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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국가 발급의 승려자격증 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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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  2024 년 4 월 [통권 제132호]  /     /  작성일24-04-05 11:14  /   조회20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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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은 개인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다. 대신에 출가를 한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특별한 권한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불교 종파에 따라 승려의 결혼을 허용하기도 하고 불허하기도 한다. 그러면 실록에서는 승려의 자격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 

 

조선시대 승려의 자격을 살펴보기 전에, 승려의 결혼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국시대 불교 전래 이래 승려의 결혼에 관한 기록이 간간이 나온다. 가령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와 정을 통하여 설총을 낳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고려 초에 처음 도입된 도첩 

 

『고려사』에는 결혼한 승려를 의미하는 ‘유처승有妻僧’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현종 20년(1029) 6월 29일조에 “유처승을 징발하여 중광사의 노역에 동원하였다.”라고 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도 성종 대까지 대처승對妻僧(혹은 帶妻僧)이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나오고 있다. 그런데 조선은 승려의 결혼을 지속적으로 금지하여 연산군 이후 대처승에 관한 기록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승려의 자격은 어떠하였을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배극렴·조준 등이 22조목을 상언上言하였다. “무릇 승려가 되는 사람이 양반의 자제이면 오승포五升布 1백 필을, 서인이면 1백 50필을, 천인이면 2백 필을 바치게 하여, 거주하고 있는 소재지의 관청에서 바친 베의 숫자를 계산하여 맞으면 ‘도첩度牒’을 주어 출가하게 하고, 제 마음대로 출가하는 사람은 엄격히 다스리게 할 것입니다.”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 『태조실록』 1년, 1392년 9월 24일

 

사진 1. 『경국대전』의 도승조.

 

당시 15~40세 노비의 값이 오승포 1백 50필이고, 1개월 노비의 급여가 3필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승려가 되기 위해 바치는 100~200필은 적은 수치가 아니었다.(『태조실록』 7년 6월 18일) 그야말로 부자가 아니면 승려 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100~200필의 오승포를 바친 출가자에게 국가에서 ‘도첩’을 발급하여 승려로서 인정해 주고 군역이나 요역 등의 신역身役을 면제해 주었다. 우리나라에서 도첩이라는 용어가 처음 확인되는 것은 고려 충숙왕 때이다. 

 

지방의 향리로서 아들 셋을 둔 자는 그 아들을 삭발시켜 출가시켜서는 안 된다. 비록 아들이 여럿이라도 반드시 관청에 신고해서 도첩을 얻어야만 아들 한 명으로 하여금 삭발하는 것을 허락한다. 

- 『고려사』 충숙왕 12년, 12년 2월

 

아들 4명 이상이 되어야 1명을 출가시킬 수 있고, 관청으로부터 도첩을 얻어야만 삭발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다. ‘도첩’이라는 용어는 충숙왕 때 처음 나오지만 고려 초 문헌에 ‘도승度僧’이라는 표현이 보이고 있으므로 도첩 제도는 고려 초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도첩을 발급받지 않고 승려 된 자들도 많았던 것 같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 국가로부터 도첩을 발급받지 않은 승려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의정부에서 사평부·승추부와 함께 의논하여 말하기를, “무릇 승니僧尼는 재주를 시험하여 도첩을 발급해 주고 삭발하도록 허용함이 『육전六典』에 기재되어 있는데, 무식한 무리들이 나라의 법령을 따르지 아니하고 몰래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는 자가 매우 많습니다.” 하였다.

- 『태종실록』 2년, 1402년 6월 8일

 

사진 2. 『대전회통』 도첩 문서식.

 

도첩을 발급받지 않고 출가하여 승려 되는 자를 단속하지 못하면 그만큼 국가의 신역에 동원할 자원이 줄어들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를 단속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장에 발생할 소란을 염려하여 점진적이고 유화적으로 정책을 추진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올해 7월 이후에 승려 되기를 자원한 자는 『육전』에 의하여 정전丁錢을 받아 도첩을 주고, 7월 이전에 삭발한 각 종파의 승려는 내년 3월 그믐날로 한정을 하여 신분과 도첩의 유무를 따지지 말고 도첩을 주며, 그 이후에 도첩 없이 출가한 승려는 소재지 관청으로 하여금 붙잡아서 법률에 의하여 처벌하도록 하되 나이 70세 이상은 도첩을 주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태종실록』 16년, 1416년 8월 2일

 

조정에서는 도첩 없이 출가한 승려에게 기한을 정하여 도첩을 주어 출가를 허락하되, 그 기한이 지난 이후에는 엄히 다스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이 한 번으로 성공하지는 못하였으므로 도첩 제도를 폐지하는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출가한 승려에 대한 회유책이 지속되었다.

 

노역의 댓가로 발부한 도첩

 

임금이 우대언右代言 정연鄭淵에게 말하였다. … 제조提調 등이 말하기를, “만약 승려 무리들을 모아서 일을 시킨다면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두어 달이 못 되어서 준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나도 또한 “법을 어기고 승려 된 자가 매우 많지만 그들을 모두 환속하게 할 수도 없으니, 만약 그들에게 두어 달 동안 노역을 시키고 도첩을 준다면, 거의 두 가지 일이 다 잘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곧 도첩이 없는 승려 1천여 명을 모집하여 호군護軍 김방金倣에게 명하여 가평에서 재목을 채취하게 하였다.

 - 『세종실록』 11년, 1429년 8월 8일

 

위 인용문은 당시 태평관을 수리하면서 도첩이 없는 승려를 징발하여 일을 시키고 도첩을 발급했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국가의 주요 건축 사업에 도첩 없는 승려에게 일을 시키고 그 댓가로 도첩을 발급해 줌으로써 백성의 수고로움을 덜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승려들의 불만도 잠재울 수 있는 묘책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대처승에게 도첩을 발급하지는 않았다. 대처승은 회유의 대상이 아니라 환속시켜 국가의 신역에 복무시켜야 할 양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사진 3. 봉정사 승려 호구단자(불교학술원 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대처승의 환속하는 법은 이미 세워졌는데도 수령이 그 마음을 다하지 않고 오래된 폐단을 그대로 좇고 있는데, 이는 승가를 오염시킬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군적軍籍이 날로 감소하니 작은 일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관찰사가 먼저 힘써서 이루어야 할 바를 살피지 않음이니, 경들은 마땅히 다시 잘 살펴서 대처승을 다 추쇄推刷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 『세조실록』 8년, 1462년 6월 10일

 

불교를 맹신했다고 할 정도로 믿음이 깊었던 세조 역시 대처승에 대해서만큼은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여 모든 대처승을 추쇄하여 환속시켜서 국가의 신역에 복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도첩이 없는 승려 가운데 상당수가 대처승이었으므로 그들을 한꺼번에 강제적으로 환속시키기 어려웠던 것 같다. 성종 대까지 대처승의 추쇄는 지속되었다.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교서를 내리기를, “예전에 법을 어겨 승려 된 자와 대처승을 모두 추쇄하여 신역에 배정하고 9월에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신역에 배정한 자는 매우 적고 놀고먹는 자도 줄어들지 않았다. 이는 추쇄하는 것을 평상시의 일로 여겨서 마음을 쓰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니, 법을 세운 의미가 없다. 금후부터는 끝까지 추쇄하고 신역에 배정하여서 도망가서 한가롭게 노는 자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 『성종실록』 16년, 1485년 9월 12일

 

도첩제의 부활 사례

 

성종 대에 대처승의 환속 정책이 마무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에는 대처승과 관련한 기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성종은 승려의 자격증이던 도첩 제도 역시 폐지하였다. 『실록』의 「성종대왕 행장」에 보면, “성종 20년(1489) 예조에 명하여 다시는 중에게 도첩을 발급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도첩제의 폐지는 명종 대 기록에도 보인다.

 

정원이 아뢰기를, “… 성종 대에 도승법을 혁파하고 중종 초년에 또 승과의 대선大禪을 혁파했으니, 선대의 임금을 본받으시려거든 마땅히 성종과 중종을 본받으셔야 합니다. 지금 군액의 감소를 핑계대시어 선대 임금께서 이미 폐지한 법을 복구하려는 것은 바로 성종께서 도승법을 혁파하신 본의와 상반되는 것입니다. … ” 하니, 전교하기를, “양종에 관한 일로 대간·시종·유생이 여러 날을 논의하게 하였으니 대비께서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폐단은 옛날과는 달라서 국가를 유지할 형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대비께서 이러한 폐단을 고치고자 우리나라 개국 이래 전해 내려온 법을 다시 세운 것이다. 만약 도첩이 없는 승려를 모두 신역에 배정한다면 양민의 정전이 어찌 증가하지 않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 『명종실록』 5년, 1550년 12월 25일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대비는 도첩제를 복원함으로써 도첩이 없는 승려를 환속시켜 신역에 배정하게 할 수 있다는 논리로 성종 대에 폐지했던 도첩제를 복원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해 신하들이 상소를 올려 반대하였으나 명종은 문정대비의 도첩제 복원을 거부할 수 없었으므로 신하들의 요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1565년 문정대비 사후 도첩제는 다시 폐지되었다.

 

사진 4.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 범어사가 발행한 도첩度牒.

 

도첩제는 임진왜란 때 다시 부활하였다. 선조 26년(1593) 9월 9일에 비변사에서 “사명당 유정의 승군으로서 수급을 벤 자는 즉시 선과禪科의 도첩을 발급할 것”을 건의하자 선조는 곧바로 윤허하였던 것이다. 이때는 전쟁이라는 비상시에 승려에게 도첩을 발급함으로써 사기를 돋우고자 하였을 것이다. 승려의 도첩 발급은 인조 대 남한산성 축조 때에도 보인다.

 

비변사가 변방의 장군이 말을 달려와 보고한 것과 관련하여 아뢰기를, “관서 지방의 승려는 해마다 의주 등의 축성하는 곳에서 부역하고 있으며, 변방에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역시 성을 지키는 군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경기 지방의 남한산성을 쌓는 일에 어찌 관서의 승려를 징발하여 일을 시켜야 하겠습니까. 승려들 중에 군향軍餉을 바치고 도첩을 받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공문서를 내려주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그대로 윤허한다. 그러나 축성하는 일에 승려를 활용하고 나서 또 쌀을 받는다는 것은 타당하지 못할 듯 하니, 쌀을 받는 조항은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 『인조실록』 2년, 1624년 11월 30일

 

인조 대에 산성 축성을 위해 승려에게 도첩을 발급하기는 하였으나 그때뿐이었던 것 같다. 현종 대에 사헌부에서 승려에게 도첩을 발급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임금이 거절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현종실록』 11년, 1670년 1월 6일) 그 후 승려의 도첩과 관련한 기록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데, 이는 1675년(숙종 1)에 승려를 호적에 등재함으로써 도첩을 발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승려를 호적에 등재한다는 것은 승려가 되더라도 일반 백성과 똑같이 신역과 납세의 의무를 가지기 때문에 도첩을 발급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때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승려가 가지고 있던 비非 속인, 즉 성직자로서의 특권은 거의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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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불교학과에서 석사학위, 사학과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 교수와 조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국립순천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역서로 『운봉선사심성론』, 『월봉집』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조선후기 가흥대장경의 복각」, 「16-18세기 유학자의 지리산 유람과 승려 교류」 등 다수가 있다.
su558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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