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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톺아보는 불상의 미학]
누가 미륵하생을 경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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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련  /  2023 년 7 월 [통권 제123호]  /     /  작성일23-07-04 10:58  /   조회2,40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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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서 사유관을 수행하여 도솔천에 상생한 승려를 살펴보았다. 현장(602~664)은 입적 후 도솔천에 상생하여 말법시기에 미륵과 함께 예토(염부제)에 하생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는 보리심 대승심을 발휘해야 갈 수 있는 극락왕생을 하지 않고, 도솔천에 왕생하였다. 그는 왜 미륵과 함께 예토에 하생하기를 원했을까? 

 

말법시대와 수행

 

남악대사 혜사(515~577)가 말한 말법시대는 434년이다. 그는 말법 82년 을미(515년)에 태어났다고 기록하였다. 혜사 생전에 말법은 더 이상 생소한 용어가 아니었고, 그는 스스로 말법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상상한 미륵이 하생한 예토穢土의 모습은 삼악도가 없는 청정무후의 세계이다. 인간은 더 이상 짝짓기를 하지 않고 홀연히 화생化生하고 천류天類와 동일하며 그 모습은 석가모니 세존과 같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혜사가 입적한 후 수행자들은 어떻게 말법시대를 대비하고 있었을까?(사진1)

 

사진 1. 단석산 신선사 미륵하생불 도상.

 

수나라(581~619)의 신행信行(540~594)은 불교를 삼단계로 나누어 삼계교三階敎를 개창하였다. 정법은 제1계階, 상법은 제2계, 말법은 제3계라고 주장하고, 말법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신행은 불법을 비판하기보다 보경보행普敬普行의 현실적인 실천수행을 강조하였다. 그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길에서 만나는 도속 남녀노소를 모두 당래불로 간주하여 예배하였다.

 

이와 같은 남악대사 혜사와 신행의 불교는 남북조 시기와 수나라의 어지러운 사회현상과 승려 법란(『고경』 제122호 참조) 등이 말법시기의 필연적 사회혼란이라고 보았다. 반면 말법시기를 대비하는 또 다른 이들이 담란(476~542)의 영향을 받은 도작道綽(562~645)과 선도善導(613~681)이다. 이들은 참회와 염불을 강조하여 동아시아 정토종의 싹을 틔웠다.

 

도작은 말법시대가 도래하면 오로지 아미타불에 귀의하여 정토왕생만이 유일한 구원이라고 하였다. 정토종 개조 담란은 불교수행의 길을 난행(참선과 보살도)과 이행(칭명염불)으로 나누고, 난행은 중생이 스스로 이루기 어려운 수행이니, 범부는 이행을 따르며 일심으로 아미타불 명호를 부르며 염불하면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미륵신앙 수행자는 사유관 수행을 하며 도솔천 상생을 서원하고, 현장과 그 외 승려들처럼 자력으로 도솔천에 상생하였다. 이와 같은 사유관 수행법은 미륵이 도솔천 사자좌에 상생하는 모습을 관하는 관불수행과 미륵명호를 부르는 염불수행이므로 아미타신앙의 수행법-난행과 이행법과 같다. 다만 아미타신앙은 수행을 통하여 정토에 왕생하는 것이고, 미륵신앙은 미래세에 미륵이 예토에 하생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상생경』에서 미륵하생 신앙을 언급하였다.

 

“석가모니가 우팔리에게 말한다. (모두) 명심해서 들어라. 미륵보살은 모든 중생들의 피난처가 될 것이다. 미륵을 믿는 자는 최고의 진리인 불퇴전 법륜을 깨닫게 된다. (미륵이 염부제에 하생하여) 미륵이 깨달음에 이르고 여래가 될 때 (용화삼회) 광명을 경험하면 제자들은 모두 수기를 받게 될 것이다.”(주1)

 

말하자면 자력으로 도솔천 상생이 가능한 승려들 외에 아직 선업 공덕이 부족한 수행자들은 미륵이 하생하는 예토에서 사유관 수행을 하며 선업 공덕을 쌓으면 미래세에 이르러 미륵에게 수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가섭존자와 미륵

 

다음은 미륵이 하생하고 성불하여 대중을 이끌고 만나는 대가섭존자의 역할을 살펴보자. 그는 석가모니의 법이 다하는 말법시기까지 미륵을 기다리며 열반에 들지 않고 있다.

 

『미륵하생성불경』에 따르면 미륵은 부모가 브라만 계급이며 석가모니처럼 범마월의 겨드랑이에서 태어난다. 그는 금보랏빛을 띠고 부처의 32상호를 갖추었다. 성장하면서 중생들이 다섯 가지 욕구 때문에 고통 받는 모습을 보고 중생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낀다. 미륵은 속세에서 고통, 공, 무상을 깨닫고 승려가 되어 금강장엄도량의 용화수 아래에 앉는다. 이윽고 미륵은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고 그를 따르는 대중을 이끌고 가섭존자를 찾아 계족산에 오른다.

 

사진 2. 단석산 신선사 대가섭존자 도상. 

 

대가섭존자摩訶迦葉(?~기원전 905)는 아라한과를 증득한 성문승이다(사진 2). 그는 석가모니 세존의 제자 중에서 두타제일頭陀第一이었다. ‘두타(dhuta)’의 뜻은 “흔들어 떨어버린다”, 즉 번뇌를 떨어내기 위한 수행을 말한다. 두타행이란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고 이러한 계율을 바탕으로 선정禪定이 이루어지고 선정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는 지혜를 얻게 된다. 여기서 생긴 지혜는 무생법인無生法忍으로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아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무루無漏를 말한다. 

『불설미륵하생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때 세존은 가섭에게 말하기를, 난 올해 80여 세이므로 노쇠하였다. 그러나 지금 나에겐 4대 성문이 있다. 이들의 지혜와 깨달음은 중생을 교화할 만하다. (이들은) 끝도 없는 지혜와 모든 덕을 갖추었다. 이들 4대 성문은 대가섭비구, 도발탄비구, 빈두로비구, 라운(라후라)비구이다. (세존은 말하길) 너희들 4대 성문은 열반에 (미리) 들어서는 안 되고 나의 법이 다하는 말법시기에 열반에 들어야 한다.

 

대가섭이 열반에 들면 안 되는 이유는 미륵이 출현하여 교화한 제자들은 모두 나(석가)의 제자이다. 내가 (미래세에 그들의) 번뇌가 다하고 (미륵이) 교화할 수 있도록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대가섭은 마갈국계 비제촌 안에 있는 저산(계족산) 중에 머물고 있다. 미륵이 장차 수천 대중을 이끌고 저산에 이르러 주위를 에워 쌓으며 부처님의 은혜를 입는다. 여러 귀신들이 문을 열어 가섭의 선굴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주2)

 

그렇다면 미륵은 왜 대가섭존자를 만나러 가는 것일까?

『교외별전教外別傳』 2권 서천조사일조마하가섭존자西天祖師一祖摩訶迦葉尊者를 보면 대가섭존자는 미륵에게 석가모니의 가사(승가리)를 전달하고자 계족산에서 멸진정에 들어갔다. 

 

경주 단석산 대가섭존자 도상

 

필자는 경주에 위치한 단석산 신선사 암벽에 부조된 마애불이 미륵하생불이며, 단석산은 미륵이 성불한 후 대가섭존자를 찾아간 계족산이라 추측한다.(주3) 경주 단석산 산 정상의 신선사에는 거대한 4개의 암벽이 ㄷ자형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사진 3). 동쪽 암벽에는 정병을 든 높이 5.45m 마애상 1구(사진 4)가 있고, 북쪽 암벽은 두 개로 나뉘어져 있으며 그중 한 벽에 높이 6.5m(두광을 포함 7m)의 미륵하생불(사진1) 도상이 있다. 또 다른 북쪽 암벽에는 반가상을 포함한 5구의 마애불상군과 2구의 공양자상이 부조되어 있다. 북쪽 암벽이 2개의 돌로 이루어진 것은 미륵이 성불하고 석가모니의 승가리를 받기 위해 대중들과 함께 계족산에 오르자 “여러 귀신들이 문을 열어 가섭의 선굴을 볼 수 있게 한다.”는 경전 문구에 해당한다.

 

사진 3. 단석산 신선사 북벽, 동벽, 남벽 전개도.

 

남쪽 암벽의 높이는 4.35m이고 마애상의 높이는 3.8m이다. 암벽이 탈락되어 확실치는 않으나 육안으로 보아도 동벽의 마애상보다 작고 초라하며 상호에 주름이 있는 노인상이다. 그는 미륵하생불과 오른쪽 사선으로 마주보고 있는 부조상이며 연화좌 위의 입상이다(사진2). 

 

노인부조상은 연화문 두광이 부분적으로 보이고 육계가 없으며 상호 부분 암벽의 탈락이 심하다. 오른손은 가슴 위에, 왼손은 복부에 놓여 있다. 온몸을 감싸 안은 통견가사는 희미하고 왼손 팔목에 가사 끝자락이 표현되어 북위 양식이 남아 있다.

필자는 신선사 남벽 노인상을 미륵이 하생한 후 멸진정에서 깨어나 미륵과 그를 따르는 무리를 맞이하는 ‘대가섭존자’ 도상으로 해석하였다.(주4)

『불설미륵대성불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때 범왕이 하늘의 향유를 지녀 대가섭의 정수리에 쏟아 부었다. 그의 몸에 향유가 흐르고 건추(주5)를 치고 나팔을 부니 대가섭은 즉시 멸진정에서 깨어났다. 그는 단정하게 편단우견으로 법의를 가다듬고 오른 무릎을 꿇고 몸을 세워 합장하였다. 대가섭은 미륵에게 석가모니의 승가리를 주면서 큰 스승 석가모니 여래 응공 정변지께서 열반에 이르렀을 때 그의 법의를 나에게 내리시며 (미륵)세존께 바치길 명하셨습니다.”(주6)

 

사진 4. 단석산 신선사 남벽 정병을 든 마애상과 북벽 대가섭존자 도상.

 

단석산 북벽 미륵하생불과 오른쪽 사선으로 마주보고 있는 대가섭존자는 왜 미륵의 오른쪽에 서 있을까?

『불설미륵대성불경』을 보면 미륵이 낭적산(계족산)에 올라 작고 초라한 노인을 보고 진심으로 경배하자, 함께 온 대중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곧 미륵은 오른손을 들어 그를 가리키며[彌勒申右手指示迦葉] “저분은 과거 오랫동안 석가모니 제자 가섭이며 지금 현재까지 두타고행의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 함께한 대중들은 가섭의 현신을 보고 더러움이 없어지는 청정법안을 얻었다. 또한 몇몇 중생은 미륵의 최초법회가 되어 96억 대중이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었다.(주7)

 

사진 5. 묘만지소장 미륵하생변상도 부분. 대가섭존자(동그라미).

 

즉 대가섭존자는 두타제일의 석가모니 제자이며 더 이상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무루혜를 증득하였지만, 미륵신앙 수행자들은 여전히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둘의 상관관계는 ‘번뇌를 이미 떨어내다’와 ‘아직 번뇌를 벗어나지 못했다’이다. 그렇다면 성문승 대가섭존자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는 석가모니의 제자이고, 예토에서 미륵을 기다리는 보살행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미륵신앙 수행자들은 대가섭존자의 현신을 경험하지만 그를 미처 알아보지 못하였다. 미륵이 대가섭존자의 공덕을 칭송하는 손짓을 하자 미륵을 따르는 수행자들은 대가섭존자가 보살행을 수행하면서 어떤 고통과 어려움을 감내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단석산 미륵삼존불은 대가섭존자가 미륵하생불을 중심으로 그의 오른편에 서 있다. 이는 그가 항상 석가모니 세존의 왼편에 서 있는 것(『고경』 제122호 맥적산 삼존불 사진3 참조)과 분명히 다르다. 미륵이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가리킨 대가섭존자의 위치 규정은, 불교미술에서 대가섭존자의 위치를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 석가모니의 불법승계를 위하여 석가모니→대가섭→미륵으로 이어지는 삼세불의 시간적 관계를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사진 6. 치온인소장 미륵하생변상도 부분. 대가섭존자(동그라미).

 

이러한 미륵하생불 본존불과 그의 오른쪽에 대가섭존자가 자리하는 위치 규정은 1294년 제작된 일본 묘만지妙滿寺(사진 5) 소장 미륵하생변상도와 14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치온인知恩院(사진 6) 소장 변상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묘만지 변상도의 상단 중앙에 미륵하생불이 바드라사나 자세로 앉아 있고, 그의 오른편에 대가섭존자가 석가모니 세존의 발우와 승가리를 들고 있다. 치온인 변상도의 대가섭존자도 미륵하생불의 오른편에 위치하며, 묘만지 변상도보다 밝은 색을 입힌 발우와 승가리를 두 손에 들고 있다.

 

그렇다면 미륵하생불의 왼편은 누가 자리하는가? 이는 다음 호에서 단석산 신선사 남벽 마애상의 도상분석과 함께 위에서 언급한 묘만지와 치온인 미륵하생변상도에서 밝히고자 한다.

 

 

<각주>

(주1) T14/420b15-20.

(주2) T14/453/422b13-21.

(주3) 「단석산 미륵삼존불 도상 재고」, 『신라사학보 29』, 422쪽. 

(주4) 「단석산 미륵삼존불 도상 재고」, 『신라사학보 29』, 426쪽.

(주5) 인도의 악기이며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범종의 기원으로 본다.

(주6) T14/456/433b15-21.

(주7) T14/456/433b22-c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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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련
Prof. Heyryun Koh.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학교박물관에서 발굴한 도자기 등 유물을 분류하고 사진작업을 하다가 독일유학을 갔다. 독일에서 장학금을 받고 석사논문 자료수집을 하며 항주대학(현 절강대학) 대학원과정을 수료하였다. 함부르크대학에서 예술사학 석사학위를 받고,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예술사학과 중국학 복수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후 뮌헨대학(LMU) 중국학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하였으며, 2007년 한국에 귀국하였다. 2017년 5월 하이델베르크대학 연구년으로 나가기 전까지 부산대와 단국대학교에 재직하였다. 현재 뷔르츠부르크대학 동아시아학과 한국학 교수(국제교류재단 파견교수)로 재직 중이다.
herionko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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