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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해인사 강원 입학 통도사 강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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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순  /  2023 년 9 월 [통권 제125호]  /     /  작성일23-09-04 20:55  /   조회1,00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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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13 | 인환스님 ⑨

 

▶ 정화가 일단락되고 불교계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서울 조계사에서 정화운동을 지원하고 다시 부산 선암사로 돌아와 평소처럼 지내던 어느 날 석암 노장님이 나하고 혜엄慧嚴스님을 불러요. 혜엄스님은 향곡스님의 상좌인데, 출가 전에 경험도 많고 아주 똑똑한 사람이에요. 나중에 철정스님으로 법명을 바꿨어요.

 

선禪을 했으니 교敎를 하라

 

석암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제 종단정화가 이루어져 절의 주지는 모두 비구승들이 맡게 되었다. 앞으로 젊은 사람들이 종단을 짊어지고 가야 되는데, 그렇다면 적재적소에 인재가 필요하다. 젊었을 때 공부하고 익혀서 그 나름대로 각 분야에서 역할을 해야 한다. 불법 문중에 ‘불사일물不捨一物’이라고, 하나도 버릴 것이 없어. 다 해야 돼. 젊은 사람들이 걸머져야 돼. 그러니까 너희가 이제까지 선방에서 열심히 정진했으니, 해인사 강원에 들어가서 더욱 열심히 공부해라. 아무나 다 가라고 하는 게 아니다. 이제 선禪을 해도 교敎의 바탕이 든든해야 되고, 또 교를 하는 이도 문자로만 해 가지고는 안 되고 실제 정진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너희 둘이 몇 년 동안 선방에서 열심히 정진했으니 이제는 교학을 익혀라. 내일 당장 짐을 꾸려서 해인사로 가거라.” 

 

사진 1. 해인사 주지 자운스님(좌) 총무 영암스님.

 

노장님은 또 자운스님이 해인사 주지로 갈 것이며, 영암스님을 총무로, 그리고 진주에 피난 가 계시던 운허耘虛스님을 모셔다가 비구승 강원을 새로 시작할 계획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종단의 앞일을 깊이 생각하고 앞서가는 안목이 없으면 못하는 말씀입니다. 1955년 겨울 결제 들어가기 일주일 전의 일입니다. 다른 이들은 서로 좋은 절 차지하려는 판에 참 대단하지요. 석암스님을 계사로, 법사로 모시게 된 나는 참으로 좋은 인연을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 정화 직후라 비구스님들의 숫자가 적었겠군요?

 

나는 일찍이 할아버지께 한문을 배웠어요. 그 덕분에 선암사 있을 때도 대장경과 빈가장경頻伽藏經으로 율장도 보고 여러 가지 공부를 좀 했지요. 그래서 『치문』, 『사집』, 『서장』, 『선요』, 『도서』 등을 1년 만에 거의 다 봤어요. 2년 째 사교과에 올라가 『능엄경』을 배웠어요. 본래 강원에서 공부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자습하는 게 근본입니다.

 

그 당시 해인사 강원에 7~80명의 학인들이 있었어요. 각자 능력에 따라서 치문반 혹은 사집반, 사교반 그 다음에 대교반 이렇게 나눠져요. 강원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니 윗반은 별로 없었고, 나는 2년 째 사교과에서 『능엄경』을 배우는데, 그때 운허스님께서 전통적으로 공부하는 방법을 대폭 개선했어요. 능엄반 또는 능엄패라고도 하는데, 한 10명쯤 됐어요. 내일 배울 내용을 각기 예습하는데 사전 찾아가면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묘엄·명성스님과 함께 운허스님의 논강을 듣다

 

9시에 강의를 시작하는 종을 치면 학인들이 큰 방에 모여 상강례라고 강의를 시작하는 예불을 모시게 됩니다. 상강례는 법당예불하고는 좀 다릅니다. 큰 방에 능엄패 10여 명이 둘러앉습니다. 대나무 통에 산까치가 든 통을 흔들어서 그날 중강重講, 발의發議를 맡을 사람을 제비뽑아요. 발의가 된 사람은 어제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한 내용을 세미나 형식으로 발표합니다. 한문으로 된 문장을 새겨가면서 그 뜻을 얘기합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이건 잘 모르겠습니다.” 말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이런저런 의견을 내서 이런 거 아니냐, 저런 거 아니냐 하면서 토론하다가 모두가 동의하면 그걸로 해결됩니다.

 

사진 2. 해인사 궁현당(강원), 2017.

 

▶ 요즘 대학원 토론방식보다 앞선 것 같습니다.

해결이 안 될 때는 중강이 그 부분을 체크하여 토론하고 또 의견을 모아 갑니다. 이런 공부 방법을 논강論講이라고 합니다. 논강이 치열하게 진행될 때도 있어요. 서로 의견이 안 맞고 자기주장이 옳다고 혈기가 왕성한 사람들이 모였으니, 이러다가 시비가 붙기도 하지요. 밀고 당기고 하다가 나중에는 드물게 보는 일이지만 목침이 날아가는 일도 있었어요. 그만큼 열성 있게 연구하고, 발표하고, 토론하고 그랬다는 증거란 말이지요.

 

논강을 마치면 운허스님은 흑판 강의를 했어요. 해인사의 궁현당이라는 큰 방이 있었어요. 5~6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크기였지요. 강의에서 스님은 『능엄경』에 대해 당신이 평생 쌓은 지식과 지혜를 모자람 없이 내놔요. 나는 매일 오전 한 시간 반 정도 아주 제대로 배웠습니다. 그렇게 1년 동안에 네 개를 배웠어요. 『능엄경』, 『대승기신론』, 『금강경』, 『원각경』인데, 그때 봉녕사 묘엄스님, 운문사 명성스님 등과 함께 강의를 들었어요.

 

뱃심을 기르는 파겁破怯

 

▶ 해인사에서 있었던 또 다른 일화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해인사 강원 첫 해에 나는 노전 소임을 받았어요. 노전패는 나와 종현스님, 태연스님이었어요. 큰법당과 팔만대장경각을 책임 맡아요. 여타의 작은 법당 맡은 이는 부전이라고 합니다. 관음전은 입구[口]자 모양인데 큰방 끝에 운허스님과 변월주邊月舟 스님이 계셨어요. 변월주스님은 대처스님 시절부터 계시던 노장 강사인데 당시 유명한 강사였어요. 

 

사진 3. 봉암 변월주 스님(가운데). 1954년 해인사 법보학원 『능엄경』 수료기념. 

 

그 안쪽에 총무인 영암스님 방이 있었고, 큰방에 일부 학인들이 있었어요. 우리는 별도로 노전채에 머물렀어요. 가끔씩 중고등학교 수학여행단이 왔어요. 수백 명씩 단체로 오는데 이들을 안내하는 역할이 노전의 몫입니다. 그때에는 박물관, 보물장 이런 게 따로 없었어요. 큰법당(대적광전) 수미단 탱화 뒤쪽에 상당히 넓은 공간이 있었어요. 여기에 해인사 보물을 가져다 진열해서 보여주었지요. 그 다음에는 팔만대장경각, 보통 때는 밖에서 경판고를 돌면서 보여주는데 특수한 경우에는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 보여주는 경우도 있었어요.

 

사진 4. 해인사 장경고(조선고적도보, 1933).

 

파겁破怯이라는 말이 있어요. 대중 앞에 나서기 위해 겁을 없애는 뱃심을 기르는 겁니다. 학인들 누구나 차례로 한 달마다 법상을 만들어서 설법하는 연습을 시켰어요. 모두 가사 장삼을 입는데, 산중의 노장스님들도 가끔 동참하지요. 이때 강원의 대중이 청중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무섭고 떨릴 수가 없어요. 쟁쟁한 노장들이 떡하니 쳐다보고 있으니까요.

 

사진 5. 해인사 축구장.

 

그때 한 학인이 절 뒷방에 나이 많은 스승을 모시고 시봉하면서 강원 공부를 했는데, 어느 날 자기 차례가 왔어요. 날짜는 다가오고 떨리기만 하는 거예요. 스승이 일러주기를, “앞에 앉은 사람들을 모두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라.”는 겁니다. 막상 올라가서 입을 열려고 하니까 눈앞이 캄캄해지고 가슴은 덜렁덜렁 떨렸지요. 그 순간 스승이 한 말씀이 생각났어요. 그래서 “앞에 있는 사람들은 다 내 아들이다!”라고 외쳤다는 겁니다, 하하하. 나 역시도 차제법문에는 많이 떨리더라구요. 그러나 여러 번 하다 보니까 뱃심이 생겨요. 평생 지내오면서 많은 법문도 하고 강의도 했는데, 이런 경험의 바탕에는 해인사 학인 2년 반이 큰 도움 됐지요.

 

화마를 막는 소금단지 묻기

 

▶ 대중설법 연습을 강원에서 하셨군요?

 

해인사 살림살이를 도맡아하는 이가 영암스님이었어요. 산을 지키기 위해 산감山監을 몇 명씩 따로 월급 주고 뒀어요. 또 학인들 가운데 공부 시간 이외에는 산에 나가서 감시하는 일도 맡았어요. 동네 사람들이 나무를 베다가 들키면 야단치기도 하지만, 해놓은 나무는 다 몰수하고, 심하면 지게까지 부셔요. 격투가 벌어지기도 하고, 원한을 품고 절을 애 먹일라고 일부러 불을 지르는 사람들이 겨울에 자주 있었어요. 

 

언제 불이 날지 모르거든요. 산에 불이 났다 하면 급하게 종이 울립니다. 비상 종소리가 울리면 진화할 장비를 챙겨 산에 오릅니다. 학인들이고, 선방 스님이고 할 거 없이 다 뛰어나갑니다. 큰 불이면 밤을 새우기도 하고, 맞불을 놓기도 합니다. 체력이 필요한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암스님이 젊은 스님들에게 축구공을 사주고 운동화도 마련해 줬어요. 그래서 학인들은 평소에 운동을 많이 했지요.

 

사진 6. 판전에서 바라본 남산제일봉(높이 솟은 봉우리).

 

해인사에 내려오던 전통적인 행사가 있어요. 매년 단오날(음5.5)이면 화재를 막는 액막이 행사를 합니다. 해인사 법당 앞에서 보면 맞은편에 봉우리가 보여요. 문필봉文筆峯인데, 이 봉우리를 다른 방향에서 보면 불기운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절에 불이 많이 난다는 말이지요. 해인사에는 창건 이래 큰불이 일곱 번이나 났다는 거요. 해인사 맞은편에 화기가 있는 지점이 그 산봉우리라는 겁니다. 그 남쪽 봉우리에 비쳐서 해인사에 자주 불이 난다는 거예요. 그런데 묘한 것이 장경각은 계단을 쌓아서 높은 데 있어요. 놀라운 것은 조선시대에 일곱 번이나 큰불이 나서 법당이 타도 장경각에는 불이 미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 산불이 나면 해인사 스님들은 매우 긴장하겠군요?

 

단오날 스님들이 소금을 싸들고 남산제일봉(1054.3m)에 올라요. 그 정상에 작은 공터가 있는데, 여기서 산신제와 지신제를 지냅니다. 네 귀퉁이에 소금을 넣은 작은 단지를 묻어요. 작년에 묻은 소금 단지하고 새로 가져간 거 하고 교체하지요. 그게 말하자면 액막이입니다. 화마를 봉쇄하는 역할을 하지요. 그 이후 해인사에는 화재가 없어졌다는 거예요. 올라간 길 반대쪽으로 내려가면 청량사가 나옵니다. 거기서 점심공양하고 해인사로 복귀합니다.

 

통도사 강원 1회 졸업생이 되다

 

자운스님이 해인사 주지를 맡은 지 4년이 되었고, 그 후임으로 총무원장인 청담스님이 하겠노라고 내려오셨어요. 당시 큰스님들은 물러날 때가 되니까 훌훌 털고 해인사를 떠났지요. 그 무렵에 통도사는 월하스님, 벽암스님 등이 서로 주지를 바꿔가면서 했는데 산중에 제일 어른은 김구하(鷲山九河,1872∼1965) 스님입니다. 그런데 나는 1953년 선암사 시절에 통도사로 와서 삼만 배하고 자운 노전스님께 보살계를 받았어요.

 

사진 7. 1958년 통도사에서 인환스님(뒤)과 월운스님(옆).

 

자운스님이 구하스님을 잘 모셨고, 또 스님도 자운스님을 대단히 잘 봤어요. 해인사 주지를 그만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구하스님이 자운스님을 통도사 주지로 임명했어요. 통도사 출신이 아니면 본사 대중으로 취급을 안 했는데, 자운스님이 통도사 주지를 하게 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해인사에서 총무소임을 보던 영암스님, 재무소임을 보던 지관스님, 그리고 강사인 운허스님과 그 후계자인 월운(해룡)스님 또 통도사 출신으로 해인사 강원에 와서 공부하던 홍법스님 등 7명 정도의 스님들이 자운스님을 따라 통도사로 옮겼어요. 나는 1년 꼬박 통도사에 있으면서 매일 『화엄경』 80권을 착실히 공부했어요. 그래서 통도사 강원 제1회 졸업생이 됐습니다. 그때 같이 졸업한 사람이 아마 서너 명 될 거예요. 그래서 해인사 강원 동창회 회원 취급을 못 받았지만 최근에 같이 공부하던 분들이 명부에 넣어줬어요.

 

해인사 시절 영암스님이 젊은 스님에게 방 하나를 내주며 다른 일은 일체 하지 않도록 하고, 밤 9시부터 새벽예불이 있는 3시까지 도량 지키는 일을 맡겼어요. 당시 절에는 담장도 없고, 보물관이 따로 있지도 않아서 늘 불안했거든요. 그 스님 법명이 생각 안 나네요. 그 스님이 야경을 잘 수행했어요. 그래서 야경스님이라고 했지요.

 

사진 8. 1960년 통도사에서 (좌)운허, 구하, 벽안 (뒤) 정묵, 법정, 인환스님.

 

통도사에 와 있던 늦가을 어느 날 보물장에 도둑이 들어 귀중한 뭘 훔쳐 달아났어요. 그래서 밤에 경비하는 야경 자리를 하나 만들었어요. 밤 9시에 대중이 모두 잠자리에 들면 그때부터 새벽 3시까지 야간 불침번을 서는 거예요. 그 추운 겨울날에 누가 하려 할까요. 가만히 일 돌아가는 걸 보다가 내가 맡고자 작정했어요.

 

다음날 영암스님 찾아가서 통도사 야경을 제가 하겠다고 했어요. 학인들 여럿이 돌아가면서 하면 무책임할 수 있기 때문에 제가 맡겠다고 한 겁니다. 그때 나는 사중의 여러 소임을 맡고 있어 공부할 시간이 없는 형편이었어요. 이튿날 저녁부터 야경을 돌기 시작했어요. 초겨울이라 단단히 무장하고 보통 걸음으로 구석구석 돌면서 이상 없나를 확인하고 제자리 오는데 1시간 쯤 걸려요. 알다시피 통도사는 건물이 참 많습니다. 

 

▶ 추운 겨울 밖에서 야경꾼을 하셨군요?

그러니까 6시간 동안에 5번을 돌게 되는 거요. 순찰할 때는 대나무 지팡이를 들고 다녀요. 대나무를 짚거나 질질 끌면 소리가 울립니다. 일부러 소리 나도록 끌고 다녀요. 종무소 근처에서 시작하는데 그 옆에 총무인 영암스님 주무시는 방이 있어요. 이 소리가 꼭 한 시간마다 들려오면 노장님이 안심하고 주무신단 말이요, 하하하~. 그리고는 4시부터 아침 8시까지 잠자리에 들지요. 출가 후로 강원에서 공부할 때 보통 4시간 잤으니까 아무 이상 없어요. 8시에 일어나 후원에 가서 아침공양을 합니다. 이후 9시에 통도사 황하각이라는 건물로 이동하여 논강을 시작합니다.

 

사진 9. 『능엄경』 논강을 회고하는 인환스님.

 

논강이 끝나면 점심공양하고 한 숨 잤어요. 밤 9시가 되면 다시 준비를 단단히 하고 야경을 시작해요. 그렇게 1958년 겨울을 지냈어요. 1959년 3월 몸살감기에 걸렸는데 참으로 지독했어요. 원래 건강한 체질인데, 겨우내 야경 보면서 체력이 약해졌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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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순
동국대학교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역임. 현재 불교무형문화연구소(인도철학불교학연구소) 초빙교수. 저서로는 『원묘요세의 백련결사 연구』가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호암당 채인환 회고록의 구술사적 가치」, 「보운진조집의 성립과 그 위상 연구」 등 다수.
obuddh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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