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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빛의 말씀]
망상을 없애려는 것도 망상이니 오직 화두만을 참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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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  2024 년 4 월 [통권 제132호]  /     /  작성일24-04-05 14:30  /   조회229회  /   댓글0건

본문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 

[一種平懷 泯然自盡]

 

‘일종一種’이란 중도를 억지로 가리킨 말입니다.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고 양변을 떠나면 바로 중도中道가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일종一種이란 중도를 가리키므로 일체 만법이 여기에서 다해 버렸으며, 동시에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절로 다한다’고 했다 해서, 무엇이 영영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 ‘다한다’는 것은 일체 변견이, 일체 허망[妄]이 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항하사恒河沙 같은 진여묘용이 현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 인연을 좇지도 않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않으면 중도가 현전하여 일체 변견이 다하고 항사묘용恒沙妙用이 원만구족하게 됩니다.

 

오직 화두만 참구할 뿐

 

움직임을 그쳐 그침에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 큰 움직임이 되나니

[止動歸止 止更彌動]

 

“움직임을 그쳐서 그침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고요함[靜]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마음을 누르고 고요한 데로 돌아가려 하면, 고요하려는 마음이 점점 더 크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화두를 열심히 참구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망상이 일어난다고 이 망상을 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망상이 자꾸 일어나는 것과도 같으니, 이는 망상에 망상을 보태는 것이 되고 맙니다. 

 

사진 1. 『신심명信心銘』을 지은 삼조 승찬대사僧璨大師. 사진: 불교신문.

 

예를 들면 참선을 하는 데 있어서 “화두만 참구하고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도 하지 말고 피하려고도 하지 말며,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참구하라.”고 내가 누누이 일러주었는데도, 어떤 납자는 “자꾸만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 하는 이것이 참선 공부에서 가장 힘들다.”고 더러 나에게 말합니다. 이는 망상을 덜려고 망상을 일으킨 것으로서 망상에 망상 하나를 더 보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망상을 덜려는 생각도 덜지 않으려는 생각도 버리고 화두만 참구하라.”고 납자들에게 더러 일러줍니다만, 그것이 쉽게 안 되는 모양입니다.

 

이것이 그침[止], 곧 고요함을 좋아하여 움직임[動]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점점 더 크게 움직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니 어찌 한 가지임을 알 건가

[唯滯兩邊 寧知一種]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어떻게 중도를 알겠는가.” 하였습니다.

“그침[止], 곧 고요함은 버리고 움직이는[動] 대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이것도 양변이라는 것입니다. 움직임도 고요함도 버리고 자성을 바로 볼 뿐, 양변에 머물러 있으면 일종一種인 중도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육조스님께서도 유언에서 “언제든지 양변을 버리고 중도에 입각해서 법을 쓰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니

[一種不通 兩處失功]

 

‘일종一種’, 즉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진여자성眞如自性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의 공덕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

[遣有沒有 從空背空]

 

사진 2. 백련암에서 고암스님과 함께 하신 성철대종사.

 

이 구절은 참으로 깊은 말씀입니다. 현상[有]이 싫다고 해서 현상을 버리려고 하면 버리려 하는 생각이 하나 더 붙어서 더욱 현상에 빠지고, 본체[空]가 좋다 하여 공을 좇아가면 본체를 더욱 등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공이란 본래 좇아가거나 좇아가지 않음이 없는 것인데, 공을 따라갈 생각이 있으면 공과는 더욱 등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현상을 버리고서 공을 따르려고도 하지 말며, 반대로 본체를 버리고서 현상을 따라가려고도 말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양변이며 취사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취사심을 버려야만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도와 상응치 못한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더 상응치 못함이요

[多言多慮 轉不相應]

 

이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설명하고 거듭 설명을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본래 대도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 것[言語道斷 心行處滅]’입니다. 이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말로 표현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대도大道가 이와 같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려 하다가는 대도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 없느니라

[絶言絶慮 無處不通]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 곳에서는 자연히 대도를 모를래야 모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말과 생각이 끊어진’ 여기에 집착하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통하지 않아 아주 모르게 됩니다. 이 ‘말과 생각이 끊긴 것’은 그 자취마저 없는 데서 하는 말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경지에서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과 생각이 끊어진 곳’에 집착하면 전체가 막히고 맙니다. 여기서도 근본은 취사심을 버려야 대도를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歸根得旨 隨照失宗]

 

자기의 근본 자성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어 무상대도를 성취하고, ‘비춤을 따른다[隨照]’는 것은 자기 생각나는 대로 번뇌망상·업식망정을 자꾸 따라가면 근본 대도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춰 보면 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須臾返照 勝却前空].

 

잠깐 동안에 돌이켜 비춰 보고 자성을 바로 깨치면 ‘공했느니 공하지 않느니’ 한 것이 다 소용없는 꿈같은 소리라는 뜻입니다.

 

앞의 공함이 전변함은 모두 망견 때문이니

[前空轉變 皆由妄見]

 

앞에서의 공함이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변하는 것은 모두 망령된 견해[妄見]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18공十八空·20공二十空 등 여러 가지를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중생이 못 알아듣기 때문에 이런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실제로 뜻이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허공이 어떻게 옮겨 변할 수 있겠습니까? 공함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하게 된 것은 중생의 망견妄見 때문이며 진공眞空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시비를 일으키면 본성을 잃나니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不用求眞 唯須息見]

 

누구든지 깨치려면 진여본성을 깨치려 하지 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빛나듯 태양을 따로 찾으려 하지 말고 망상의 구름만 걷어 버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은 부처님과 같은 자성청정한 진여본성을 다 갖추고 있어서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여자성을 보지 못하는 까닭도 망견이 앞을 가려서 보지 못하는 것이니, 망견만 쉬어 버리면 진여자성을 달리 구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견이란 무엇일까요?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좇아가 찾지 말라

[二見不住 愼莫追尋]

 

두 가지 견해는 즉 양변의 변견을 말합니다. 이 변견만 버리면 모든 견해도 따라서 쉬게 됩니다. 그러므로 양변에 머물러 선악·시비·증애 등 무엇이든지 변견을 따르면 진여자성은 영원히 모르게 됩니다.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마음을 잃으리라

[纔有是非 紛然失心]

 

갓 시비가 생기면 자기 자성을 근본적으로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앞에서는 자기의 진여자성을 구하려고 하지 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면 된다고 했는데, 그 망령된 견해란 곧 양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그 양변을 대표하는 시비심是非心, 즉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을 들어 망견이라는 뜻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진 3. 김천 청암사의 목련꽃. 사진: 박우현.

 

누구든지 불법佛法이 옳고 세법世法이 그르다든지, 반대로 세법이 옳고 불법이 그르다든지 하는 시비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이 큰 병입니다. 우리가 실제의 진여자성을 바로 깨쳐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이 시비심부터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견을 쉬고 양변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비심은 두 가지 견해를 대표하는 예로 들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상대법相對法의 전체가 다 여기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 성철스님의 『신심명 증도가 강설』(장경각, 2001)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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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성철스님은 1936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10여 년 동안 절문 밖을 나서지 않았는데 세상에서는 ‘10년 동구불출’의 수행으로 칭송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하였다. 1981년 1월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열반하였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곁에 왔던 부처’로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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