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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음미하는 부처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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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학  /  2019 년 1 월 [통권 제6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03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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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학 | 작가 · 자유기고가

 

“번역은 반역이다.” 번역의 어려움을 표현하는 유명한 경구입니다. 명쾌하면서도 강렬한 문장입니다. 그 뜻을 헤아리기 위한 ‘이해’라는 ‘머릿속의 번역’은 필요치 않습니다.

 

뛰어난 번역은 위대한 반역의 소산입니다. 당연히 그 배후에는 신중하고도 현명한 반역자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없었다면 문화의 이동과 확산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번역이 반역이라면, 그 반역은 불가피합니다. 위험한 만큼 매혹적입니다.

 

동북아시아 불교 역사에도 ‘역경 삼장譯經三藏’이라 불린 위대한 반역자가 있었습니다. 이들에 의해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로 기록된 부처님의 가르침이 한문으로 옮겨지지 않았다면 한국의 역사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삼장법사들은 완전한 번역의 근원적 불가능성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대표적인 역경가인 현장(玄奘. 600~664, 당나라) 스님은 5종불번五種不飜이라 하여, 다섯 가지의 경우는 번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한 가지만 보자면, 반야般若를 ‘지혜’로 번역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경박하여 높고 귀한 의미를 훼손한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반야般若’는 산스크리트어 Prajñā를 소리대로 옮긴 것입니다. 불자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정겹고 고귀한 말인 ‘보살菩薩’, ‘열반涅槃’도 그렇게 하여 태어났습니다. 한 글자에 신명을 다한 역경 삼장들의 안목 덕분입니다.

 


인도 아잔타 석굴의 바깥 모습.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로 경전이 전해졌을 때 역경의 중요성은 대두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또한 한자를 썼으니까요. 이후 15세기에 들어서 비로소 ‘우리말’ 불경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언해 불전’이 그것입니다. 물론 한문과 우리말의 문법이 다를 뿐 아니라 사대부에 의해 번역이 이루어지면서 원전을 잘못 이해한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노력 자체는 높이 사야 할 것입니다.

 

1,600여 년 한국불교 역사에서 한문 경전의 우리말 번역은 현대에 들어서 시작됐습니다. 백용성 스님이 1900년대 초에 국한문 혼용체의 불경 번역 이후, 한글 전용 우리말 경전은 1964년부터 동국역경원에서 『한글대장경』을 펴내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운허 스님의 원력과 그것을 이어받아 2000년에 완간하기까지 월운 스님을 중심으로 많은 번역가들이 공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 우리말 경전의 우리말 다움에 대한 문제는 또 다른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한국 불자들에게 경전은 이질적인 두 가지 방식으로 수용됩니다. 독송은 한문으로 하고, 우리말로 번역된 경전은 (눈으로) 읽습니다.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설서에 의지해야 합니다. 한글로 번역된 경전의 상당수는 표기만 한글일 뿐입니다. 마땅히 우리말 경전이라면 한문 원전 없이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문장이 우리 말로서 완전할 뿐 아니라 소리 내어 읽어도 좋을 가락까지 갖추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전이 드문 것은 번역자들의 게으름 탓만은 아닙니다. 우리말의 대부분이 한자어이고, 고도의 개념어를 쉽게 풀어 쓰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일도 아닙니다. 가령 ‘아라한’을 일컫는 ‘무학無學’이라는 멋진 말을, ‘배운 것이 없는(이)’ 식으로 풀어 쓴다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어느 수준까지가 우리 말 다운 경전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도의 세밀한 논의를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독송을 위한 경전의 경우는 한 글자 한 글자를 화두 삼아 씨름해야 할 것입니다. ‘독송용 우리말 경전’으로 가장 앞선 이력을 가진 조계종 표준 『반야심경』의 한 부분을 보겠습니다.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문장 차원에서는 문제 삼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위 인용문의 ‘법法’은 삼법인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법’과 같은 것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연기의 도리와 같은 ‘진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의미합니다. 과연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사람들도 그렇게 이해할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물론 위 번역문의 ‘법’도 ‘존재’라는 의미를 포괄하므로 문제될 게 없다고 주장한다면 할 말 없습니다. 하지만 독송용 경전이라면 마땅히 ‘해석’이라는 두뇌의 ‘번역’ 과정 없이 곧장 마음으로 다가가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할 말이 더 있지만 지면 관계상 이쯤 하겠습니다.)

 

머릿속에서 번역하지 않아도 되는 「예불문」

 

지금은 고인인 제 어머니는 생전에 『천수경』 독송을 큰 즐거움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드는 한 가지 의문은 어머니께서 과연 경의 내용까지 즐겼을까 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실 때는 차마 여쭈어 보지 못했습니다. 저도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 형편이었고 한편으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어머니에게 『천수경』은 의지처였습니다. 독경은 기도였고 수행이었으며, 치매 예방 훈련이었습니다. 생각은 이렇게 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냥 듣기만 해도 그 뜻이 마음에 와 닿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몇년 전부터 새해가 밝을 때마다 저와 제 아내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아침마다 마주보며 108배를 하는 것인데 한 달을 넘긴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불문」을 제 나름대로 우리말로 옮겨 봤습니다. 그것을 읽으면 108배를 지속하는 힘이 생길까 하는 기대를 한 것입니다. 오로지 저와 제 아내 두 사람만을 위한 것이지만 한 번 옮겨 보겠습니다. 다들 나름의 「예불문」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계持戒의 향,
선정禪定의 향,
지혜智慧의 향,
해탈解脫의 향,
해탈지견解脫知見의 향이여,
법신法身의 향香이여.

 

구름 제단 위 가득한 빛
부처님의 진리로 충만한 우주를 비춥니다.

 

온 세상의 무량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 지키고 펼치는 스님들께
신명을 다하여 공양 올립니다.

 

제 마음속
계향·정향·혜향·해탈향·해탈지견향을 사르옵니다.

 

옴 바라 도비야 훔.
옴 바라 도비야 훔.
옴 바라 도비야 훔.

 

삼계의 스승이시고
온 생명의 자애로운 어버이시며,
저희들의 참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하며
신명을 다하여 절 올립니다.

 

온 세상의 과거 현재 미래와
인드라망처럼 연결된 땅과 바다에
언제나 머물고 계시는 모든 부처님께 귀의하며
신명을 다하여 절 올립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며
신명을 다하여 절 올립니다.

 

뛰어난 지혜의 문수사리보살님
위대한 덕행의 보현보살님
더없는 자비의 관세음보살님
위대한 원력의 지장보살님께 귀의하며
신명을 다하여 절 올립니다.

 

부처님 살아 계실 때
영취산에서 법을 설하시고
영원히 이어가기를 부촉하셨습니다.
10대 제자, 16 아라한, 500 아라한, 홀로 깨달은 아라한에서
부터 1200 아라한까지
한없는 자비로 부처님의 법을 전한 모든 성인들께 귀의하며
신명을 다하여 절 올립니다.

 

인도에서 밝혀져 동쪽으로 전해온 불법의 등불이
지금 여기 제 앞에서 찬연합니다.
그 빛 밝혀 오신 조사 스님들과
헤아릴 길 없는 선지식께 귀의하며
신명을 다하여 절 올립니다.

 

온 세상의 과거 현재 미래와
인드라망처럼 연결된 땅과 바다의 온 생명과
언제나 함께하시는 스님들께 귀의하며
신명을 다하여 절 올립니다.

 

애오라지 바라옵니다.
삼보의 큰 자비 다함 없기를
머리 조아려 비옵나니
저희들의 정례를 받으시고
온 세상에 부처님의 자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서
온 생명 더불어 성불하게 해 주시옵소서.

 

戒香 定香 慧香 解脫香 解脫知見香
光明雲臺 周邊法界 供養 十方無量佛法僧

 

獻香眞言
옴 바라 도비야 훔
옴 바라 도비야 훔
옴 바라 도비야 훔


至心歸命禮 三界道士 四生慈父 是我本師 釋迦牟尼佛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佛陀耶衆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達摩耶衆
至心歸命禮 大智文殊 舍利菩薩 大行普賢菩薩 大悲觀世音菩薩 大願本尊地藏菩薩摩阿薩
至心歸命禮 靈山當時 受佛付囑 十大弟子十六聖 五百盛獨修聖乃至 千二百諸大阿羅漢 無量慈悲聖衆
至心歸命禮 西乾東震 及我海東 歷代傳燈 諸大祖師 天下宗師 一
切美塵數 諸大善知識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僧家耶衆

唯願 無盡三寶 大慈大悲 受我頂禮 冥熏加被力 願共法界諸衆生 自他一時 成佛道

 

「예불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설이 유통되므로 여기에 하나 더 보탤 생각은 없습니다. 대신 ‘오분향’의 의의에 대한 혜능 스님의 법문을 옮겨 보겠습니다. 더 이상의 말은 군더더기가 될 것 같습니다.
대사께서 광주廣州, 소주韶州 이렇게 두 군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학자와 사람들이 법을 들으려 산중에 모인 것을 보시고, 자리에 오르시어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잘 왔노라, 선지식들이여. 법을 구하려는 이 일은 모름지기 자성 가운데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니, 언제 어느 때나 순간순간 그 마음을 깨끗이 하여 스스로 닦고 스스로 행하면 자기의 법신을 볼 것이다. 자기 마음의 부처를 보아 스스로 제도하고 스스로 경계하면 이곳에 올 일이 없었겠지만, 이미 먼 곳으로부터 와서 모인 것도 인연이니 이제 저마다 끓어 않으라. 먼저 자성의 오분법신향을 전하고 다음에 무상 참회를 주리라.”

 

대중이 무릎을 꿇고 앉으니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첫째는 계향이니, 자기 마음 가운데 거짓과 악이 없고, 시기하지 않고, 탐욕과 성내는 마음이 없으며, 빼앗고 해칠 마음이 없는 것을 이름하여 계향이라 한다.
둘째는 정향이니, 선악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도 마음이 어지럽지 않은 것을 이름하여 정향이라 한다.


셋째는 혜향이니, 마음에 걸림이 없어 언제나 지혜로써 자기 성품을 비추어 본다. 어떤 악도 짓지 아니하고 많은 선을 닦지만 마음에 두지 아니한다. 어른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거두며, 외롭고 가난한 이를 불쌍히 여기는 이런 것들을 이름하여 혜향이라 한다
넷째는 해탈향이니, 마음이 바깥 대상에 끄달리는 바가 없어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아니하여 자재무애하니 이름하여 해탈향이라 한다.


다섯째는 해탈지견향이니, 마음은 이미 선악에 얽매이는 바가 없더라도 공에 침잠하거나 고요함에 머무르지 않고, 널리 배우고 많이 듣기를 마땅히 하여 자기 본래 마음을 투철히 알아 모든 부처님의 진리에 통달하고, 세속에 살면서 나도 없고 남도 없는 깨달음에 이르러 참된 성품이 바뀌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해탈지견향이라 한다.



선지식들이여, 이 향은 저마다 내면의 향이니 밖에서 찾지 말지니라.

『육조단경』 「전향참회傳香懺悔 제5」 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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