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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9년 만에 떠난 만행과 적멸보궁 기도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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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순  /  2023 년 10 월 [통권 제126호]  /     /  작성일23-10-05 09:46  /   조회97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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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로 엮는 현대불교사 14 | 인환스님 ⑩

 

출가한 지 어느덧 9년쯤 되었지요. 부산 선암사 선방에서 3년간 열심히 참선했고, 그 다음에 해인사, 통도사 강원에서 공부만 하고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어요. 이제 처음으로 걸망을 짊어지고 만행이라는 걸 해야 되겠다고 했어요.  

 

출가 9년 만에 산문을 나서다

 

통도사에서 초파일 지내고 이틀 후 종무소에 가서 부산 다녀온다고 알렸어요. 통도사를 떠난다고 하면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어요. 감로당 내 옆방에는 월운스님이, 맞은편에는 운허스님 방이에요. 공부했던 경전, 책 이런 거 차곡차곡 정리해 뒀어요. 걸망에는 가사와 장삼, 발우 등을 싸 가지고 결제 전 부산 선암사에 다녀오겠다고 하니까 뭐 대수롭지 않게 다녀오라고 하셨어요.

 

사진 1. 인환스님은 1951년 부산 선암사로 입산한 이후 9년 만에 만행을 떠났다.

 

여비를 조금 받았어요. 그리고는 통도사와의 작별을 고했어요. 부산에 간다 해 놓고 그 반대로 경주를 향해서 계속 걸었어요. 한두 시간에 한 번 버스가 있지만 매일 40~50리 걸었어요. 급하게도 안 걷고 천천히 걸어 경주 가까이 갔어요. 사람들한테 물어 큰 절이거나 조그만 암자이거나 찾았어요. 당시 정화가 끝났지만 그때만 해도 작은 절이나 암자에는 대처스님네들이 그대로 살고 있는 데가 꽤 있었어요. 절 뺏으러 온 거 아닌가 하고 비구승이 온다고 하면 겁을 덜덜 냈단 말이지요. 

 

사진 2. 통도사 대웅전(조선고적도보, 1930년대 초).

 

어둡기 전에 절을 찾아 “객승 왔습니다.” 하고 떠나가라 소리를 쳐요. 그렇게 하면 한참 기다려도 감히 내다보지 못하고 문틈으로 엿봅니다. 개의치 않고 마루에다가 턱 하니 걸망 내려놓고 법당에 올라가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나와서 법당부터 지저분하든지, 깨끗하든지 상관없이 도량을 싹 쓸어요. 그동안 절 주인은 문틈으로 엿보고 있다가 밥상을 차려줘요. 소지 잘 해줘서 고맙다고 하는 정이 들어 있는 밥상이에요.

 

도량 청소하는 객승

 

객실에서 9시까지 참선 정진하다가 자리에 누워요. 다음날 새벽 2시 반 되면 일어나 법당에 가서 새벽예불을 해요. 벽두부터 예불하는 절이 거의 없어요. 뭐 그러거나 말거나 법당에 들어가 촛불 켜고 향 올립니다. 3시 되면 목탁석하면서 도량을 돌고, 종이 있으면 쇳송을 하고 예불을 올립니다. 다시 법당에서 참선 정진하다가 날이 밝을 때쯤 일어납니다.

 

사진 3. 묵호항 2012.

 

이제 걸레 찾아서 법당 바닥, 마루, 요사채 할 거 없이 깨끗하게 걸레질해요. 화장실도 깨끗이 청소합니다.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아침공양 때가 된단 말이요. 아침 먹고 뭐 머뭇거리지 않고 “객승 갑니다~ ” 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요. 그러면 어지간하면 쫓아나와서 차비가 든 봉투를 걸망에 넣어줘요. 청소 잘 해줘서 고맙다고 그래요. 순전히 나 혼자 생각으로 그렇게 했어요. 어떤 곳이든 딱 하루만 머무는 원칙을 세웠어요.

 

포항 보경사, 울진 불영사 등 동해안을 따라 올라갔어요. 묵호항에 도착했어요. 원산에서 피난올 때 미군 함정을 타고 상륙한 곳이 바로 여기예요. 10년 다 된 후에 다시 오니까 그때하고는 많이 달라졌어도 참 감회가 새롭더구만요. 강릉으로 주문진으로 올라가서 양양 지나 간성으로 갔어요. 여기 멀지 않은 곳에 건봉사가 있어요. 지금은 자유롭게 갈 수 있지만 그때는 못 들어갔어요.

 

사진 4. 낙산사 전경.

 

다시 내려와 양양 낙산사로 갔어요. 낙산사에는 내가 선암사에서 출가해서 계를 받은 은사인 원허圓虛스님이 주지를 하고 계셨지요. 6.25사변 때 폐허가 되었는데, 스님이 각고의 노력으로 법당도 짓고 요사채도 갖추었어요. 양양지역에 군부대가 집중되어 있는데, 군단장 혹은 HID대장 이런 장성들이 원허스님을 존경해서 인력과 중장비 등을 지원해 줬대요. 스승이 계시는 낙산사에서는 1주일 쯤 머물렀어요. 

 

적멸보궁에서 장좌불와 기도

 

굽이굽이 대관령을 넘어서 진부에 도착했어요. 산 계곡길로 걸었어요. 중간에 통나무 다리 여러 개 건너 월정사에서 하루 묵었지요. 이튿날에는 상원사에 갔어요. 당시 월정사에는 희찬스님이 계셨고 상원사에는 그 사제인 희섭스님이 계셨어요. 두 분을 뵈었어요. 다시 다음날 중대(사자암)에 올라가서 생전 처음으로 적멸보궁 참배를 했지요. 1959년입니다. 여기에는 좌복만 있고 불상은 없어요. 부처님 사리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모셨다고 합니다.

 

산세가 좋고 조용한 가운데 새소리만 들려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그동안의 만행길에서 가장 신심이 우러나온 곳이란 말이지요. 여기는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라 한동안 정진기도를 올리고 싶은 생각이 났어요. 출가해서 근 십년 가까이 부전 책임도 하고 여러 가지 하면서 남의 기도는 많이 했지요. 그러나 앞으로 내가 걸어갈 길을 찾아야 하는 분기점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적멸보궁에서 이번에는 진짜 내 기도랍시고 해 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어요.

 

사진 5. 오대산 적멸보궁.

 

중대에는 응담스님이라는 분이 계셨어요. 원주로 계시면서 적멸보궁도 관리했어요. 그때는 달랑 두 칸 요사채뿐이었어요. 노장한테 인사를 드렸지요. 여기서 한 20일 기도를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나는 그동안 여러 절을 다니면서 받은 차비가 있고 곳곳에 내 강의를 들었던 스님들이 챙겨준 봉투도 꽤 많았어요. 응담스님께 “내게는 재산이 이것뿐인데 20일 동안 기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봉투를 모두 내놓았어요. 내 말을 듣더니 응담스님이 갑자기 크게 웃으시더라구요. 이어서 “해 보시오. 열심히 하시오.” 그러셨어요.

 

음력 5월이니까 산중의 새벽은 좀 춥긴 한데 훌렁 벗고 물 뒤집어쓰면서 목욕을 했어요. 기도에 앞서 우선 몸을 정결하게 하지요. 보궁에 올라가서 쇳송하고, 목탁석하고 예불 모시고 그렇게 시작했어요. 누가 기도법을 일러주거나 규칙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내가 독창적으로 생각해 냈어요.

 

사진 6. 『불교사전』 편찬 중 동산스님(앞좌), 운허스님과 함께 조계사에서(1961.2, 『동산대종사석영첩』).

 

1시간 동안 목탁을 치면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해요. 이후 1시간은 절을 해요. 몇 배를 하는지는 세지 않고, 1시간 꼬박 절을 하는 겁니다. 법당 안에 둥그런 괘종시계가 있더라구요. 이렇게 2시간이 지나고 3시간째는 앉아서 화두 들고 참선 정진을 합니다. 새벽부터 낮이나 밤이나 이 세 가지를 계속 번갈아 합니다. 하루 한 끼 점심공양만 했어요. 그것도 많이 먹지 않았어요. 그저 죽지 않을 만큼, 기도하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이요.

 

20대 후반의 젊음이 샘솟듯이 솟아오르는 신심이 내가 생각해도 대단했어요. 그렇게 무사히 스무 날 기도를 끝낼 수 있었어요. 선방에 앉아서 정진하는 것보다 훨씬 낫더라고요. 진짜 환희심이 나고, 편안하고, 어지럽지 않고 그런 마음가짐 속에서 기도를 할 수 있었어요. 일생의 가장 좋은 시기에 계기를 맞이한 거죠.

 

마침내 회향하는 날입니다. 오전 10시쯤에 응담스님이 마지를 짊어지고 와서 같이 마지 접수하는 의식을 하고 공양을 마쳤어요. 다시 혼자 남아 발원하고 뒷정리를 했지요. 20일 간 한 잠도 안 자고 오직 용맹기도를 했는데, 잠 안 자고 어떻게 지냈느냐? 뭐, 화두 들고 정진할 때 가끔 꾸벅꾸벅한 거요. 사실 조금씩 잠을 취한 거지요. 그러나 허리를 바닥에 눕히거나, 옆구리를 대고 누웠거나 뭐 그런 거는 전혀 없었어요. 이른바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 나 자신과 스스로의 약속이니까요.

 

사진 7. 석주스님(1950년대).

 

이제 하산하려고 법당 밖으로 나섰어요. 내딛는 순간, 눈앞에 마치 해가 열 개나 뜬 것처럼 환하게 밝더라고요. 와~ 놀라는 마음으로 이제 고개를 들었더니 눈앞에 큰 나무들이 많았는데 그 나뭇가지 잎마다, 잎마다 부처님이 쭉 앉아서 그냥 광명을 발하는 게 떡~ 하니 보이더라고요. 참으로 신기하고, 희한한데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경지를 보게 됐어요. 그 순간 나뭇가지에 부는 바람, 새 지저귀는 소리가 모두 다 법문으로 다가오는 듯 했습니다. 그렇다고 뭐 도량이 자연이 바뀐 것은 아니겠지만, 바라보는 내 눈과 안목이 이전과 확실히 다르다는 체험을 했지요. “아~ 기도의 힘으로 마음의 눈을 좀 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해 6개월간 서해쪽 사찰들을 둘러보고 만행을 끝냈어요.

 

『불교사전』 편찬에 참여

 

1960년 선암사에서 겨울 안거 준비 중이었는데 통도사에서 기별이 온 거에요. 운허스님이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사전』을 편찬하는 데 일손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통도사로 갔어요. 나 그리고 유명한 법정스님, 정묵스님, 법안스님. 법안스님은 훗날 동국대학교 부총장까지 하고 뉴욕에 원각사를 창건한 분이에요. 정묵스님은 나중에 퇴속해서 종립 동국중고등학교에서 교감을 지냈어요.

 

사진 8. 『불교사전』(1962).

 

운허스님은 짬짬이 카드만 한 흰 종이에 사전 원고를 썼어요. 초안은 거의 운허스님이 작성하셨어요. 그런데 초안 가지고는 원고가 안 된단 말이요. 그 원고를 우리 네 사람이 나눠서 정리했어요. 그리고는 운허스님이 보충하거나 수정합니다. ‘가나다라마’까지는 정묵스님이 맡고, ‘마바사’는 법정스님이, ‘아’ 부가 제일 많은데 법안스님이 맡았고, ‘자차카타파하’는 내가 맡았어요. 원고지에 정리하면서 필요한 내용은 우리가 보충하면서 작성했어요.

 

통도사의 좁은 방에서 책상들을 만卍자로 이어붙이고 넷이 마주보고 앉아 원고를 정리했어요. 법정스님이 본래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어요. 책상 가운데 라디오를 하나 놓고는 음악을 들었어요. 그 덕분에 우리들도 음악을 많이 들었지요.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도 라디오에서 들었어요. 사전을 편찬하는 데 통도사에서 물심양면으로 우리를 지원했어요. 어른이신 월하스님, 벽안스님께서 아주 호의적으로 대해 줬어요. 그중에서도 가장 관심을 가지고 성원하고 도움을 주신 분이 바로 구하스님鷲山九河(1872∼1965)이셨어요.

 

사진 9. 취산구하 스님.

 

원고가 마무리되어 출판사에 넘기기 위해 운허스님 모시고 네 사람이 모두 서울로 갔어요. 우리는 선학원에 머물렀어요. 당시 석주스님이 선학원장이셨어요. 청담스님은 당시 총무원장으로 있으면서 처소를 선학원에 두신 거에요. 우리 넷 가운데 법안스님은 스승 관응스님이 계시는 용주사로 갔고 나머지 셋이 4차 교정까지 끝냈어요, 사전이다보니 보통책보다도 엄밀하게 검토했어요. 인쇄소는 광명인쇄소인데 5.16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군부세력을 후원한 곳입니다.

 

구하스님이 전하는 구한말 불교계

 

우리들 젊은 사람들이 운허스님을 모시고 역사상 처음으로 한글 『불교사전』을 만든다고 대단히 좋아하셨어요. 통도사에는 보광전이라는 선방이 있고, 그 옆 요사채에 구하스님이 계셨어요. 별당이라고 불렀는데, 구하스님의 연세가 90세를 지나셨던 때예요. 스님의 키는 자그마한데 얼굴 생김이 참 귀태가 나고 그러면서도 카리스마가 대단하셨어요. 과자나 과일 당세기(작은 바구니 같은 함)를 시봉에게 들려 가지고 우리들을 찾아오세요. 구하스님은 다담茶談하시는 걸 아주 좋아하세요. 

 

사진 10. 구하스님의 글씨, 통도사 개산조당 현판.

 

 

그때 들었던 구하스님의 여러 가지 말씀 중에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관리나 유생들, 이른바 양반들이 스님과 불교를 하시下視하고 이럴 때예요. 구하스님은 15세 즈음에 출가했을 때 그런 걸 많이 목도하셨다네요. 그들이 절에 와서 거만 부리고 행패를 부리는데, 그렇다고 야단하지 못했다네요. 트집을 잡아서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요.

 

사진 11. 정릉 경국사 환희당에서 연구하는 인환스님(2012).

 

통도사 법당에도 물론이고 어지간한 절에 가면 부처님 모신 탁자 옆에 작은 패가 있어요. 거기에 ‘국왕전하수만세國王殿下壽萬歲’라든지 ‘세자저하수제년世子底下壽齊年’ 이런 글이 써 있습니다. 왜 이런 것을 모시게 됐느냐 했더니, 절에 온 유생들이나 세속인들의 패악질을 막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답니다. 그들이 행패 부리려 하면, “여기가 어느 안전인데, 어! 감히 행패를 부리냐, 봐라! 법당에 금상전하, 왕의 안녕을 비는 원패願牌를 모셔 놨는데, 그러니 이곳은 왕이 계신 것과 마찬가지인데 감히 행패를 부리냐.”고 하면 그때는 꼼짝 못 한다는 겁니다. 지금도 여러 절에 이런 원패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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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순
동국대학교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역임. 현재 불교무형문화연구소(인도철학불교학연구소) 초빙교수. 저서로는 『원묘요세의 백련결사 연구』가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호암당 채인환 회고록의 구술사적 가치」, 「보운진조집의 성립과 그 위상 연구」 등 다수.
obuddh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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