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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쓴 선문정로]
정안종사의 한마디 말, 현요정편玄要正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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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  2023 년 9 월 [통권 제125호]  /     /  작성일23-09-04 22:41  /   조회1,15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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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성철스님이 1981년 1월, 조계종 종정직을 수락하면서 내놓은 법어다. 청원유신 선사의 말을 인용한 이 한마디는 한국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조계사 근처의 다방에서는 여종업원들이 보리차를 가져다 주면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에요.”라고 말했다는 회고담도 전한다.  

 

말을 통해 말의 틀을 깨뜨리기

 

지금도 이 말을 검색해 보면 다양한 해석이 발견된다. 다만 그것들은 마치 「님의 침묵」(한용운)의 ‘님’을 ‘부처’, ‘조국’, ‘사랑하는 사람’ 등으로 해석하며 오류의 목록을 더해 갔던 일과 비슷하다. 소의 머리에 말의 주둥이를 붙이려는 것처럼 한쪽을 맞추면 다른 쪽이 어긋나는 상황이다. 그것이 맥락 자체를 벗어난 한마디 말이기 때문이다.

 

사진 1.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일반적으로 우리는 지시대상과 발화언어 사이에 일대일의 대응관계를 설정한다. 이를 통해 하나의 언어적 사태는 보편적으로 이해 가능한 상황으로 의미화 된다. 그런데 이렇게 범주화에 기초한 모든 해석들은 예외 없이 언어의 생명을 빼앗는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언어문자는 실상에 대한 살해행위에 해당한다. 선사의 말은 더욱 그렇다. 

 

선사의 말은 태생부터가 모순적이다. 선문은 불립문자, 교외별전을 표방한다. 그러니 선사의 말은 선의 기본노선과 충돌한다. 그럼에도 말해야 하는 것이 선사의 운명이다. 선사는 말을 통해 말의 틀을 깨뜨린다. 이독제독以毒制毒이다. 또한 그것이 언어와 이해의 틀을 깨뜨리는 기능을 주로 하므로 다분히 파격적인 형식을 띄게 된다.

 

그 특별해 보이는 그 말들은 혹은 몽둥이를 휘두르는 일이 되기도 하고, 혹은 고함을 치는 일이 되기도 한다. 동문서답이 되기도 하지만 동문동답이 될 수도 있다. 한마디의 종잡을 수 없는 말이거나 장편대론의 잔소리일 수도 있다. 어쨌든 말로 안 되는 상황을 말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 선사의 설법 현장이다. 매우 유감인 상황이다. 그것이 실상의 순도를 희생하는 일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청법자를 속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성철스님이 열반에 임한 노래에서 “평생토록 남녀의 무리를 속여 하늘에 넘치는 죄업이 수미산보다 높다[平生欺狂男女群 彌天罪業過須彌].”고 탄식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선사들은 말을 하되 그 말을 원수처럼 여긴다. 용담숭신 선사가 천황도오 선사에게 법을 구하는 장면을 보자.

 

숭신: 제가 여기에 와서 아직 마음의 요체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마음의 요체를 가르쳐 주십시오. 

도오: 네가 여기 온 이후 이제까지 마음의 요체를 가르쳐 주지 않은 때가 없었다.

숭신: 어디에서 마음의 요체를 보여주었단 말씀이십니까?

도오: 네가 차를 올리면 나는 차를 마셨다. 네가 밥을 올리면 내가 밥을 받았다. 네가 절을 하면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주지 않은 곳이 어디냐?

 (숭신이 고개를 숙이고 그 뜻을 생각하자)

도오: 보려면 당장 이대로 보아야지 생각을 거치면 잘못이 생긴다.

 

학인은 끝없이 무엇인가 확실한 하나를 내놓으라 재촉한다. 그런데 눈앞의 만사만물 외에 내놓을 것이 없는 것이 정안종사의 살림이다. 그래서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그 ‘마음의 요체’를 남김없이 드러낸다. 그럼에도 무엇인가 특별함을 찾는 학인은 좀체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때 어떻게 할 것인가? 정안종사는 구업口業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마지못해 한마디 한다. 그것은 우주법계 전체를 담보로 하는 일종의 약속어음 같은 것이다. 크다면 크고 허무하다면 허무하다.

 

선종 오가의 가풍

 

학인이 이 증서를 받아 마음의 요체를 수령한다면 이 거래는 완성되겠지만 대부분 그러지 못한다. 종이쪽지 자체에서 무엇을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안종사는 이미 뱉어놓은 말을 다시 부정하는 말을 쏟아낸다. 성철스님이 그랬던 것처럼 “내 말에 속지 말라”는 것이다. 도오선사는 “생각을 거치면 잘못”이라는 고함으로 말을 따라가려는 숭신선사를 가로막았다. 

 

이처럼 정안종사는 그 말을 가지고 기존의 언어적 틀을 깨는 동시에 그것이 새로운 이해의 틀을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십분 주의를 기울인다. 아니, 주의를 기울인다는 말은 옳지 않다. 언어도단의 차원에서 내놓는 선사의 말은 항상 언어와 이해의 틀을 깨뜨리면서 태어난다. 그렇게 하여 어떠한 해석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쇄락한 언구들이 출현한다.

 

사진 2. 위산영우 선사(일본 狩野元信 그림).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조주스님은 “없다[無]”고 대답했다.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조주스님의 “없다”는 대답은 불교의 교리와 충돌한다. 그렇다고 조주의 옛 부처님[趙州古佛]으로 불렸던 정안종사가 틀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그리하여 이 한마디 말은 진퇴유곡을 선물한다. 이해를 통해 기억의 창고로 넘겨버릴 수도 없고 의미가 없다고 내다버릴 수도 없다. 목에 걸린 밤송이와 같아서 삼킬 수도 없고 토할 수도 없다.

 

정안종사들의 말은 이렇게 의미의 그물에 걸리지도 않고 무의미의 늪에 빠지지도 않는다. 여기에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일종의 수사학적 장치들이 시설된다. 그것은 선사의 개성과 학인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각각의 상황이 다르므로 선사들이 내놓는 가르침의 언어들은 언뜻 보기에 천차만별의 다양성을 갖는다. 그중에 특별히 효과를 본 방법들이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일종의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5가의 종풍이 바로 그것이다.

 

임제종은 일체의 틀을 부수는 압도적 기세로 유명했고, 조동종은 언어와 행동의 치밀한 조화에 의한 훈습을 중시했다. 운문종은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를 차단하는 철벽같은 언어를 썼고, 법안종은 삼계유심의 이치를 드러내는 적절한 언어를 제시하는 데 능했다. 또 선종 5가 중 최초로 성립된 종파였던 위앙종의 경우 스승과 제자 간에 주고받는 퍼포먼스 자체를 중시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스님(앙산)이 하루는 법당에 앉아 있는데 한 중이 밖에서 들어와 안부를 여쭙고는 동쪽으로 가서 두 손을 모으고 서서 스님을 바라보았다. 스님이 왼발을 내리자 중은 바로 서쪽으로 가서 두 손을 모으고 섰다. 스님이 오른발을 내리자 중이 가운데로 가서 두 손을 모으고 섰다. 스님이 두 발을 거둬들이자 중이 절을 했다. 

 

어떤가? 거의 연극과 같지 않은가? 위앙종의 내부에 암호처럼 통하는 행위 언어가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이것이 일종의 약속대련 같은 것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다. 위산스님을 계승하여 위앙종을 완성한 앙산혜적 선사는 당대 최고의 정안종사였다. 작은 부처님[小釋迦]이라는 존칭까지 헌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일체의 의도적 가공을 벗어난 즉석 퍼포먼스였다는 것을 믿는다. 그것은 부처님이 꽃을 들어 올리고 가섭존자가 미소를 짓는 심심상인心心相印의 도장 찍기가 재현되는 현장이었다. 그것은 일체의 언어와 분별적 사유의 틈입을 허용하지 않는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의 현장이었다.

 

사진 3. 앙산혜적 선사.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양상은 다양하지만 오로지 분별의 틀을 타파한다는 점에서 5가7종의 말은 크게 같다. 대동소이하다는 말이다. 병을 치료하는 일에 비유하자면 환자의 병에 따라 쓰는 약이 다르고, 의사의 특기에 따라 치료 방식이 다르다. 그렇지만 치료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동물을 길들이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소는 코뚜레로 길들이고, 말은 재갈로 길들인다. 코끼리는 갈고리로 길들이고, 나귀는 말뚝으로 길들인다. 그뿐이겠는가? 길들이려는 동물의 종류만큼 방법 또한 무한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 길들여 순화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임제의 3현3요

 

그런데 화려할 정도로 다양한 5가의 종풍을 접하게 되면 자칫 그 표면적 특징에 무엇인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3현3요三玄三要의 예를 보자. 원래 임제스님은 정안종사의 말이라면 “한 마디에 3현3요가 갖추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 3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과연 3은 무엇인가? 궁금증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후 선종에는 3현3요의 3을 밝히고자 하는 시도들이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3현을 체중현體中玄, 구중현句中玄, 현중현玄中玄으로 구분하는 논의가 있어 큰 환영을 받았다. 이중 체중현은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법계실상을 표현한 말, 구중현은 앎과 이해의 차원을 벗어나 진리를 직접 드러내는 말, 현중현은 언어의 틀을 벗어난 고함이나 몽둥이와 같은 말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뒤따른다. 이렇게 의미에 따른 범주의 구획이 행해지면 상호 간에 순서와 우열이 정해지는 것은 필연에 가깝다. 3현3요만 해도 체중현→구중현→현중현으로 나아가는 지위승급의 관계가 성립한다는 논의가 뒤따른다.

 

사진 4. 임제선사(일본승려 曾我蛇足 그림).

 

그리하여 임제종만 해도 4빈주四賓主, 4료간四料簡, 4할四喝, 4조용四照用의 각 항목들의 순위에 대한 주목이 일어나게 되고, 조동종의 정편5위正編五位, 운문종의 운문3구雲門三句 등의 차별성에 대한 연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된다. 정안종사의 가르침을 따른다면서 그 차별성, 혹은 우열성의 규명에 천착한다면 그것을 바른 수행이라 할 수 있을까? 성철스님은 탄식한다. 

 

“그러면 조주의 ‘정전백수자’나 동산의 ‘마삼근’은 구중현이니 낮고, 임제의 할과 덕산의 방은 현중현이니 그 경지가 더 높은 것이 되는데 과연 그런가? 이는 선문의 종취를 꿈에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어찌 조주의 법문은 낮고 임제의 할은 높다 하겠는가? 참선을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그 잘못됨을 분명히 알 것이다. 3현3요는 공부하는 차제나 단계가 결코 아니다.”

 

번쇄한 언어문자의 학습에 쓰는 시간과 정력을 한곳에 집중하자는 것이 선종이다. 목숨까지 쥐어짠 하나의 힘으로 지금 당장 선악조차 생각하지 않는 본성의 자리에 돌아가자는 것이 선종이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수행의 지위를 논하고 스승들의 우열을 평하는 평론가가 되는 함정에 빠진다면 그 자체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현요정편玄要正偏의 동일성

 

성철스님이 정안종사들의 가풍을 정리하면서 숫자에 대한 일체의 관심을 차단하는 전략을 취한 것도 그 때문이다. 성철스님은 3현3요에서 3을 삭제하고 조동종의 정편5위에서 5를 삭제하여 현요정편玄要正偏의 큰 동일성만을 남긴다. 5가의 특징적 종풍에 대한 검토를 하면서 장의 제목을 현요정편으로 삼은 이유이다.

 

여기에서 성철스님은 5가의 다양한 종풍이 백화제방으로 피어난 중도의 꽃밭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어떻게 보아도 정안종사의 가르침은 본성과 현상의 통일성[性相一如], 이치와 일의 원융성[理事圓融], 존재와 공성의 무차별성[色卽是空, 空卽是色], 부정과 긍정의 동시성[雙遮雙照]을 그려내는 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5가의 우열을 논한다면 그 스스로 자신이 시비선악의 분별 집착에 빠져 있음을 고백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오로지 수행에 매진하여 스스로 철저하게 밝아져야 한다. 그때 5가의 종풍이 한 집안의 일임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공자도 말했다. “나의 도는 하나로 꿰어져 있다[吾道一以貫之].” 증자曾子는 이에 대해 충忠이니 서恕니 나누어 해석했지만 그게 공자의 뜻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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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구
현재 동의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앙도서관장을 맡고 있다.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kkkang@de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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