기서 부처에게 법을 듣는 중생이라는 차별적 위상도 사라진다.

 

부처라지만 중생의 마음에 있는 부처[중생심불衆生心佛]이므로 법을 설하는 부처는 사라지며, 법을 설하는 자도 없어진다. 이처럼 중생이 중생이 아니므로 중생이 사라지고, 부처가 부처가 아니므로 부처도 사라진다. 부처와 중생이라는 차별적 양변兩邊이 모두 사라지고, 부처와 중생이라는 외형적 특성이 모두 해체 되는 것이다.

 

설청전수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하면 나이가 많거나 지위가 높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꼰대 짓을 할 수 없다. 부처와 중생마저 평등한데 사소한 경험과 지식이 차별의 이유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설청전수는 설자와 청자라는 차별적 개념을 전복하고 존재의 평등성을 드러내는 가르침이자, 차별에 사로잡힌 중생의 인식을 치유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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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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